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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교란 무엇인가? 5 (달라이라마) - 무엇에 어떻게 귀의할 것인가
밀교란 무엇인가? 5 (달라이라마) - 무엇에 어떻게 귀의할 것인가
(1) 귀의할만한 분
우리가 깊고도 끝없는 윤회의 바다에서 허덕이는 까닭은 오랫동안 쌓아온 욕심과 성냄 등의 번뇌 때문이다. 그 번뇌들이 고통의 업을 만들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니, 마치 바다에서 무서운 상어떼의 이빨에 공격을 당하는 것과 같다. 과거생에 지은 악업으로 인해 우리의 몸과 마음은 현생의 고통을 받고, 미래에까지도 많은 고통을 불러들이게 되는 것이다.
윤회가 끊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내면에서는 좋고 나쁜 생각들이 계속 줄지어 일어나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보자.
'내가 이런 일을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재물을 축적할 수 없을 텐데,....'
또는 좋은 물건을 보면 '아, 저 물건을 가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부자가 되거나 잘되는 것을 보면 공연히 질투심을 일으킨다.
아름답고 잘생긴 사람을 보면 함께 하고 싶은 욕망을 일으키고, 원수를 보면 곧 분노하여 싸우려 하며,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면 잠시도 견디기가 어려워 빨리 떠나려고 한다.
우리는 밤낮없이 번뇌와 함께 한다. 좋아하는 것에는 욕심을 내고, 나쁜 것은 싫어한다. 심지어는 꿈 속에서조차 그러하니, 잠시도 쉴 시간이 없이 마음이 번뇌망상과 완전히 하나로 얽혀 사는 것이다.
그럼 어떠한 분이 번뇌망상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우리의 귀의처가 될 수 있는 것인가? 그 귀의처는 반드시 모든 번뇌망상을 끊어 어떠한 허물도 없어야 한다.
귀의처는 반드시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겠다는 원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능히 타인에게 이로움을 줄 수 있는 덕목과 능력을 구족하고 있어야 한다. 만약 이러한 요소들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우리들의 귀의처가 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왜냐하면 이쪽 강물에 빠진 사람이 저쪽 강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구해달라고 도움을 청하는 것과 같은 꼴의 귀의가 되기 때문이다. 강물 속에 빠진 우리는 반드시 강물 밖에 있는 사람에게 구원을 요청하여야지,같은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구원을 청한다면 구제받을 길이 막막할 뿐이다.
만약 그대가 강물에 빠져 강 저편에 서 있는 누군가에게 구원을 청하였을 때, 그가 당신을 구해줄 뜻이 없거나, 마음은 있지만 능력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람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귀의처는 자신이 고통 속에 얽혀 있지 않을뿐더러, 이미 해탈을 얻고 대자유를 얻어 허물이 전혀 없고 일체 공덕을 원만히 구족한 존재이어야 하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 존재가 누구인가?
모든 허물을 완전히 끊고 일체 덕목을 구족하신 분은 오직 부처님뿐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마땅히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귀의하여, 입으로 부처님을 찬탄하고, 몸으로 부처님께 예경하며, 부처님 법을 향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모든 허물을 다 '여의었다(捨)'고 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불공법(不共法)이 있기 때문이다.
① 선사(善捨): 좋은 방편으로 장애를 조복할 뿐, 그 장애의 세력에서 도피하지 않는다.
② 원만사(圓滿捨): 약간의 장애를 여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장애를 완전히 다 여의도록 하신다.
③ 불퇴전사(不退轉捨): 모든 고통과 각종 장애를 일으키는 원인을 완전히 항복받아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하신다. 곧 장애나 고통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인연(助緣)들이 되풀이되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분이 부처님인 것이다.
(2) 불법이 최상의 귀의처
부처님 다음의 귀의처는 불법(佛法), 곧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종카파 대사는 부처님과 불법을 지극히 찬탄하였지만, 다른 외도들을 경시하지 않았다. 오직 불법의 위대함을 찬탄하여 수행자로 하여금 전심전력으로 불법만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을 뿐이다. 왜냐하면 불법을 수행하려면 반드시 혼신의 힘을 다하여야 하며, 지극한 마음으로 불법을 믿고 기뻐해야 하기 때문이다.
티베트에는 '바늘에 귀가 두 개면 옷을 꿰매기가 어렵다'는 속담이 있다. 이 속담은 두 가지 마음을 가지고는 어떠한 일도 성취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수행자의 마음이 우유부단하여 안정되지 못하면 한 법만 오롯하게 정진할 수가 없다.
