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월당대선사새봉진영⁄ 霜月堂大禪師璽篈眞影 ⁄ Portrait of Priest Sangwoldang Saebong


LACMA를 갓더니 지장보살 탱화는 없어지고 중국 미술이 한국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눈에 띄는 것이 새월 상봉 대선사님의 진영이였습니다.










위의 원문에 보시면

"이렇게 칠성은 우리 나라 불교 속에서 처음에는 단순한 수호신으로서 수용되었다가 다시 칠성 본래의 모습이 강조되었고, 그 결과 이를 더욱 불교화시켜 사찰 외각에 독립된 칠성각을 만들어 모셔지게 된 것이다. 조선 후기의 상월당 새봉(霜月堂 璽捄, 1687 - 1767) 스님은 북두칠성을 섬긴 것으로 유명하다. "
우연히 뵙게 된 것일까요?



더군다나 lacma 박물관 제품이 유일한 진품으로 추청된다고 합니다.
현재 상월당 새봉의 진영은 선암사에 한 점 더 남아 있는데, 자세와 복식 등이 거의 같으나 문양이 이 작품보다 간략화되어 있고 옷 주름이 형식화되어 있어 이 작품을 모본으로 하여 후대에 그려진 것으로 판단된다. 이 진영은 제작연대가 명확하며 조선시대 진영 편년의 중요한 자료로서 원래는 선암사에 봉안되어 있었던 그림으로 짐작된다.


자시(23:30~01:29) = 삼경
자초시 : 밤 11시30분 ~ 12시29분
자정시 : 밤 12시30분
선암사상월대사비

순천 선암사 상월당 새봉대사비문

상월대사비명
유명조선국선교도총섭국일도대선사상월대사비명병서
대광보국숭록대부 원임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 감춘추관사 이은이 글을 짓고
가선대부 병조참판 동지경연사 
채홍리는 글씨쓰고 전액한다.

