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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교란 무엇인가? 6 (달라이라마) - 소승, 대승, 금강승 : 중요한 설법
밀교란 무엇인가? 6 (달라이라마) - 세 가지 깨달음의 길
1. 소승과 대승
(1) 이욕행(離欲行)을 닦는 성문
소승 수행자는 이름하여 '성문(聲聞)'이라 한다. 소승에서는 색. 성. 향. 미. 촉으로 인해 일어나는 오욕이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적당하지 않은 것이라 하여, 계율 위주의 수행 방편을 주로 사용하였다. 성천(聖天, Aryadeva) 보살은 말씀하셨다.
"이욕행(離欲行)을 위주로 하여 수행하는 사람은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원력이 작다."
대체로 마음이 소승의 도와 상응하는 사람은 '일체 유정을 이익되게 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는' 큰 원력이 부족하다. 자연 그들은 욕망의 강대한 세력을 수행으로 이용할 수 없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소승의 이욕행인 청정법행(淸淨梵行)을 가르치셨다.
곧 수행자가 자신의 욕망을 도(道)로 이용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욕망에 이용당할 우려가 있다.
억지로 욕망을 이용하여 도로 삼으라고 한다면, 오히려 저들에게는 해가 될 뿐 전혀 이익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로 하여금 오로지 욕망을 여읜 청정법행을 닦도록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청정한 계를 지키는 것은 도를 성취하는 유일한 수행방편으로 삼는 것이 소승의 수행법이다.
이와 반대로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큰 원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부처님께서는 대승의 육바라밀과 십자(十地) 등의 수행을 가르치셨고, 이러한 방편을 두루 섭수하여 바라밀다인승(波羅蜜多因乘)이라 하셨다.
나아가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큰 원을 품고 구경의 깊고 깊은 뜻에 깊이 심취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부처님께서는 욕망을 도로 승화시키는 수행을 보여 주셨으니, 그것이 곧 밀교의 금강승 수행이다.
인도의 논사인 삼장만(三藏曼: Tripitakamala)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교리를 세 가지로 판단하였다.
① 소승의 고(苦). 집(集). 멸(滅). 도(道)를 설한 사제행(四諦行).
② 대승의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닦는 육바라밀다행(六波羅蜜多行).
③ 대승밀교의 비밀진언행(秘密眞言行).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설한 모든 법을 크게 소승경전과 대승경전으로 나누었고,
수행법 또한 소승과 대승의 두 가지 길을 열어 놓으셨다.
(2) 성문과 연각의 차이와 공통점
소승에는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이 있으며, 연각승은 다시 화합연각(化合緣覺)과 인유독각(麟喩獨覺)으로 나누어진다. 화합연각은 비교적 사람들과 화합하기를 좋아하는 성품을 지니고 있어, 중생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지낸다. 그러나 인유독각은 대중을 떠나서 홀로 있기를 좋아한다.
성문과 연각은 모두 '제법(諸法)에 자성(自性)이 있다'는 견해가 없어졌으나, 연각의 쌓은 공덕이 성문보다 많기 때문에, 연각은 과위를 증득할 때 스승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고도 자신의 힘만을 의지하여 번뇌의 도적을 다 없앤 아라한과를 성취할 수가 있다.
모든 번뇌의 괴수는 '자성이 있다는 견해(自性有見)'이다.
연각승들은 백 겁 동안 쌓아놓은 공덕에 의지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번뇌의 괴수인 자성유견을 항복받고 연각의 과위를 증득하는 것이다.
연각승들은 자부심과 자존심이 대단히 강하다. 그들 대부분은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는 세상에 태어나 과위를 증득하는데, 이것은 아미도 부처님과 비교되면 자신의 부족함이 드러날까 두려워 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방법으로 중생들을 이익케 하기 위함일 수도 있다. 용수보살께서는 중론(中論)에서 말씀하셨다.
"만약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지 않는다면 성문승들은 이미 다 멸하여 없어졌을 것이요, 부처님께 의지함 없는 벽지불들만 자생하게 되리라(若佛不出世 聲聞已滅盡 諸隻支拂地 無依而自生)."
이러한 성문과 연각의 수행자는 '일체법에 자성이 없다'는 지혜를 통달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윤회의 결박(結縛)에서 해탈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자성이 있다'고 집착하는 그릇된 지견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며, 탐진치(貪瞋癡)의 번뇌 또한 '자성이 있다'는 지견에 의지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를 밀교에 의거해서 설명하면, 무명(無明)과 생명의 힘(命力)이 윤회에서 해탈하지 못하게 하는 근본 원인이 되는데, 이 두 가지 중 더 중요한 원인은 자성이 있다고 집착하는 지견인 무명이다. 그리고 번뇌의 마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여러 가지 기운이 윤회행상(輪廻行相)을 도와 주는 인연이 된다.
