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공능은 연공인이 추구할 것이 아니다
모든 연공인은 모두 공능에 관심을 두고 있다. 신통(神通)이란 것은 사회적으로 매우 매력이 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모두 공능을 좀 갖추려고 한다. 하지만 心性(씬씽)이 나쁘면 이러한 공능을 갖출 수 없다.
어떤 공능은 속인에게도 있을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천목(天目)열기, 천이통(天耳通), 사유전감(思維傳感), 또는 예측공능 따위이다. 하지만 이러한 공능은 사람에 따라 다르고 점오(漸悟)의 상태에서 모두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공능은 속인에게는 있을 수 없다. 예를 들어 현실공간의 일종 물체를 다른 종류의 물체로 바꾸어 놓는 그런 것은 속인에게 있을 수 없다. 큰 공능은 후천적인 연마로 나온다. 法輪功(파룬궁)은 우주의 원리에 따라 발전해 온 것으로서, 우주 중에 존재하는 공능은 法輪功(파룬궁)에 모두 포함되어 있는바, 연공인이 수련을 어떻게 하는가에 달렸다. 공능을 좀 얻으려는 생각이 그리 틀린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지나치게 강렬한 추구는 일반적인 생각이 아니므로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낮은 층차에서 얻은 조그마한 공능은, 속인들 앞에서 재간을 피우고 속인 중 강자가 되는 것에나 쓰일 뿐, 별로 쓸모가 없다. 만약 그렇다면 바로 心性(씬씽)이 높지 않다는 것을 말하므로 공능을 주지 않는 것이 옳다. 공능을 만약 心性(씬씽)이 좋지 않은 사람에게 준다면 나쁜 일을 하는 데 쓸 수 있다. 心性(씬씽)이 확고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나쁜 일을 하지 않는다고 보증할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무릇 드러내놓고 시범을 보이는 공능은 모두 인류사회를 개변하는 데 쓸 수 없으며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개변할 수도 없다. 진정으로 높은 공능은 드러내놓고 시범을 보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데, 그 영향과 위험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바로 어떤 고층건물을 무너뜨리는 시범 같은 것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특별히 큰 공능으로 말한다면 특수한 사명을 지닌 사람만이 사용하는 것을 허용할 뿐, 그렇지 않은 경우 사용을 허용하지 않으며 또한 내놓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상사(上師)에게 통제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속인들은 종종 기공사에게 한사코 보여 달라고 하면서, 그를 핍박해 내놓아 보라고 한다. 공능이 있는 사람은 모두 공능을 내놓고 보여주기를 싫어한다. 그것은 내놓도록 허용되지 않은 것인데, 일단 내놓으면 사회상태 전반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진정한 대덕지인(大德之人)이라면 그의 공능을 내놓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어떤 기공사는 시범을 보일 때에 심정이 몹시 좋지 않아, 그는 돌아간 후에 한바탕 크게 울고 싶어 한다. 그에게 공능을 보여 달라고 핍박하지 말라! 그가 공능을 내놓는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한 수련생이 잡지 한 권을 가져왔는데, 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크게 반감을 느꼈다. 그 뜻은, 국제 기공회의를 여는데, 공능이 있는 자는 공능을 내보이고 시합에 참가하라, 공능이 센 사람이면 누구든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읽은 후 마음이 며칠 동안이나 괴로웠다. 이것은 내놓고 시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내놓으면 후회하게 된다. 속인이니까 그는 세상에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중시하게 마련이지만 기공사는 곧 자중(自重)해야 한다.
공능을 가지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연공인의 사상 경지와 추구를 반영하는데, 추구하는 사상이 깨끗하고 바르지 못하고, 확고하지 못하면 높은 공능을 얻을 수 없다. 여기에는 한 가지 원인이 있다. 당신이 아직 개오(開悟)하기 전이라면 당신은 사물을 봄에 좋고 나쁨을 오로지 世間法(쓰젠파)의 시비 표준에 따라 볼 수밖에 없는데, 당신이 일의 진상을 보지 못하고 그 일의 인연관계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때리고 욕하며 괴롭히는 것은 필경 인연(因緣)이 존재하기 때문인데, 당신이 이를 꿰뚫어 보지 못하면 오히려 일을 망치게 된다. 속인 사이의 은혜와 증오, 시시비비는 세간의 법이 관할하고 있기에 연공인은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 당신이 아직 개오하기 전이기 때문에 당신의 눈앞에 보이는 일의 진상은 당신이 본 것과 같지 않을 수도 있다. 누가 누구를 주먹으로 한대 때렸다면 바로 그들은 ‘업(業)’을 청산하는 것일 수 있는데, 당신이 상관한다면 그들이 ‘업’을 청산하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다. ‘업’이란 인체 주위에 있는 검고 검은 물체이며 그것은 다른 한 공간의 물질존재로서, 이것이 병이나 재앙으로 바뀔 수 있다.
