몇년전 석가모니 부처님의 무명과 관련된 글을 읽으며 너무 당연하고 지당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http://ko.wikipedia.org/wiki/%EB%AC%B4%EB%AA%85_(%EB%B6%88%EA%B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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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타마 붓다[편집]
《잡아함경》에는 무명(無明)에 대한 정의와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 업, 번뇌성의 마음작용(특히, 부정사유와 무명과 갈애(집착, 애욕))의 관계를 보여주는, 아래에 인용된, 고타마 붓다의 설법이 있다.이 설법에서 고타마 붓다는 무명(無明)이란, 근(根) · 경(境) · 식(識)의 화합이 일어날 때 이전까지 쌓은 염오(染污)한 업(業)으로 인해 해당 경(境)에 대한 부정사유(不正思惟, 邪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 8정도의 정사유의 반대[36][37])가 일어나며, 즉 구체적으로는 악욕[欲, 惡欲: 불선한 욕구, 원함, 희망, 특히탐욕] · 에(恚, 瞋: 성냄) · 해(害: 해치려 함) 등의 번뇌성의 마음작용이 일어나며,[38][39][43] 이 부정사유로 인해 [해당 경(境)과 그 이치에 대한, 즉 사(事)와 이(理)에 대한] 치(癡) 즉 어리석음이 일어나는데 이 어리석음이 곧 무명(無明)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설법에서 고타마 붓다는 8정도의 정사유(正思惟)의 반대인 부정사유(不正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가 무명(無明) 즉 무지(無知)의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고타마 붓다는, 다시 무명은 갈애(집착, 애욕)의 원인이 되며, 다시 갈애(집착, 애욕)는 염오(染污)한 업의 원인이 되며, 염오(染污)한 업은 오염된 마음, 즉 3계에 속박된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의 원인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고타마 붓다는 부정사유(不正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가 무명(無明) 즉 무지(無知)의 원인이지만, 이렇게 부정사유에서 생겨난 무명(無明) 즉 무지(無知)는 다시 [더 큰 또는 더 오염된] 부정사유(不正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의 원인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몇년이 지나 지금 돌아보니 그 이해라는 것이 얼마나 얄팍하고 진정한 이해가 없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행동과 욕망을 이해 못하는 바가 없는 관계로 범인들의 행동으로 인해 감정이 이는 것은 많이 줄어든 편이지만 그런 이들을 볼때면 가슴이 답답하고 이해를 시키고 싶은 욕망이 든다. 하지만 그것이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정보를 요구 한다는 사실을 생각할때 마다 당장 이해시키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이 또한 욕심이라 하겠다. 그런 안타까움이 들때 마다 자리를 떠나 생각에 잠긴다. 왜 저러도 어리석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근자에 드는 생각이 세존의 말씀처럼 알지 못해서 이라는 생각이 든다 . 그리고 본인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 충분한 검증이나 증거가 없슴에도 그냥 본인이 맞다는 습관 또는 본인 에고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에 본능적으로 근거 없는 것을 믿고 그것을 통해서 또 사고를 하고 말하고 계속 그것이 고착되고 반복되는 듯하다.
이들은 논리적 사고를 하지 못하고 바른 설명에 귀 기울이지 않거나, 바른 설명을 들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청정한 참 본성, 참나가 탁한 에고에 의해서 들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불행하게도 지성이 떨어지는 사람일수록 기도하고 명상하고 사유할수 있는 기회와 의지가 너무나도 없다. 그들의 지성으로는 다람취 챗바퀴돌듯 나쁜 사유를 계속 돌수 밖에 없는 환경에 있고 그러면서 그러한 자신에 매우 강하게 그리고 유일하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기에는 어려운 것이 사회에서 체계적으로 어릴적부터 세뇌를 시키기 때문에 쉽사리 벗어나기가 어렵다.
논리나 지성을 통해서도 그 반대인 기도를 통해서도 아니면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언제나 청정한 나와 만날수 있다. 개인의 감정에 치우치지 않은 정확하고 철저한 검증, 공을 명상하는 것, 현실에서 부정한 것, 돈이나 인연에 연연하지 않고 저항할수 있는 것이 바로 같은 맥락이다. 사소한 배려와 판단 양심 하나가 당신을 무명의 버릇에서 빼내어주는 도구가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불교계에서는 8정도를 강조하는 지도 모르겠다.
생활의 매순간이 바로 선택의 연속이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청정한 실천의 시험장에 와 있는 셈이다. 영적인 삶을 산다 말하면서 일단 돈은 벌어야 한다는 생각은 무명의 소치이다. 욕심이 방편이는 옷을 입으면 자신을 속이 는 역할을 한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것이 모여 큰것이 되는 것임을 왜 모르는 것인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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