내가 동쪽 산등성이의 병사에서 요양하고 있을 때
 인근 암자에 지리산 사람 춘파의일대사가 있었는데 
때때로 와서 그 스승인 혜암윤장의 법조인 상월대사의 비석을 세우는 
====
 하루는 응운등오가 지은 상월당의 행적을 
소매속에 가지고 와서 매우 간절하게 명을 청하였다.
 나는 불교의 학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다만 한가한 시간이나 보내려고 한번 훑어 보았다.
대사의 휘는 새봉,
 자는 혼원이며 상월은 그 호이니 
속성은 손씨이며 순천인이다.
 어머니 김씨가 꿈에 밝은 구슬을 받고 임신하여 
정묘년 정월18일에 출생하였다. 
어려서도 모래와 돌을 모아 솔도파를 만들며 놀더니
 11세에 조계산 선암사의 극준장로에게 출가하였다.
 15세에 머리를 깍아 스님이 되고
 이듬해에 다시 세진당 화악문신스님에게 구족계를 받고
 18세에 설암추붕에게 와서 학문의 길에 들어갔다.
도를 이미 통하고는 벽허, 남악, 연화등을 두루 찾아 뵙고
 계사년에 고향에 돌아와 어버이를 뵈었다.
 책 보따리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무용수연스님은 한번 보고서 탄식하기를
 “지안스님 이후의 제일인자다.”
라고 말하였다.
대사는 중간 정도의 키에 둥근 얼굴에 큰 귀였으며
 목소리는 종소리처럼 우렁차고 앉으면
 마치 흙으로 만든 조각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설암스님에게서 의발을 전수받았으니 
이는 임제종의 적통을 이은 것이다.
무릇 밥그릇과 지팡이를 가지고
 국내의 명산을 거의 다녔으며 
한 밤중 자시에는 반드시 북두칠성에 절을 올렸다.
 언제나 진정한 이치를 강론하여 밝히며
 마음으로 실천하고 지혜로 증명하는 것을 가르침의 문으로 삼았다.
 항상 “배우는 사람이 만일 자신을 돌아보는 공부가 없다면
 비록 매일 수천마디의 글을 외워도
 본인과 절에 이로운 것이 없다.”
라고 말하였고 또,
 “하루라도 생각하는 것이 착실한 공부가 없다면
 곧 식사를 할때 밥이 부끄럽다.”
라고 하였다.
무진년에 예조로부터 선교양종도총섭국일도대선사에 임명되었고
 경오년에는 표충원장으로 머물렀다.
정해년 10월에 가벼운 질환이 있더니 
입으로 게송을 전해주기를 
“물은 흘러 바다로 들어 가고 달은 져도 하늘을 떠나지 않는다.”
라고 말하고는 편안히 세상을 떠나니
 세수가 81세요, 법랍은 70세였다.
 보라색 구름이 하늘을 뒤덮더니 7일 만에 없어졌다.
 여러 제자들이 호를 더하여 평진대종사라고 하였다.
다비를 하고는 찬 구슬을 받들어 묘향산에 이르자
 3개의 사리가 함께 나와 마침내 그중 하나는 석종에 갈무리하고
 또 순천의 선암사와 해남의 대둔사에 나누어 안치했다고 한다.
아아! 대사는 진정 선을 배워서 그 실천함이 있는 분이었다. 
식사를 할 때 밥이 부끄럽다는 등의 말은 
족히 쇠퇴한 풍속을 경계하고 깨우칠 수 있다.
 이에 늙고 병들었다고 사양하지 못하고 곧 명을 하노라.
아! 대사가 도를 닦음은 또한 매우 긴요한 곳에서 시작하여
한 마음으로 힘써 실천하여 높은 경지, 오묘한 영역에 도달했네.
슬프다, 요즈음 사람들은 모가 나야 할 그릇이 
모가 나지 않은 것 같아서
(이론만 있고 실속이 없음을 비유)
쓸데없이 유학자라는 이름만 차지하고 있으며
 그 행실을 돌아보면 다르구나.
만일 대사에게 비교한다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내가 이에 감동하여 그 비석에 글을 쓰노라.
숭정 기원후 세 번째 임인년 6월 일에 세움

비석을 세워서 공적과 실상이 드러나고 탑을 조성하여
 신령스럽고 기이한 것이 나타나는 것이다. 
아! 우리 스승이 입적한 후에 관서와
 호남에 사리를 모신 세곳의 탑이 
몇 겁을 지나도 마멸되지 않을 것이고
 풀베는 아이나 소를 모는 목동들도 또한 모두 가리키며 
상월당대사의 사리가 있는 곳이라 할 것이니 
비로 비석이 없어도 또한 괜찮을 것이지만
 입적한 후의 신령스러운 일이 
과연 공적과 실상이 쌓인 것에서 연유한 것인즉
 비석이 또한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
 오가 비록 의발을 전수받는 것에는 감히 나설 수 없으되
 ==== 
은혜를 받은 것이 가장 깊어 천리를 달려 
두 번이나 서울에 들어가 다른 산의 돌을 바닷길로 실어오고 
비석의 글을 명망있는 사람에게 얻고자 하였으나
 병정 이후 글을 얻어 우리 스승의 비액을 할 수 없었다.
 혜암과 함께 걱정하고 계획하여 비석은 바꾸지 않되
 글은 고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에 묻어버린 비석을 다시 세웠다.
 이 절은 우리 스승이 구족계를 박은 곳이요,
 대둔사는 우리 스승이 조사의 법을 이은 곳이다.
 이 절의 비석은 혜암이 힘을 내어 주관하였고
 대둔사의 비석은 내가 마음을 다해 공사를 마쳤으니 
후세사람들이 이 곳에서 비석을 어루만지며 
우리 스승의 공적과 실상이 깃든 유적을 알수 있을 것이다.
문인 전 행 선교종정 응운등오는 삼가 기술하고 쓴다.
            
