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교란 무엇인가? 10 [끝] (달라이라마) - 금강승 수행에서 풀어야 할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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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교란 무엇인가? 10 [끝] (달라이라마) - 금강승 수행에서 풀어야 할 의문

사임당|11.02.23|28목록댓글 0가가

밀교란 무엇인가? 10 [끝] (달라이라마) - 금강승 수행에서 풀어야 할 의문

 

3. 금강승 수행에서 풀어야 할 의문점들 

 

(1) 색신은 꼭 관해야 하는가

 

금강승은 과(果)로써 도를 삼는다. 곧 금강승은 과위(果位)에 수순하여 수행의 길을 닦아나가는 것이다. 바라밀다승과 금강승은 다 법신(法身)에 수순하여 수행하는 길을 닦지만, 금강승이 바라밀다승에 비하여 수승하다고 하는 까닭은, 금강승이 인지(因地)에서부터 본존불의 색신에 수순하여 수행하기 때문이다.

이 색신에 수순하는 수행에 대해 어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일으켜 질문을 하곤 한다. "부처가 되고자 할 때 색신을 관상해야 한다면 전륜성왕의 장엄한 상호를 얻고자 할 때는 반드시 그 모습을 관상하며 수행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어떤 불과를 얻기 위해 그 색신을 수순하여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어째서 불과가 그 색신을 수순하지 않으면 성취하기 어렵다고 말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바라밀다승에 의하면, 색신은 복덕을 쌓아 성취되는 것이다. 제8지에 오른 보살은 부처의 몸과 비슷한 상호를 가진, 의생신(意生身)을 얻게 된다. 이 의생신이 생긴 인연으로 자신의 무명 습기가 자취를 감추고, 이 의생신을 이용하여 미묘한 무루의 원력을 성취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의생신이 차츰 향상되어 마침내 불과의 색신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라밀다승에서는 오직 복덕을 구족함만을 말하지 않으며, 또 성불할 때 얻은 색신이 과거에 이미 있었던 몸을 의지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교이든 밀교이든 다 부처의 색신상을 성취하는 것은 필수이고, 그래야만 비로소 불과를 증득할 수 있다고 한다.

무상요가부에서 설한 바에 의하면, 일등 수행자는 한 생만에 이 몸을 가지고 성불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 수행자는 이 생에 모든 장엄한 상호의 몸을 구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색신을 관하는 수행으로 이 색신을 성취해야 한다. 물론 이 생에 부처의 색신을 구족하지 못했다고 하여 성불의 행상(行相)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성불의 행상은 그가 다른 인연을 쌓아 전륜성왕이나 축생. 아귀. 지옥 중생의 행상(行相)을 받는 것이 결정되는 것과는 같지가 않다.

자신과 본존이 하나라는 것을 관상 수행하는 것은 바로 불공(不共)의 인과 비슷한 것이다. 만약 공성만을 수행하고 방편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단지 비교적 낮은 소승의 아라한과를 증득할 수 있을 뿐이다. 원만한 불과인 구경의 성취를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색신을 관하는 본존 요가를 수행해야 한다. 오직 여덟 가지 싯디 등의 공통적인 성취만을 얻고자 하더라도 반드시 자신의 몸을 본존의 상으로 선명하게 관상하여 나타낼 수 있어야 하고, 본존으로써의 견고한 불만(佛慢)을 일으켜야 한다. 실로 본존을 관상하는 수행이 없다면 밀종의 길도 없으며, 이것이 바로 밀종 수행의 정수이다.