공능은 사람마다 다 있지만, 문제는 끊임없는 수련을 통해 더 개발하고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공인으로서 만약 공능만 얻고자 추구한다면 안목이 낮아지고, 사상이 불순해진다. 그가 공능을 얻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그 속에는 모두 사심이 포함되어 필연적으로 연공을 방해하며, 그 결과 공능을 얻을 수 없게 된다.
(3) 공력의 파악
어떤 연공인은 연공한 시간이 길지 않은데도 다른 사람의 병을 치료하려고 하며 영험한가를 알아보려고 한다. 공력이 높지 못한 사람으로서 당신이 일단 손을 내밀어 시험을 하면 곧 환자 몸에 있는 많은 검은 기(黑氣), 병기(病氣), 더러운 기(濁氣)를 자기 몸에 끌어들이게 된다. 당신이 병기(病氣)를 방어할 능력이 없고 몸에 또 보호막이 없으므로, 환자와 한마당을 형성하는데, 공력이 높지 못하면 방비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매우 괴로운 감을 느끼게 된다. 만일 당신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면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온몸에 병이 생긴다. 때문에 공력이 높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병을 봐줄 수 없다. 공능이 나오고 일정한 공력을 구비해야만 기공으로 병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비록 공능이 나와서 병을 볼 수는 있지만 층차가 매우 낮을 때에는 사실 자신이 축적한 공력으로 병을 보며 자신의 에너지로 병을 보는 것이다. 공은 바로 에너지이며 영체(靈體)로서, 축적하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에 공을 내보내는 것은 곧 자신을 소모하는 것이다. 당신이 공을 밖으로 내보내면 머리 위에 있는 공기둥(功柱)의 높이는 곧 줄어들고 소모되는데 이는 매우 가치 없는 짓이다. 그러므로 나는 공력이 높지 못할 때 다른 사람의 병을 보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다. 당신의 수법이 아무리 높아도, 역시 자신의 에너지를 소모하는 짓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공력이 일정한 정도에 도달하면 각종 공능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공능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도 매우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천목(天目)이 열렸다면 보지 않으려 해도 안 되며 늘 사용하지 않으면 닫히기 쉽다. 보는 것도 늘 보아서는 안 되고 또 너무 많이 보면 에너지가 많이 새나간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영원히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물론 아니다. 만약 영원히 사용하지 않는다면 수련은 해서 무엇 하겠는가? 문제는 어느 때에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오로지 일정한 정도까지 수련하여 스스로 보충할 능력을 구비했을 때에만 사용할 수 있다. 法輪功(파룬궁)을 일정한 정도까지 수련하면, 공을 아무리 내보내도 法輪(파룬)이 자동적으로 연화(演化), 보충할 수 있으며 자동적으로 연공인의 공력수준을 유지하고 한시도 줄어들지 않게 한다. 이것이 法輪功(파룬궁)의 특징이다. 오로지 이때가 되어야만 비로소 공능을 사용할 수 있다.
4. 천목(天目)
(1) 천목 열기
천목의 주통로는 앞이마 한가운데와 산근(山根) 사이에 있다. 속인이 육안으로 사물을 보는 것은 바로 사진기의 원리와 마찬가지로, 거리의 원근과 광선의 강약에 따라, 유리체 또는 동공의 크기를 조절하여 신경세포를 통해 대뇌 후반부의 송과체(松果體)에 영상이 나타나게 해서다. 특이공능(特異功能)의 투시는 곧 천목을 통해 송과체가 직접 밖을 내다보게 한다. 일반인의 천목은 열려 있지 않아 주통로 부위의 틈새가 아주 좁고 아주 어두우며, 안에는 영기(靈氣)가 없고, 빛이 나지 않는다. 일부 사람은 막혔으므로 보지 못한다.
우리가 천목을 여는 데는 첫째, 외부의 힘을 통하거나 또는 스스로 수련을 통해 통로를 여는 것이다. 개개인의 통로 모양은 같지 않아 타원형, 원형, 마름모꼴, 삼각형이 있는데, 잘 연마할수록 더 둥글게 닦인다. 둘째는 사부(師父)가 당신에게 눈을 하나 주는 것으로서, 만약 혼자 수련하는 경우라면 스스로 닦아야 한다. 셋째는 천목 부위에 정화지기(精華之氣)가 있어야 한다.