종카파 대사는 '불법이 최상'이라고 설하셨는데, 그 뜻은 불법을 수행하면 다른 교를 수행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이익을 얻고 삼악도에 빠질 우려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귀의처에 대한 신심만 가지고는 안전하지가 않다. 만약 우리에게 바른 지견이 부족하다면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오직 '불교가 최상이다'고 하는 그 말 한마디뿐이다.
귀의란 한 면만을 맹목적으로 집착하여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경전을 잘 보고 비교한 후, 어떤 것이 진리에 맞고 맞지 않은지를 잘 살펴 신심의 근거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 가지 수행에 마음을 두게 되었을 때는 반드시 바른 진리에 의거하여 깊은 신심을 일으키는 것이 필요하다. 오직 불법만이 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깊이 믿고, 불법의 수행을 통해야만 허물이 없는 경지에 이를 수 있으며, 능히 불법 속에서 모든 덕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믿어야 하는 것이다.
배우는 입장에 있는 이들은 마땅히 심사 숙고하여, 탐심과 진심의 번뇌망상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완전하고 원만한 수행자의 길을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수행자가 성취해야 할 목표에는 두가지가 있다. 첫째는 잠시 동안의 성취인 증상생(增上生)으로, 둘째는 구경의 성취인 결정승(決定勝)으로, 번뇌를 완전히 끊음과 동시에 부처님의 모든 지혜와 덕을 증득함을 가리킨다.
불교는 이 두 가지 목표에 대한 가르침을 구족하고 있고, 이 두 가지를 성취하게 하는 방편이 있다. 그러나 우선 달성해야 할 목표는 증상생이다. 왜냐하면 경정승의 지위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증상생을 기초로 삼아야만 비로소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승에 오르는 수행법은 반드시 진리에 합당하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 해탈을 위한 가르침과 해탈을 증득하게 하는 경전 등이 진리에 합당하게 성립되어 오류가 없다고 인정되어야만 경전에 대한 깊은 신심과 환희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결정승의 경전에 대한 믿음과 환희심이 생기면 증상생의 가르침과 그 과를 얻는 방편법을 설한 여러 경전에 대해서도 결단코 틀림없다는 깊은 신심이 생겨나게 된다.
경전 내용의 3분류
부처님께서 설한 경전은 그 내용 면에서 크게 현사. 불현사. 극불현사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① 첫째는 현사(現事): 우리의 눈과 귀 등 오관의 감각을 통하여 분명히 볼 수 있고 인지할 수 있는 법이다.
② 불현사(不現事): 비량(比量)과 추리를 통해 알 수 있는 법이다. 예를 들면, 공성(空性)에 대한 가르침이 이에 속한다.
③ 셋째는 극불현사(極不現事): 실제로 볼 수도 없고 비량을 통해서도 인지할 수 없는 법으로, 윤회나 인과응보에 관한 가르침 등이 이에 속한다.
현사의 법은 비량으로 증명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감각 기관 앞에 분명하게 모습을 나타내므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현사의 법은 비량을 통하여 인지하고 증명할 수밖에 없다. 공성과 같은 이치가 비록 심오하기는 하나 극불현사의 법이 아니므로, 비량을 통해서 인지하고 증득할 수 있는 법이다. 예를 들면, 병이 깨어지는 것을 보고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빗대어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한 공성에 관한 심오한 가르침을 깊이 믿어 의심을 일으키지 않게 되면, 부처님께서 설한 공성이 아닌 다른 도리들도 똑같이 중요하게 여기고 받아들일 수가 있게 된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극불현사의 법까지도 오류가 없는 정확한 진리임을믿어 의심치 않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현우경(賢愚經) 등에서 설하신 업과 인과응보의 도리를 접한 이들은 '실제로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 의심을 낼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치가 극불현사의 법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증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부처님께서 마음 내키시는 대로 설하신 것이라는 오해까지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 보거나, 부처님께서 더 중요한 문제로 삼은 다른 가르침을 통하여 이를 증명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공성에 대한 이치나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보리심과 자비심에 관한 이치들을 분석하고 관찰해 볼 때, 업과 인과응보가 불교도 비불교도를 막론하고 누구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한쪽으로 치우친 파벌 의식이나 탐심. 진심 등의 번뇌에 입각하지 않고, 부처님께서 설한 가르침들을 그대로 받아들여 분석하고 관찰하여 확신을 얻는다면, 그 사람은 마음 속에 일생 동안 쓰고도 남을 유력한 생명의 원천을 지닐 수 있게 된다. 실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이 거짓이 아니라는 확신이 생기면 부처님의 가르침 모두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성유에 대한 각 부파의 주장
물론 어떤 이들은 '윤회의 고통과 열반의 청정한 경계는 바른 진리에 의지하여 성립될 수 없다"고 오해하기도 한다. 또한 "해탈과 일체종지는 불현사여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교량(敎量)만을 의지해서 증명할 수 있다"고 잘못 인식하기도 한다. 그들은 오직 "경론만을 믿을 뿐, 나 스스로는 이를 증명할 만한 근본적인 근거가 부족하다"고 말한다.그러나 이와 같은 견해로 '귀의'를 말한다면, 자기 스스로 오직 귀의의 허물만 드러낼 뿐이다.