자신을 본존의 상을 구족한 모습으로 관상하는 것이 비록 어린아이들 장난 같아서, 마치 아이에게 어떤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주어 환상을 일으키게 하는 것과 같이 보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관법에 다시 공관(空觀)을 보충하고, 이타의 발심과 그 구하는 목적에 대한 이해를 더한다면 바로 마음을 닦는 수행의 비결이 되는 것이다. 수행자가 이러한 이치를 의지해서 스스로를 본존으로 관하여 불만을 확고하게 일으키고, 또한 재앙을 소멸하는 식법(息法) 등의 수행을 함께 닦게 되면 훗날 반드시 불과를 증득하게 된다. 오직 비밀한 진언만을 독송하는 것과 색신을 관상하여 본존요가의 만트라에 안주하는 것은 그 효용이 다르다. 어쩌면 장래에 한 과학자가 이 차이점에 대해 해석을 해 줄지도 모르겠다."

 

 

(2) 바라밀다승과 금강승의 불과(佛果)는 다른가

 

 

바라밀다승과 금강승이 방편이나 각종 수행 의례 등에 있어 여러 가지 다른 점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과위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 어떤 책에서 불과(佛果)와 금강지과(金剛持果)가 다른 듯이 설하고 있어, 바라밀다승과 금강승의 과위가 다르다고 하거나 금강지과(金剛持果)가 불과보다 높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게 일어나게 된 이유는, 보살의 지위에 있는 십지보살이 아직 불과를 증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방편으로 부처라고 칭한 데에서 생겨난 것이다. 예를 들면 미륵보살을 방편으로 미륵불로 칭하는 것과 같은 경우가 그것이다. 오직 바라밀다승의 수행만 해서는 불과를 성취하기에 부족하다. 그렇다고 해도 이 두 승을 통하여 증득하게 되는 불과는 같은 것이다. 만약 바라밀다승의 길을 수행해야만 성불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성불한 후에 다시 금강승 수행을 하여 더 높은 과위를 증득하기를 기대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종합적으로 볼 때 이 두 승을 수행하여 얻게 되는 과위는 같은데, 오직 그 성취함에 빠르고 늦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또 모든 진언의 길을 수행하는 사람은 삼대 아승지겁을 거치지 않고도 이 말법시대에 즉신성불(卽身成佛)할 수 있다고 망령되이 말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삼대 아승지겁을 거치지 않고 성불을 하려면 밀교의 하삼부를 의지해서는 안 되며, 오직 밀교의 무상요가부 수행을 통해서만 비로소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카파 대사가 지은 『밀종도차제광론』에 의하면, 즉신성불의 과위는 특별히 밀교의 무상요가부만이 가지고 있는 수승함이라고 하였다.

밀교의 하삼부의 길이 바라밀다승의 길보다 빨리 성취할 수 있는 이유는 밀교의 하삼부가 '자량도(資量道)와 가행도(加行道)'를 원만히 성취하기 위해 일대 아승지겁의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매를 닦는 방편은 바라밀다승과 비슷하다. 비록 밀교의 하삼부에서도 '일생성불(一生成佛)'을 말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마땅히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毘盧遮那成佛神變加持經)』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비밀주를 수행하는 모든 보살들은 일생에 정등각을 성취하리라." 

그러나 오직 밀교의 하삼부 수행만을 의지하여도 현생에 성불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지나치게 밀교의 하삼부를 찬양한 찬사에 불과하다. 밀교의 하삼부 수행자도 모든 일반적인 공통의 성취를 하여 제불보살을 친견하고 법문을 들음으로써 제불보살의 가호 아래 빨리 정각을 성취할 수가 있다. 그러나 바라밀다승보다 빠르다고 하는 것은 오직 자량도와 가행도의 수행에서일뿐, 견도(見道)'와 '수도(修道)'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을 수행해야만 한다. 

현재와 같이 사람의 수명이 아주 짧은 말법시대에 즉신성불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오로지 무상요가 부의 수행뿐이다. '일생성불'이 비록 밀교의 하삼부에서도 공유하는 수승한 수행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일생'이란 말법시대의 짧은 수명인 '일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밀법의 수행자는 본존요가를 수행하여 진언등의 방편을 지송한 공덕으로 자신의 일생을 몇 겁까지 연장할 수 있는 신통력을 성취할 수 있다. 이렇게 몇 겁이고 장수를 성취한 일생을 가지고 먼저 밀교의 하삼부를 의지해 수행한 다음, 다시 무상요가부의 수행에 의지하여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 중에서 말한 '일생' 또한 다겁의 일생을 말한 것이다.