보통 우리가 물건을 보는 것은 두 눈을 통해 보는데, 바로 이 두 눈이 우리가 다른 공간으로 통하는 통로를 막아버리고 그것이 병풍처럼 가로막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우리 이 물질공간의 물체만을 볼 수 있다. 천목을 연다는 것은 바로 이 두 눈을 피해 보는 것을 말한다. 아주 높은 층차에 이른 후에는 진안(眞眼)도 수련해 낼 수 있다. 곧 천목의 진안으로 보거나 또는 산근(山根) 부위의 진안으로 볼 수 있다. 불가에서는 땀구멍 하나하나가 모두 눈이며, 온몸이 모두 눈이라고 한다. 도가에서는 매 혈위(穴位)가 모두 눈이라고 한다. 그러나 주통로는 천목에 있기에, 반드시 먼저 그것이 열려야 한다. 전수반(傳授班)에서 나는 개개인 모두에게 천목을 열어주는 것을 넣어 주었다. 개개인의 신체소질이 다르므로 나타나는 효과도 같지 않다. 어떤 사람은 어두운 동굴을 보는데 마치 깊은 우물과도 같다. 이것은 바로 천목의 통로가 검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본 것은 하얀 통로인데, 만약 앞에 물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면 곧 천목이 열린 것이다. 어떤 사람은 물체가 회전하고 있는 것을 보는데, 이것이 바로 사부가 넣어 준 천목을 여는 그것으로서, 천목을 꿰뚫은 후에야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천목으로 하나의 큰 눈을 볼 수 있는데 부처의 눈이라고 여기지만, 실제적으로는 그 자신의 눈으로서, 이것은 흔히 선천적 근기(根基)가 비교적 좋은 사람이다.
우리들의 통계로는 매 차례 전수반에서 천목이 열리는 사람은 절반 이상이다. 천목이 열린 후, 이와 관련된 한 가지 문제는 心性(씬씽)이 높지 못한 사람은 그것으로 나쁜 일을 하기 쉽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나는 당신의 천목을 직접 혜안통(慧眼通) 층차에 열어준다. 다시 말하면 고층차로 열어주어 당신으로 하여금 다른 공간의 광경을 직접 보게 하며 연공 중에 나타나는 물체를 보게 하여 당신이 그것을 믿게 함으로써 당신의 연공 신심을 북돋워 준다. 금방 연공을 시작한 사람은 心性(씬씽)이 아직 속인을 초월하는 높이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일단 속인을 초월하는 것을 구비하게 되면 좋지 못한 일을 하기 쉽다. 예를 들어 우스갯소리를 하나 하자. 당신이 거리를 가다가 복권을 파는 것을 보면, 아마 그 일등상은 틀림없이 당신이 모두 뽑아갈 것이다. 바로 이런 뜻을 말하는데, 이렇게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의 원인은, 우리 여기에서는 천목을 대대적으로 열어주는데, 만약 모두 낮은 층차로 열어준다면 여러분 생각해 보라. 만약 사람마다 모두 인체를 투시할 수 있고 모두 벽을 사이에 두고 물건을 볼 수 있다면, 내가 말하겠는데, 그것이 인류사회이겠는가? 속인사회의 상태를 심하게 교란하기 때문에 허용하지 않으며 역시 그렇게 할 수 없다. 게다가 이는 연공인에게도 좋은 점이 없으며 연공인의 집착심을 키워 줄 뿐이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낮은 층차로 열어주지 않고 직접 고층차로 열어준다.