또한 윤회의 원인이 무엇인지, 윤회가 끝나면 어떻게 되는지는 불현사법의 비량으로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비량 때문에 윤회의 주요 원인인 '자성유(自性有:자성이 존재함)'라는 그릇된 견해가 다시 성립되므로, 공성의 지혜를 통달하지 못하면 윤회를 대치하는 올바른 방편을 증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해탈을 얻음에 있어 '자성유(自性有)'에 대한 고집은 크나큰 장애가 된다. 만약 아견(我見)'를 부정하고, '아가 항상 있다'는 이론을 가지고 윤회에서 해탈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곧 스스로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이에 대해 불교의 최고 부파인 중관응성파(中觀應成派)에서는 비교적 낮은 차원의 중관자속파(中觀自續派)나 유식부, 경량부 및 설일체유부의 견해에 모순점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중관응성파에 의하면, 생사윤회는 근본은 '모든 법에 자성이 존재한다'는 그릇된 집착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며, 그것은 곧 무상한 집합체인 오온(五蘊)을 '실다운 나'라고 집착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다른 불교 부파에서는 '제법에 자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관응성파에서는 자성유가 아견(我見)의 망령된 분별의식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견해를 가진 부파들이 윤회에서 해탈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스스로 상당한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한 교리의 가르침이 구경의 지견을 통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일시적인 방편으로 설해진 법인데도... 다른 종교의 경전에서는 고통의 경계에서 해탈함과 청정한 세계의 경계를 논함에 있어
더 큰 허점을 드러내고 있다.
외도 경전에는 사선팔정(四禪八定)이나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부분에 대해 상당히 정확한 교리가 설해져 있으나, 종교의 주요한 대상인 사람에 대해서는 스스로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창조주인 신은 항상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신이 창조한 윤회는 파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라. 만약 '인(因)'이 항상 있다면 그 '과(果)' 역시도 항상 있어 파괴됨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과'인 윤회가 항상 있지 않다면, 그 '인'인 창조주 신 또한 영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배우는 이들은 분명히 파악하여야 하는 것이다.
견고한 신심으로 귀의하라
실로 해탈의 길을 자성 청정한 광대한 진여법계의 경지로, 밖에서 오는 더러움이나 허물이 완전히 다 없어진 상태이다. 따라서 선지식들은 해탈의 경계나 그 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망령되어 각종 교리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법을 배우는 자는 밀교 경전에서 일깨워주고 있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잘 기억해야 한다.
"불설(佛說)과 불설(佛說)이 아닌 가르침에 대해서 진리에 맞추어 자세하게 생각하고 관찰하여 그 우열을 잘 가린 다음에는 마땅히 다른 교파를 가볍게 여기거나 멸시하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외도들의 교리 또한 항상 부처님의 가피에 의해 전해지기 때문이다."
어떤 선지식들은 그릇된 가르침을 전수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큰 선지식들은 부처님의 화현으로서 전혀 허물이 없는 모든 성취를 구족하여 옳고 그른 도의 차별을 잘 통달하고 있다.
그러나 큰 선지식이 오류가 없는 바른 법을 설할지라도 중생들에게 아무런 효력이나 이익이 없게 되면, 할 수 없이 방편으로 구경이 아닌 가르침을 설할 뿐, 그 이상 다른 법을 모르는 체하는 것이다.
마땅히 사람들은 허물이 없는 완전한 법을 배워야 하겠지만, 이 또한 각자의 상황에 따라서 논해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유식(唯識)을 좋아하고 중관(中觀)으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에게는 당연히 유식이 그에게는 최상의 법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비불교인 외도의 교리 또한 비슷한 예가 적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외도의 교주와 그 교리, 그 수행자들도 귀의처가 될 수 있다. 다만 구경의 귀의처가 아니라는 것이다.
편견이 없는 냉철한 사유와 관찰과 분석을 통하여 귀의처에 대한 온전한 신심이 일어났을 때, 비로소 견고하고 흔들림 없는 신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정녕 우리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일어난 신심은 진리에 대한 자세한 관찰과 분석을 거쳐야 얻어지는 것이요, 흔들림 없는 신심이 있어야 진정한 '귀의'가 완성되는 것임을 꼭 명심하기 바란다.
출처 : 달라이라마라의 밀교란 무엇인가 / 달라이라마 저, 석설오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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