 

 

(3) 생기차제가 곧 본존요가라는 견해는? 

 

 

적천(寂天) 보살이 『입보살행론』에서 말하기를, "초지 이상의 지위에 올라가 있는 지상(地上) 보살이 몸을 버려 보시를 할 때에는 그 몸과 마음이 전혀 고뇌롭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필요할 때 전혀 망설임없이 몸을 보시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부자상견경(父子相見經)』에서 이르기를, "보살의 마음은 언제 어디서든 항상 안락한 가운데 있다. 몸이 아무리 혹독한 형벌을 받을지라도 또한 안락하다"고 하였다.

만약 이 경전에 의거하여 논한다면 보호(寶護: Ratnarashita)의 견해는 이치에 합당치 않다. 그는 바라밀다승을 수행하여 얻어지는 지복(至福)과 무상요가부 수행을 통하여 얻어지는 '대락(大樂)'이 같다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금강승과 바라밀다승이 다 공성을 수행하고, 바라밀다승의 보살도 욕계의 색. 성. 향. 미. 촉 등의 욕락을 이용하여 수행의 길로 삼는 연고로, 욕망을 이용하여 도를 이루게 하는 '용욕위도(用欲爲

道)'의 수행상의 특색이 금강승만의 독특한 수승함이 아니라고 인정한 점에 있어서는 이치에 맞다고 하겠다.『대보적경(大寶積經)』의 「가섭청문품(迦葉請問品)」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을에서 나온 오물로 사탕수수밭을 기름지게 하듯이, 보살은 번뇌의 분뇨로써 부처의 덕을 기르나니라."

그는 "자비로써 인(因)을 삼아 무상보리심(無相菩提心)을 일으키는 것은 두 승이 다 공유한다"며 정확하고 분명하게 말하였다.그러나 생기차제가 밀교의 독특한 수승함이라고 잘못 인식하여 "무상요가부 가운데에서 생기차제 수행으로 본존요가를 닦는 것을 위주로 삼고, 원만차제 수행으로 공성을 닦는 것을 위주로 삼는다"고 한것은 잘못 말한 것이다. 실제로 공성을 닦는 것은 본존요가의 근본이며, 원만차제 가운데에도 공통적으로 본존요가를 구족하고 있다.

 

 

(4) 누가 욕망을 도(道)로 삼아 수행할 수 있는가 

 

삼장만(Tripitakamala) 논사는 말하기를, "바라밀다승과 금강승이 다 성불의 과위를 구하고자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나 바라밀다승에 비하여 금강승에는 네 가지 우월하고 수승함이 있다"고 하였다. 이제 그가 말한 네 가지 수승함을 먼저 밝히고, 각각의 진위를 살펴보려 한다.

"첫째는 무난수승(無難殊勝)이다. 금강승의 수행자는 바라밀다가 육신을 보시하는 등의 방편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삼매를 통해서 얻어지는 과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바라밀다승의 수행자는 이러한 도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에 매우 어려운 수행을 통하여 바라밀다를 성취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 설은 이치에 합당치 않다. 바라밀다승의 적천(寂天)은 일찍이 말하였다.

"우리들이 현재에도 여전히 많은 거지들을 볼 수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과거에 많은 제불보살들이 이미 원만한 보시바라밀행을 하셨으나 보시바라밀로는 세간의 모든 빈곤함을 다 없앨 수 없음을 드러내 보이신 것이다. 보시바라밀은 마음을 원만히 버리는 데에서 출발하여,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버려 일체중생의 구하는 바를 원만히 성취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적천이 말한 바에 의거하면 바라밀다승은 마음을 의지하여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장만의 '무난수승'에 관한 해석은 정확하지 않다.