문인 두오  조관  담정  각수  일준  지은  재안  각선  원민
      탁준  경화  정안  축계  채문  태숙  숙징  비은  정수
      등오  윤섬  현준  진찰  법련  즉상  서민  최화  붕혜
      탄춘  우징
 영족   취여  본유
 선참   독존  경감
법손   성천  모근  혜연  붕운  민휘  탄정  정심  지영  두백
      탁계  수초  낭성  탁린  성우  체우  윤장  진한  만경
      탁훈  심열  성태  선명  극안  법심  관성  대령  선규
      우경  정밀  민화  영준  치정  관일  리?  장홍  소?
      유태  지서  축홍  유정  태은  밀탄  염륜  내언  해선
      강관  창학  강익  재한
 증손 경인  덕홍  타붕  성일  취선  득총  독찬  옥린  거감
      섭한  유정  재유  탄민  능찬  광혜  혜기  상선  여관
      대인  보윤  계화  충휘  의잠  회기  홍우  희성  체안
      신묵  의정  취우  경허  신제  민화  식활  태수  차휘
      평탄  영총  의?  성수  이준  성유   결오  척붕  자경
      지수  의융  수경  서홍  청안  궤학  행우  수혜  체활
      영순  지연  덕활  덕민  유철  제활  유언  취안  칭일
      영훈
현손   처일  재수  채원  지형  국현  대순  태한  채영  몽열
      능변  윤명  근일  정우  색윤  세응  일현  강홍  원준
 수계   비현  각은  일천  일연  일안  감한  감언  감혜  감활
      월언  월혜  월심  내은  내순  탄홍  송광은학  대둔출학
      쌍봉호학
 시주   목관 조형중
      전행선교종정 서악등붕  가선 김일선
      북한총섭 가선 연훈  통정 극초
      전행팔도도승 가선 육만  가선 회순  가선 붕환  가선 지순
      전행도내공원 가선 회준  가선 보천  가선 궤징  가선 견우
             거암태기   가선 한일  가선 월정  가선 채징
             가선 충밀  가선 면정  가선 평규 
             숭정대부 최익중
      성암인혜  낙운등수  가선 의수   흥국사  송광사  대흥사
      태안사  감로사  파근사  선국사  실상사  화엄사  송천사
      옥룡사  만흥사  향림사  동화사  쌍봉사  보림사  도갑사
      쌍계사  개흥사  천관사  대둔사  미황사  불갑사  운흥사
      불회사  개천사  정수사  만덕사  석천사  만연사  서봉사
      용천사  용흥사  능가사  금탑사  관음사  적상사  원통사
      영남 표충사  동하쌍계사  다률사  백천사  옥천사  청곡사
         운흥사  화방사  용문사  엄천사  문수사  군자사
         지곡사  장수사  용계사  금룡사  대승사
      간성 건봉사
      양양 신흥사
      대원무외  영취산인 혼영  읍거통정 성선종  가선 진옥
산중종사 우행  신활  지인  경척
      시주지 통정 래언
      불고  도감통정 출인
      유나  가선 붕?
      찰중  통정 근혜
 전함   지탄  전비시도감 숙준  환혜  직명  촉령  진운  래철
