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性)을 통한 명상
글은 인도 명상가 오쇼 라즈니쉬가 고대 인도 명상서(약 5천년 전)인
<Vigyana Bhairava Tantra>에 대해 강의한 내용 중
<성(性)을 통한 명상>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탄트라 비전Ⅱ」
(오쇼 라즈니쉬 지음/이연화 옮김/태일출판사, 1993) p.260~268
성적인 결합이 시작될 때에
처음의 단계인
<불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라.
이 불의 상태가 계속되도록
하고 마지막의 <타다가 꺼진 불(射精)>이
되는 것을 피하라.
섹스는 깊은 충족감을 줄 수 있다.
섹스는 부분으로 남아 있는 그대를 전체 속으로, 본질 속으로 되돌아가게 할 수 있다.
이것을 이해하라.
우선 첫째로, 섹스는 전체적인 행위이다.
그대 내면의 균형은 이미 부서진지 오래다.
그대가 섹스를 두려워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대는 마음(생각)을 인정했다.
그러나 섹스는 마음의 차원을 넘어선 행동이다.
섹스 속에서 그대의 두뇌는 사라져 버린다.
행동 속에서 그대의 두뇌는 사라져 버린다.
거기 어떠한 이유도 없다. 어떠한 사념도 없다.
만일 사념이 존재하게 되면 그것은 이미 진정한 의미에서의 섹스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진실이 아니다. 거기에 더 이상 충족감은 없다. 오르가슴은 더 이상 거기에 없다.
이때 섹스는, 섹스의 행위는 그 자체가 이미 두뇌적인 것이 되고 만다. 논리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이 세상 전체가 갈수록 흥청거리고 섹스에 대한 갈망이 커지는 것은
사람들의 성욕이 점점 더 강해지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대부터가 섹스를 전체적인 행동으로 즐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과거의 세상은 지금보다 더 섹스 에너지가 강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성에 대해서
지금의 우리처럼 병적으로 집착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우리의 성에 대한 이 갈망은 진실을 잃어버리고
거짓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대는 점점 더 성을 갈망하고 있다.
이것은 전체로서의 성행위 그 자체가 이제 더 이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섹스조차 사념의 차원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그것이 바로 섹스의 타락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섹스를 즐길 수 있다.
섹스에 대한 책과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성적 욕구를 충족시킨다.
그러나 실제로 성행위를 해야 할 때면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거기에서 특별한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섹스에 대해 무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섹스에 대해 생각할 때 그들은 강한 에너지 파장을 느낀다.
그러나 실질적인 행위에 임하게 되면 그
들은 거기에 강한 에너지 파장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느낀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제 성행위조차 그들에게는 생각의 차원으로 타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섹스에 대해서 그저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결코 완전한 성행위를 할 수 없다.
완전한 성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존재 전체가 거기에 참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존재 전체가 참가할 경우 머리는 몹시 불안해진다.
머리는 더 이상 거기에서 지도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제 맘대로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탄트라는 그대를 전체로 되돌아가게 하기 위해 섹스를 사용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행위 자체가 하나의 명상이 되어야 한다.
섹스에 대해서 지금까지 듣고 배워 온 모든 것을,
섹스에 대해 사회가 그대에게 가르쳐 준 모든 지식을 그대는 잊어버려야 한다.
그대의 지위를, 종교를,
그리고 그대의 스승들을 모두 깨끗이 잊어야 한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전적으로 그 속에 뛰어들어야 한다.
자신을 통제하지 마라. 그것은 장애물이다.
섹스 속으로 뛰어들라. 미친듯이 성의 에너지로 들어가라.
무심(no-mind)의 경지는 마치 미친 것처럼 보인다.
그대는 몸이 되어야 한다. 짐승이 되어야 한다.
울부짖는 짐승이 되어라. 짐승이야말로 전체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현대인들에게는 오직 섹스만이 전체로 되돌아가게 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섹스는 그대 속에 있는 가장 깊은 생물학적 중심이다.
그대는 섹스로부터 태어났다.
그러므로 그대의 세포 하나하나는 모두 성 세포이다.
그대의 전신은 섹스 에너지의 파장이다.
이 방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섹스 행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우리에게는 성행위가 일종의 배설이다.
그러므로 성행위 속으로 들어갈 때 그대는 급히 서두르게 된다.
그대는 단지 배설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넘치던 에너지는 배설되어 버릴 것이다.
그런 다음 편안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배설 뒤의 편안함은 일종의 탈진에서 오는 편안함이다.
이 탈진을 그대는 휴식이라고 생각할 지 모른다.
거기에 흥분은, 넘치는 에너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휴식은 부정적인 휴식이다.
에너지를 방출함으로써만 휴식을 느낄 수 있다면 이 얼마나 값비싼 대가인가?