이와 같은 까닭으로 성문과 연각은 인무아(人舞我)와 법무아(法無我)의 지혜를 통달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아(我)가 없음'을 통달하는 지혜가 부족하면 윤회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문과 연각은 무아의 지혜를 가장 중요시 여기고, 계율과 선정 등의 방편을 의지하여 지혜를 닦아 모든 번뇌를 다 없애는 것이다. 이제 인무아와 법무아에 대해 조금 더 상세히 살펴보자.
(3) 인무아와 법무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에 의지하여 분류하면 다음의 네 부파로 나눌 수 있다.
①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Vaibhashika).
② 경량부(輕量部, Sautrantika).
③ 유식부(唯識部, Chittamatra).
④ 중관부(中觀部, Madhyamika).
이 네 부파 가운데에 가장 높은 것은 중관부이다. 중관부는 다시 자속(自續)과 응성(應成) 중관부로 나뉘어지며, 그 중에 응성 중관부의 견해가 더 놓은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 파의 대표적인 전승조사로는 용수보살. 성천(聖天, Aryadeva). 불호(佛護, Buddhapalida). 월칭(月稱, Chandrdkirti). 적천(寂天, Shantideva) 및 아디샤 등을 꼽고 있다.
응성(應成) 중관부에서는 자신의 이익과 윤회에서 해탈하기를 바라는 소승의 수행자와, 허공계가 다하도록 일체 유정들을 이롭게 하겠다는 큰 원력을 가진 대승 수행자 모두가 인법이공(人法二空)의 묘의(妙意)를 통달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이 부파의 수행자는 사람(人)과 법(法), 곧 몸과 마음에 본래 '아'가 있는 것이 아님을 다 통달하게 된다.
그러나 중관파 이외의 부파에서는 소승수행자인 성문이나 연각이 오직 '인무아(人舞我)'만을 통달한다고 주장한다. 이 때의 '나'는 몸과 마음을 이루고 있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온(五蘊)을 가리키며 그들은 이 오온으로 구성된 '나'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여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응성중관파에서는 오직 '인무아'만 통달해서는 윤회에서 해탈하기에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다른 파에서 인정하는 '아견(我見)'이 선천적인 구생아집(俱生我執)이 아니라 후천적인 분별아집(分別我執)이므로, 선천적인 구생아집까지 버려야 생사윤회에서 해탈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종카파 대사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응성중관파 이외의 다른 부파에서는 성문 및 연각승 등이 '인무아'만을 통달함으로써 해탈을 얻는다고 인정하고 있다."
"나아가 그 부파들은 성문과 연각승이 증득한, 인무아의 '인(人)'이 자성이 없는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人)'이 오직 외도들이 수론(數論)이나 승론(勝論)에서 말한 '실존실유(實存實有)'가 아니라는것으로 알뿐이다. 만약 설일체유부와 경량부 등의 교의에 의거하면 수행자는 오직 '인(人)'이 영원한 것(常)이 아니고 일정한 것(一)이 아니며 주재자(主宰者)가 아님을 아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하지만 중관지속파. 유식. 경량부 및 설일체유부 등의 종파들이 '인(人)이 영원한 것(常)도 일정한 것(一)도 주재자(主宰者)도 아니다"라는 것을 안다고 하여 선천적인 구생아집(俱生我執)을 파한 것이라고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 종파들의 '인(人)이 상(常)이요 일(一)이요 주재자(主宰者)가 아니다'라는 견해는 후천적으로 익혀서 생겨난 것이지,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생사윤회에서 해탈할 수 없게 만드는 선천적인 '구생아집(俱生我執)'은 후천적인 사유와 분별을 통해 생겨난 아견(我見)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속중관파 등의 종파에 의하면, 이러한 '아'가 있다고 집착하는 그릇된 견해는 '사람(人)이 스스로 생겨난 존재요 실제로 존재하는 본체(本體)'라고 잘못 인식하는 데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들 응성중관파 이외의 종파들은 "수행자가 인(人)이 상(常)도 일(一)도 주재자(主宰者)도 아니다"고 하는 견해를 닦는다 하더라도 '실제로 존재한다(實有)'거나 '스스로 생겨난 것(自成)'에 집착하는 지견은 줄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파에서는 성문이나 연각 등이 알고 있는 '무아'는 오직, 인(人)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라고 가르치며, 성문과 연각은 이러한 지견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는 것이다.