      축성  한일  휘준  휘선  익총
 지전   감활  경성  만권  존식  소희
 서기   소현
 운석시소임 금활 취한 면활
 농대가첨승권기서
 육백대중공위역부
 삼강   신책  견총  승선
 연화   도감  가선 회준
      별좌  본유
      공궤  칭옥
      내왕  서진
      경래각원  이세득 김덕리 이춘방
      석공  이명득
      평산석
順天 仙巖寺 霜月堂 璽篈大師碑文
霜月大師碑銘【篆書】
 有明朝鮮國禪敎都摠攝國一都大禪師霜月大師碑銘 幷序
  大匡輔國 崇祿大夫 原任議政府 左議政 兼領經筵監 春秋館事 李溵 撰
  嘉善大夫 兵曹参判 兼 同知經筵事 蔡弘履 倂 書篆
余養疾于東岡丙舍 鄰菴 有智異山人 春坡義(王+白)大師者 時時來疑 其師惠庵玧藏法祖師霜月 竪碑經營矣 一日 袖應雲燈寤所撰 霜月堂行蹟 謁銘甚懇 余於浮屠之學 無聞焉只爲遺閑 試閱其卷 師諱壐篈 字混遠 霜月其號也 俗姓孫氏 順天人 母金氏 夢明珠而娠 以丁卯正月 十八日生 幼時嬉戱 聚沙石 爲窣堵波 十一歲投曹溪山之仙巖寺極俊長老 十五薙髢 又明年 受具於洗塵堂文信大師 十八参雪巖 道旣通 遍叅于碧虛 南岳 蓮華 癸巳歸觀本鄕 四方須笈者 日益衆 無用一見 歎曰 涉安後一人也 師曰而中身 圓面大耳 聲若洪鍾 坐如泥塑 受衣鉢於雪巖 盖臨濟嫡傳也 凡國內名山 甁錫殆遍 子夜必拜北斗 常以講明眞解 心踐智證 爲法門 嘗曰 學者 如無返觀工夫 雖日誦千言 無益於己刹又曰 一日念頭 不着實功 便對食愧飯 戊辰自春 曹署禪敎兩宗都摠攝國一都大禪師庚午住表忠院長 丁亥十月 有微疾 口授一偈曰 水流元去海 月落不離天 怡然順世 世壽八十一 法臘七十 紫雲翳空 七日乃滅 羣弟子 加其號曰 平眞大宗師 及茶毘 奉寒瓊至妙香 而三珠迸出 遂藏其一於石锺 又分安于順天之仙巖 海南之大芚云 嗚呼 師誠學禪而有其實者也 對食愧飯等語 有足以警醒衰俗 於是乎 不以老朽辭 而輒爲之銘曰
      繄師修道  亦自喫繄  單心力踐  高步玄壺
      嗟今之人  觚而不觚  徒占儒名  夷考則殊
      若比於師  寧不愧恧  我感于斯  題之貞石
                 崇禎紀元後 三壬寅 (1782) 六月 日 立
【陰記】
立碑而功實著 造塔而靈異顯 噫 吾師示寂之後 關以西 湖之南 三顆舍利之塔 可閱劫不磨 童穛竪牧 亦皆指點 以爲霜月堂寶珠之藏 則雖無碑 亦可也 而寂後靈異之迹 果由於功實之積 則碑亦不可無也 窹雖不敢擬於衣鉢之托 而括塵障風幡之喩 受恩最深千里裏足 再入京師 他山之石 浮海而運 碑板之文 聞名而得 丙丁以後 不可以其文 涵吾師碑額 與惠庵藏公 發慮共謀 石不改而文不得不改 肆乃復立埋置之碑 此寺 吾師受具之所 大芚 吾師繼祖之地 此寺之碑 惠庵 出力主之 大芚之碑 寤也竭心了功 後之人摩挲於此 可知吾師功實之遺跡云爾
             門人 前行禪敎宗正 應雲燈寤 謹述書
 門人   杜五  慥冠  淡定  覺樹  一儁  智銀  在眼  覺禪  圓旻
      卓濬  景華  正眼  竺桂  采文  泰肅  淑懲  費隱  定樹
      燈寤  允暹  顯雋  晋刹  法槤  卽象  瑞敏  最華  鵬慧
      綻春  雨澄
 令足   就如  本有
 禪參   獨存  敬感
 法孫   性天  慕根  慧衍  朋運  旼徽  坦淨  定心  智榮  杜伯
      卓戒  守初  朗成  卓僯  性宇  體宇  玧藏  進閑  滿炅
      卓訓  心悅  誠太  善蓂  克岸  法心  寬性  大領  選奎
      佑瓊  正密  敏華  永俊  致定  觀一  利  壯洪  素