(2) 천목의 층차(層次)
천목은 여러 가지 층차가 있다. 그 층차가 같지 않음에 따라 보는 공간도 같지 않다. 불교에서는 ‘5통’이 있다고 하는데, 육안통(肉眼通), 천안통(天眼通), 혜안통(慧眼通), 법안통(法眼通), 불안통(佛眼通)이다. 매 한 층차를 또 상, 중, 하로 나눈다. 천안통 이하 층차에서는 우리가 있는 이 물질세계만을 볼 수 있다. 혜안통 이상 층차에서야 비로소 다른 공간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투시공능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는 것이 매우 정확하여 ‘CT’스캐닝보다 더 또렷하다. 그러나 그가 본 것은 여전히 우리의 이 물질세계로서, 아직 우리들이 존재하는 공간을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아직 고층차 천목이라고 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천목 층차가 얼마나 높은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정화지기(精華之氣)의 많고 적음과 주통로의 넓고 좁음, 밝은 정도, 그리고 통로가 막힌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천목이 얼마나 환하게 열리는가는 내부의 정화지기가 관건적인 요소다. 여섯 살 이하 어린이는 천목을 열기가 아주 쉬운데, 손을 댈 필요도 없이, 내가 말만 해도 그는 곧 열린다. 어린이들은 선천적으로 물질세계의 불량한 영향을 아주 적게 받았고, 자신도 무슨 나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선천적인 정화지기가 잘 보존된 까닭이다. 여섯 살 이상 어린이는 천목을 열기가 점점 어려워지는데, 그것은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외계에서 받는 영향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특히 불량한 후천적 교육과 방종(放縱)으로 나쁘게 변하면, 그의 정화지기가 다 흩어져버리는데 일정한 정도에 이르면 틀림없이 모두 흩어져버린다. 정화지기가 모두 흩어져버린 사람은 후천적으로 연공을 통해 점차 보충할 수 있으나, 상당히 긴 시간을 거쳐야 하고 고생을 많이 해야 한다. 그래서 정화지기는 극히 진귀한 것이라고 한다.
나는 사람의 천목을 천안통 층차로 열어주는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연공인의 공력이 크지 않을 때에는 연공으로 축적한 에너지가 투시할 때 쓰는 에너지보다 많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기(靈氣)를 많이 잃으면 천목은 도로 닫힐 수 있는데 일단 닫힌 후에 다시 열자면 쉽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들에게 천목을 열어줄 때 보통 혜안통 층차로 열어준다. 보이는 것이 또렷하든 그렇지 못하든 수련자로 하여금 다른 공간의 물체를 볼 수 있게 한다. 선천적 조건의 영향을 받아 어떤 사람은 아주 또렷하게 보고, 어떤 사람은 본 물체가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고, 어떤 사람은 또렷하게는 보이지 않지만, 최소한 빛을 볼 수는 있게 한다. 이는 연공자가 고층차로 발전하는 데에 좋은 점이 있다. 또렷이 보이지 않는 것은 연공을 통해 후천적으로 보충하면 된다.
정화지기가 부족한 사람이 천목으로 본 광경은 흑백이고, 정화지기가 비교적 많은 사람이 천목으로 본 광경은 천연색이며 더욱 또렷하다. 정화지기가 많을수록 선명도가 더욱 좋다. 그러나 사람마다 모두 같지는 않다. 어떤 사람은 천목이 태어나서부터 열려있고, 어떤 사람은 꽉 막혀 있다. 천목이 열릴 때의 광경은 마치 꽃봉오리가 피어나는 것처럼 한겹 한겹 열린다. 가부좌하고 있을 때 시작에는 천목에 빛이 있음을 발견하는데, 처음에는 빛이 그다지 밝지 않다가 나중에 붉게 변한다. 어떤 사람의 천목은 아주 굳게 봉쇄되어 있어, 열릴 때에는 반응이 아주 격렬할 수 있다. 주통로와 산근부위의 근육이 조여들면서 마치 그곳의 근육이 한데 엉켜 안으로 뚫고 들어가는 감을 느끼며, 관자놀이와 앞이마가 부어오르고 아픈 감이 있는데, 이것은 모두 천목이 열릴 때의 반응이다. 천목이 쉽게 열리는 사람은 우연하게 어떤 것을 볼 수 있다. 전수반에서 어떤 사람은 무의식중에 나의 법신(法身)을 보았는데, 그가 의식적으로 보려할 때는 또 없어졌다. 사실은 눈으로 본 것이다. 눈을 감았을 때 본 그런 상태를 시종 유지하면 점점 또렷하게 볼 수 있다. 만일 자세히 보려하면 실제로는 눈이 움직이고 시신경(視神經)이 작동하게 되므로 곧 보지 못하게 된다.