종카파 대사는 "저 종파들이 다 인무아를 인(人)도 상(常)도 일(一)도 주재(主宰)도 아니라고 해석한다"고 하셨는데, 모든 논사들 또한 종카파가 응성중관파의 견지에서 다른 종파들이 가지고 있는 숨은 뜻을 관찰해 낸 것을 인정하고 있다. 곧 응성파는 다른 종파들이 '무아'의 도리를 세울 때에 실제로 '인유자성(人有自性: 사람에게는 자성이 있다)'을 인정하는 것을 보고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종파의 '무아(無我)'의 설은 오직 몸이나 마음과는 다른 또 하나의 '인(人)'이 있다는 것을 파할 수 있을 뿐이다.
응성파에 의하면 수행자가 '인비자성유(人非自性有: 사람은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의 견해를 통달치 못하면 '사람에게 아(我)가 항상 존재한다(人有我)는 분별 망상을 끊을 수가 없다고 보고 있다. 만약 '몸과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오온(五蘊)이 자성이 있다'는 분별을 없애지 못한다면, '사람에게 아(我)가 항상 존재한다'는 인자성유(人自性有)의 분별을 없앨 수가 없는 것이다.
윤회는 업으로 감응하여 생겨난 것이고, 업은 번뇌의 힘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업을 끊으려면 분별망상을 끊어야 하는데,
분별망상을 끊으려면 '자성이 항상 존재한다.'는 분별망상의 조작에 의해 생겨난 '희론'을 없애야 한다.
그럼 '희론'은 어떻게 끊는가?
오직 '공성(空性)'을 깨달은 지혜로서만 끊을 수 있다.
반야경전의 진리에 의하면,
윤회에서 해탈하려면 반드시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를 통달하여야 한다.
반야의 대승 경전에서만 이렇게 말한 것은 아니다.
소승 경전에서도 이와 같이 설하고 있는데, 오직 '설일체유부'와 '경량부'의 설이 다소 차이가 있을 뿐이다.
(4) 대기설법과 승(乘)
비록 대승과 소승 경전에서 각각 다른 수행의 길을 설해 놓았지만, 이러한 방편법문에 대해 반드시 그 다른 점을 판단하고, 어떤 법이 더 깊이 인도할 수 있는 길이며 어떤 법이 요의교(了義敎)인가를 구별하고 결정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들은 항상 '자성이 있다'는 그릇된 지견으로 인해 윤회에서 해탈치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제법(諸法)의 무상(無常)함을 알게 되면, 이러한 인식이 '자성이 있다'는 견해를 없애는데에 도움을 준다. 그리고 해탈의 길을 받아들여 수행하는 이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잘 닦을 수가 있다.
소승 수행자 중에는 근기가 둔한 사람과 예리한 사람 두 종류가 있다.
근기가 예리한 이근(利根) 수행자는 소승에 맞는 정기(正機)이기는 하지만 그 숫자는 많지 않다.
불모(佛母)인 반야바라밀다는 성문. 연각. 보살의 부처의 공통된 인(因)이다.
그러므로 소승과 대승의 차별은 지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의 방편을 두고 나눈 것이다.
특히 발보리심과 육바라밀 등의 방편은 오직 대승에서만 볼 수 있고, 소승에는 없는 것이다.
'승(乘, Yana)'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실어나르는 수단이요, 둘째는 운송해야 할 대상이다.
실어 나르는 수단에서 볼 때, 대승은 보리심으로써 주요한 인(因)을 삼는다.
그리고 육바라밀로써 수행의 방편을 삼는다.
이러한 수행 방편은 대승의 공통된 길이다.
비록 대승 가운데 중관(中觀)과 유식(唯識) 두 종파의 지견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그렇다고 두 파가승(乘)이 다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승의 구별은 방편에 의한 것인데, 중관과 유식의 수행 방편에는 다른 구별이 없기 때문이다. 둘 다 타인을 이롭게 하기 위한 보리심을 발하고, 이러한 마음에 수순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중관(中觀)에서 보여주는 '미세한 법무아'의 도리에 깊이 상응하여 계합하는 사람은 대승의 바른 근기의 수행자라고 한다. 또 대승 속에 금강승(金剛乘), 곧 밀교는 네 부파로 나누어지지만, 이들 또한 이타의 원을 발하는 것을 인으로 삼고, 육바라밀로써 수행법을 삼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교리와 필요로 하는 바가 다른 것을 살펴 여러 가지 가르침과 서로 다른 승(乘)의 길을 설해 놓으셨다. 이와 같이 다른 교리와 승이 다양하게 출현하게 된 것은 부처님께서 가깝고 먼 파벌을 조성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법을 들을 수 있는 근기와 성향과 능력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수행자에게 계합되는 다른 수행법을 전수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설법을 하실 때 아직 전혀 성불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네가 부처의 과위를 성취할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다만 이러한 수행자들이 받아들여 그가 실천할 수 있는 수행법만을 설해 주셨다.