이 휴식은 오직 신체적인 휴식일 뿐이다.
이 휴식은 결코 깊은 휴식이 될 수 없다. 영적(靈的)인 것이 될 수 없다.
서두르지 마라. 끝을 보려고 하지 마라.
처음 상태 그대로 남아 있어라. 섹스의 행위에는 두 부분이 있다.
처음 상태, 즉 애무를 시작하는 상태와 끝의 상태, 즉 사정이 그것이다.
처음 상태에 머물러 있어라.
그때가 보다 따뜻하고 휴식적이다. 서둘러서는 안된다.
끝을 보려고 서두르지 마라. 차라리 끝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려라.
“성적인 결합이 시작될 때에
최초의 단계인 불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라.”
에너지가 넘칠 때 그 에너지를 방출하려 하지 마라. 넘치는 상태 그대로 남아 있어라.
사정을 하려 하지 마라.
사정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려라. 처음의 상태에서,
그 뜨거운 불의 상태에서 전체와 하나가 되라.
뜨거움 그 자체가 되라.
그 남자와 또는 그 여자와 하나가 되라. 하나의 원을 만들어라.
여기 세 개의 가능성이 있다.
두 남녀가 만났을 때 세 개의 기하학적인 도형이 만들어진다.
첫째 사각형, 둘째 삼각형,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형이 그것이다.
이 도형들은 가장 오래된 탄트라의 도형이다. 탄트라 성행위의 도형들이다.
두 사람이 성행위를 할 때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두 사람이 아니라 네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사각형의 만남이다.
이 사각형의 만남에서 그대는 생각하는 부분과 느끼는 부분의 둘로 나뉘어진다.
그대의 연인 역시 이 두 부분으로 나뉜다.
그래서 네 개의 만남이 되는 것이다. 이 만남은 너무나 복잡하다.
결코 깊은 만남이 될 수 없다. 본질적인 만남이 될 수 없다. 여기 네 개의 구석이 있다.
이 만남은 진실한 만남이 아니다.
만남인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만남이 아니다.
여기엔 영적인 교제가 없다.
그대의 깊은 부분은 닫혀져 있다. 상대방의 깊은 부분 역시 은폐되어 있다.
오직 두뇌끼리만 만난다.
두 개의 생각하는 부분만 만나고 있고, 느낌의 만남은 아직 은폐되어 있다.
만남의 두 번째 유형은 삼각형의 만남이다.
그대와 그대의 연인은 둘이다.
그러다가 이 밑변의 두 각이 어느 순간에 하나가 된다.
어느 순간에 그대 둘은 사라진다.
거기 하나만이 남게 된다.
이 삼각형의 만남은 사각형보다 훨씬 차원이 높다.
단 한순간이라도 그 둘은 하나로 합쳐지기 때문이다.
이 하나의 느낌이 그대에게 생명력을 준다. 에너지를 준다.
이 만남을 통해서 그대는 다시 소생하고 젊어진다.
그러나 원형의 만남이 가장 차원 높은 만남이다.
이 만남이야말로 탄트라의 만남이다.
이 만남 속에서 그대는 하나의 원을 이룬다.
여기에는 각이 없다. 그러므로 만남은 순간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차원이 아니며 일상적인 만남이 아니다.
사정을 하지 않을 때만이 이 만남은 가능하다.
사정을 한다면 이는 삼각형의 만남이 될 것이다.
사정하는 그 순간에 하나됨의 차원이 무너지며 다시 분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처음의 상태로 남아 있어라. 파국으로 이동해 가지 마라.
그러면 어떻게 처음의 상태로 계속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우선 섹스를 생각하는 그대의 개념부터 변화되어야 한다.
성행위를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마라.
그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다.
둘째, 미래를 생각하지 마라. 다음 순간을 생각하지 마라.
언제나 <지금 여기>에 머물러야 한다.
성행위의 처음 단계에서 <지금 여기>에 머물 수 없다면
그대는 결코 현재에 머물지 못한다.
오직 본질적인 행동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지금 여기,
즉 현재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 남아 있어라. 두 몸의 만남을 즐겨라.
두 영혼이 융해되어 하나가 된다. 서로가 서로 속에 녹아드는 것이다.
<지금 나는 어디로 가고 있다>고 하는 목적 의식을 완전히 잊어버려라.
그 어디로도 나아갈 곳이 없는 이 차원에 머물러야 한다.
지금 여기에 용해되어 들어간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성행위는 서두르게 되는 것이다.
상대방을 욕망을 채우기 위한 노리개로, 물건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상대방은 그저 쓰고 버리는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 상대방 역시 그대를 하나의 물건으로 이용한다.
그때 두 사람은 용해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착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 사랑이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상대방 속으로 용해되어 들어갈 수 있다.
처음 단계에서 서로 용해되는 것은 많은 통찰력을 그대에게 줄 것이다.