      裕兌  摯舒  竺洪  有正  泰隱  謐綻  念倫  耐言  海禪
      講瓘  昶學  講益  再閑
 會孫   敬寅  德洪  妥朋  性一  就禪  得聰  獨贊  玉璘  巨鑑
      攝閑  有定  載瑜  坦敏  能贊  廣惠  慧旗  尙禪  呂寬
      大仁  普允  桂花  冲徽  義箴  會器  洪禹  禧成  體安
      愼黙  義珵  就雨  景許  愼弟  旻華  識活  兌修  此輝
      平綻  永聰  義  性修  以懏  性瑈  決悟  尺㻚  子敬
      志脩  義融  受瓊  序鴻  晴岸  軌學  幸祐  守慧  體活
      永恂  志演  德濶  德敏  裕喆  濟活  惟彦  就安  稱一
      永勳
 玄孫   處一  再修  采元  智浻  掬賢  大淳  太罕  采永  夢悅
      能辯  胤明  近一  正愚  色允  世應  一絢  講洪  圓俊
 受戒   丕賢  覺銀  日天  一演  一安  感閑  感彦  感惠  感活
      月彦  月慧  月心  乃銀  乃淳  綻洪  松廣隱學  大芚出學
      雙峯好學
 施主   牧官 趙衡重
      前行禪敎宗正 西岳等鵬  嘉善 金一善
      北漢總攝 嘉善 演訓  通政 極初
      前行八道都僧 嘉善 六萬  嘉善 會淳  嘉善 鵬煥  嘉善 志淳
      前行道內公員 嘉善 會俊  嘉善 保川  嘉善 軌澄  嘉善 見宇
             巨庵泰旗   嘉善 漢日  嘉善 月淨  嘉善 采澄
             嘉善 忠密  嘉善 勔淨  嘉善 平奎
             崇政大夫 崔益重
      城巖印慧  樂運等守  嘉善 義修   興國寺  松廣寺  大興寺
      泰安寺  甘露寺  波根寺  善國寺  實相寺  華嚴寺  松川寺
      玉龍寺  萬興寺  香林寺  桐華寺  雙峯寺  寶林寺  道岬寺
      雙溪寺  開興寺  天冠寺  大芚寺  美黃寺  佛岬寺  雲興寺
      佛會寺  開天寺  定水寺  萬德寺  石泉寺  萬淵寺  瑞鳳寺
      龍泉寺  龍興寺  楞伽寺  金塔寺  觀音寺  赤裳寺  圓通寺
      嶺南 表忠祠  東河雙溪寺  多率寺  百泉寺  玉泉寺  淸谷寺
         雲興寺  花芳寺  龍門寺  嚴川寺  文殊寺  君子寺
         智谷寺  長水寺  龍溪寺  金龍寺  大乘寺
      城杆 乾鳳寺
      陽襄 神興寺
      大圓無畏  靈鷲山人 渾榮  邑居通政 成善宗  嘉善 振玉
 山中宗師 宇幸  愼活  止印  竟陟
      時住持 通政 來言
      佛庫  都監通政 出仁
      維那  嘉善 鵬
      察衆  通政 近慧
 前銜   志坦  前碑時都監 淑俊  幻慧  直明  燭玲  震雲  來哲
      竺性  漢日  暉俊  暉善  益聰
 持殿   感活  敬性  萬勸  存湜  素希
 書記   素玹
 運石時所任 錦濶 翠閒 勉活
 籠臺加簷僧眷起誓
 六百大衆共爲役夫
 三綱   伸策  見聰  勝禪
 緣化   都監  嘉善 會俊
      別座  本宥
      供饋  稱玉
      來往  敘進
      京來刻員  李世得 金德利 李春芳
      石工  李命得
      平山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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