천목의 층차가 같지 않기에 보는 공간도 같지 않다. 어떤 과학연구 부서에서는 이런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어떤 기공실험(氣功試驗)이 예정한 효과에 도달하지 못하고 심지어 상반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예를 들어 어떤 부서에서 특이공능의 측정방법을 만들었는데, 기공사에게 밀봉한 함 속에 무엇이 있는가를 맞혀보게 했다. 기공사의 천목 층차가 같지 않음에 따라 대답한 결과도 각각 달랐다. 그런 까닭에 측정자는 천목은 가짜로서 사람을 속이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와 같은 측정방법이라면 오히려 천목 층차가 낮은 사람이 투시하는 것이 효과가 좋다. 왜냐하면 그의 천목은 천안통의 층차까지만 열려있기 때문에 물질공간의 사물을 관찰하는 데에만 적합하다. 그러므로 천목을 모르는 사람은 그의 공능이 제일 높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물체든, 그것이 유기물이든 무기물이든, 다른 공간에서는 다른 모양으로 나타난다. 컵 한 개를 예로 든다면 그것을 만들어 낼 때, 그것의 영체가 동시에 다른 한 공간에 존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 영체가 존재하기 전에는 또 다른 물건일 수도 있다. 천목 층차가 제일 낮으면 보이는 것은 컵이고, 한층 높아지면 보이는 것은 다른 공간의 그 영체이며, 또 좀 더 높으면 보이는 것은 그 영체 이전의 물질형식이다.
3) 요시(遙視)
천목이 열린 후에 어떤 사람은 요시가 나타나는데 천리 밖의 물체를 볼 수 있다. 사람마다 모두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 있으며, 이 공간 안에서 그는 마치 우주의 크기와 같다. 그의 특정한 공간 안에 그에게는 이마 앞에 거울 하나가 있는데, 우리의 이 공간에서는 볼 수 없다. 이 거울은 사람마다 모두 있으며, 다만 연공하지 않는 사람의 이 거울은 엎어져 있고, 연공하는 사람의 이 거울은 점차 뒤집힌다. 뒤집힌 다음에는 곧 그가 보려는 물체를 비추어 볼 수 있다. 그의 특정한 공간에서 그는 무척 크며, 몸집이 아주 크기 때문에 이 거울 역시 대단히 커서 무엇을 보려고 하면 거울은 곧 비춰 줄 수 있다. 그러나 비춰 주어도 그는 아직 볼 수 없다. 영상이 거울에 한순간 머물러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거울은 뒤집힐 줄 아는데, 비춘 물체를 당신에게 한 번 보이고는 또 뒤집어지고 재빨리 또 뒤집어지면서 쉴 새 없이 뒤집힌다. 영화필름은 매초에 24프레임이어야만 연속동작을 볼 수 있다. 거울이 뒤집혀 돌아가는 속도는 이보다도 더 빠르므로, 연속적이고 아주 또렷하게 보인다. 이것이 바로 요시(遙視)이다. 요시의 이치는 이처럼 간단하다. 이것은 모두 비밀 중의 비밀인데, 나는 몇 마디 말로 그것을 설명했다.
(4) 공간
공간은 우리가 볼 때 아주 복잡하다. 현재 우리 인류는 인류가 존재하는 공간만을 알 뿐, 다른 공간은 아직 탐측해 낼 방법이 없다. 다른 공간에 대해 우리 기공사들은 벌써 몇십 가지 층차의 공간을 보아냈으며, 이론상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과학적으로는 아직까지 실증할 방법이 없다. 어떤 것은 당신이 비록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더라도 그는 확실하고도 확실하게 우리 공간에 반영되어 왔다. 예를 들면, 세계에는 버뮤다 제도라는 곳이 있는데, 사람들은 마의 삼각지대라고 부른다. 어떤 배는 그곳에 가기만 하면 사라지고, 어떤 비행기는 그곳에 이르러 사라졌다가 여러 해가 지난 후에 다시 나타나기도 했다. 누구도 이 원인을 해석할 수 없었는데, 누구도 현재 인류의 사유 이론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사실 그것은 다른 공간으로 통하는 통로이다. 그것은 우리 이 문과 같은 그런 문이 아니고 음양이 어긋나 있는 상태로서, 만일 배가 이 음양이 어긋나 잘못 열려있는 문을 만나면 쉽게 빠져 들어간다. 사람이 이 공간 차이를 느끼지도 못하는 순간에 곧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과 우리의 시공(時空)은 차이를 이정(里程)으로 표시할 수 없다. 10만 8천리라는 그 먼 거리도 여기에서는 한 점에 불과하며, 바로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 존재한다. 배가 들어가서 흔들리는 그 잠깐 동안에 음양이 어긋남이 또 생기는데 세상에서는 이미 몇십 년이 지나갔다. 왜냐하면 두 공간의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매 공간에는 또 단원세계(單元世界)가 있다. 마치 우리가 그리는 원자 구조도처럼 하나의 공(球)의 그 중간이 한 가닥 선으로 연결되었고, 이리저리 서로 뒤엉킨 것이 모두 공이며 모두 연결선으로 되어 있어 매우복잡하다.
EmoticonEmotic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