성행위를 끝내려고 서두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점점 덜 성욕적으로 될 것이다.
그리고 점점 더 영적 차원으로 올라가게 될 것이다. 마음뿐만 아니라
성기 역시 상대방 속으로 융해되어 들어가 버린다.
깊고 조용한 에너지의 순환이 두 몸 사이에서 일어난다.
이렇게 되면 몇 시간이고 이 상태로 머물 수 있다.
이 상태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깊어진다.
그러나 생각은 하지 마라.
상대방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그 순간을 붙잡아라. 거기에 머물러라.
이것이 바로 엑스터시가 될 것이다.
삼마디가 될 것이다. 사정이 엑스터시가 아니다.
이 경지를 맛본 이상 그대의 성욕적인 마음은 비성욕적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진정한 브라흐마챠리아(완전한 독신)의 경지가 숨어 있다.
이것은 아주 역설적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보통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브라흐마챠리아가 되려면 이성(異性)과의 접촉을 가져서는 안된다>라고 말이다.
따라서 그는 이성을 피해야 한다.
이성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이렇게 되면 아주 위선적인 독신주의가 태어난다.
이성을 멀리할수록 그대는 더욱더 이성을 갈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탄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도망가지 마라. 회피하지 마라. 있는 그대로를, 자연 그대로를 사용하라.”
차원의 변형을 위해서 그대 전체를 사용하라.
싸우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변형을 위해서는 완전한 수용이 필요하다.
목적 없이, 순수한 유희로서 만난다면
그대와 그대 연인과의 성행위는
언제까지나 처음의 상태대로 남아 있을 수 있다.
흥분은 에너지다. 그대는 이 에너지를 잃을 수도 있다.
또 이 에너지의 절정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 에너지의 상실이 있다.
동시에 좌절감과 허탈감이 뒤따를 것이다.
그대는 이 허탈감을 휴식으로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부정적인 휴식이다.
탄트라는 긍정적이며 차원 높은 휴식을 준다.
두 연인이 서로에게 용해됨과 동시에 거기에서 강력한 에너지가 솟아난다.
그들은 하나의 원이 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에너지의 순환이 일어난다.
그들은 서로에게 생명을 준다.
싱싱한 생명 에너지를 주는 것이다. 여기에 에너지의 고갈은 조금도 없다.
아니 더욱더 강한 에너지로 충만해질 것이다.
이성과의 접촉을 통해서 그대 몸의 세포들이 한올한올 되살아 나기 때문이다.
흥분의 상태가 사정의 절정으로 치닫는 일이 없이 서로 속에 용해될 수 있다면,
뜨거움의 처음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있다면
그 뜨거움은 식지 않고 오랜 시간 동안 성의 유희를 연출하게 될 것이다.
에너지의 방출이 없다면, 욕망의 배설이 없다면 그것은 명상이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대는 전체가 된다.
분열된 그대의 인격은 이를 통해서 더 이상 분열되지 않는다.
이 성행위는 분열된 인격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신경쇠약증 환자들은 그들의 인격이 분열된 사람들이다.
그대의 인격이 다시 연결된다면
그대는 또다시 어린아이가 될 것이다. 순진무구한 어린아이가 될 것이다.
이 순수를 알게 되고 나서도 그대는 이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행동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행동은 어디까지나 연극이다. 그대는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자신이 하는 연기 속에 말려들지 않는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회가 요구하는 것임을
그대는 철저하게 알기 때문이다.
그대는 가면을 써야 한다.
그것은 그대가 지금 거짓투성이의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가면을 쓰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이 사회는 그대를 죽여 버릴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것은 그가 이 가면을 여지없이 벗어 던졌기 때문이다.
이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해주라.
그대 자신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불필요한 싸움을 만들지 마라.
하지만 한 번 그대가 자신의 본래 얼굴을 알고 나면,
그대 존재의 전체성을 깨닫고 나면
이 거짓된 사회는 더 이상 그대를 신경쇠약, 정신분열의 차원으로
끌어당기지 못하게 될 것이다.
결코 그대를 미치게 만들지 못할 것이다.
“성적인 결합이 시작될 때에
처음의 단계인 <불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라.
이 불의 상태가 계속되도록 하고
마지막의 <타다가 꺼진 불(射精)>이 되는 것을 피하라.”
사정을 하게 되면 그와 동시에
순환하는 에너지의 흐름은 끊어지고 밖으로 흘러나가 버린다.
그러면 거기에 불(火)은 더 이상 없다.
아무런 성취도 없이 그대는 그저 에너지만을 낭비한 것이다.
49
그토록 깊은 이 포옹 속에서
그대의 감각은 나뭇잎처럼 떨린다.
이 떨림 속으로 들어가라.
50
실제적인 포옹 없이 단지 그 결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변형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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