그야말로 부처님께서는 대기설법(對機說法)을 하셨는데, 비록 그 설법에서 분명하게 '부처의 과위를 증득할 수 있는 방편'이라고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최고의 깨달음은 부처의 지위에 오르게 하는 방편들이었다.
부처님께서 세간에 법을 펴신 본래 뜻은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다 부처의 지혜를 성취케 하고자 함이셨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혜를 성취할 수 있는 방편은 다 일승(一乘)에 속하는 것이지 이승(二乘)이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절대로 성불할 수 없는 승으로써 유정중생들을 인도하지 않으셨다. 일체중생들로 하여금 다 부처의 지위에 안주하도록 하기 위해 임시 방편으로 여러 가지 다른 승을 보여주신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륵보살께서는, '대승을 수지할 수 있는 근기를 가진 사람은 비록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이것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장애가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오직 자신만의 이익을 구하는 소승의 길로 물러날 때는 불과에 이르는 데 막대한 장애가 일어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미륵보살이 말한 바와 같이 수행자가 만약 소승의 마음을 일으키면 그 장애의 정도가 지옥에 떨어지는 것보다 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소승의 길 역시 부처의 지위를 성취할 수 있는 방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대승을 수행할 수 있는 근기를 가진 자가 대승을 버리고 소승을 닦는다면 반드시 성불하는 데 장애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소승을 닦기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부처의 지위를 성취하는데 장애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성불의 길을 수행할 수 있는 자가 대승의 방편을 포기하였을 때만 해당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반드시 각각의 상황에 따라 판단해야 정확하다고 하겠다."
소승은 대승의 일부분이 아니다.
성불의 길에 이르는 가행(加行) 단계일뿐, 정행(正行)인 대승의 길은 아니다.
대승이라야만 비로소 원만히 성불할 수 있는 길을 구족한다.
대승과 소승 사이에는 원만함과 원만치 않음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고하(高下)의 차이가 생겨나는 것이다.
결코 소승은 구경의 요의승(了義乘)이 아니다.
요의승은 '사람이 다 불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원만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중생들이 다 그대로 불성을 구족하고 있다'는 가르침은 불과를 증득할 수 있는 진실한 인(因)인 것이다.
(5) 부처님의 전승
부처님의 전승(傳乘) 또한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자성전승(自性傳乘)이요, 둘째는 변상전승(變相傳乘)이다.
부처님의 자성전승은 곧 마음의 공성이다.
그리고 변상전승을 진언승에 의거하여 말하면, 업장에 가려진 정광심(淨光心)이다.
이 정광심은 불과를 성취할 수 있는 인(因)이 된다.
구역(舊譯)인 닝마파에 따르면, "원만한 부처의 과위를 중생이 본래 구족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 미세한 정광심을 그대로 구족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 마음은 부처의 마음과 사실상 전혀 다름이 없으며, 이 근본 마음의 흐름이 모두를 부처의 지혜신(智慧身)으로 바뀌는 것이다. 실로 우리는 본래 그대로 부처의 본질을 이미 구족하고 있다. 따라서 내 마음 밖에서 부처를 구하여서는 안 된다.
이것이 닝마파의 전승에 대한 모든 가르침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의미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불성이 공하여 자성이 없다'고 인식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뜻이 없다. 그릇이 빈 것도 공한 것인데, 그렇다면 그것 역시 불성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위에서 말한 닝마파의 가르침에서 구경의 선법(善法)은 곧 정광심(淨光心)이요, 그것이 불성이라는 것을 유력하게 보여주고 있다.
어떤이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성불의 인이 중생들에게 온전히 구족되어 있고, 부처님 또한 어떻게 사람들을 인도하여야 성불하게 할 것인가를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 가르침을 숨겨 널리 알리지 않았다면, 그것은 부처님께서 인색한 허물을 가지고 계시는 것이요 부처님의 마음이 평등하지 못함이며, 그 자비심 또한 광대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모두 일체종지를 증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무량한 자비로써 여러 가지 다른 방편 법문들을 보여 주신 것이다.
적천(寂天)보살은 『입보살론(入菩薩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래는 진실만을 말씀하시는 분이니 이와 같은 진실한 말씀을 설하셨도다
모든 모기. 뱀. 벌과 구더기같은 벌레도 정진력을 발하게 되면 다 위 없는 깨달음을 증득하나니라
하물며 능히 이익과 해로움을 구별할 수 있는 사람으로 태어났거늘 수행하기를 그만두지만 않는다면 어찌 깨달음을 증득하지 못하리요
如來實語者 說此眞實言
所有蚊熢蜂 如是諸蟲嚴
若發精進力 咸證無上覺
況我生爲人 能辦利與害
若不廢行持 何故不證覺
출처 : 달라이라마라의 밀교란 무엇인가 / 달라이라마 저, 석설오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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