"둘째는 방편수승(方便殊勝)이다. 금강승에는 많은 방편이 있는 데 비하여 바라밀다승에는 그런 방편이 없이 오직 평상한 법을 수행한다. 금강승은 네 부파로 나뉘어져 있고 각 파마다 여러 가지 대치 방편을 설해놓고 있다. 예를 들면 욕망을 이용한 수행방편이라든지, 불만(佛慢)을 일으키는 등의 여러 가지 방편과 자신을 본존으로 관상하는 법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수승함에 대한 삼장만의 해설은 이치에 합당한 듯하다 그러나 이것을 바라밀다승과 금강승을 나누는 이론의 근거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무상요가부에는 밀교의 하삼부에 없는 많은 방편을 구족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무상요가부를 따로 하나의 다른 승(乘)으로 세우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이근수승(利根殊勝)이다. 진언승은 욕망을 버리지 않고 수행하는 데 비하여 바라밀다승은 그 반대이다."

지칭(智稱) 논사와 삼장만은 다시 말하였다.

"진언승의 수행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수행의 대상이 되는 여인인 명비(明妃)를 수용하지 않는 자이고, 다른 하나는 수행의 대상으로 명비(明妃)를 수용하는 자이다. 명비를 수용하여 수행하는 사람을 상근기의 수행자라 하는데, 그들은 관법과 지혜 쌍운의 방편을 이용하여 요의대수인(了義大手印)을 성취한다. 명비를 수용하는 수행자도 다시 두 종류로 나눈다. 하나는 실체의 몸을 가진 여인인 명비를 수용하지 않는 자이고, 다른 하나는 실체의 몸을 가진 여인인 명비를 수용하는 자이다. 전자는생각으로 명비의 몸을 관상하고, 후자는 실제로 명비의 몸을 수용하여 수행한다."

그러나 이 설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왜냐하면 무상요가부의 최상근기의 수행자만이 실제 몸을 가진 여인의 몸을 수용하여 도를 닦기 때문이다. 진귀하고 수승한 유정(有情)은 이러한 방편으로 이 생에서 불과를 성취하는 것이다. 바라밀다승과 금강승은 욕망을 버리고 수행하는 방편과 욕망을 이용해서 수행하는 방편을 구족하고 있다. 그러므로 수행할 때 욕망을 버리는가 버리지 않는가를 가지고는 두 승을 판단 분별하는 근거로 삼을 수 없다.

네 번째로 삼장만이 설한 수승함인 이근(利根)의 해설 또한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가 말한 '방편'이나 '무난(無難)', 두 승의 방편이 각각 다르다는 설에 대해 나는 이미 그 합당하지 못한 이유를 명시하였다.그리고 만약 진언승이 색. 성. 향. 미. 촉 등의 오욕을 수용해서 '도(道)로 삼는 수행'이라고 말한다면,

그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가 설한 바에 의하면, 최상승근기의 수행자는 모든 탐욕이 다 없어졌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므로 앞뒤가 모순되는 것이다.

 

 

(5) 밀교 네 부파의 차이점은? 

 

 

밀교는 사부(짜리야 탄트라), 행부(끄리야 탄트라), 요가부(요가 탄트라), 무상요가부(아뇩다라요가 탄트라) 등 네 부파로 나눌 수 있다. 또 무상요가부는 다시 부(父) 탄트라와 모(母) 탄트라, 무이(無二) 탄트라로 나누어져서 짜리야 탄트라, 끄리야 탄트라, 요가 탄트라를 합하여 여섯 개의 부파로 형성되었다. 

종카파 대사는 일찍이 말하였다.

"무이(無二) 탄트라는 곧 방편과 지혜가 둘이 아니요, 낙(樂)과 공(空)이 둘이 아니다."

곧 종카파 대사는 모든 무상요가부가 다 무이 탄트라에 속한다고 설하신 것이다.그러나 샤캬파 전승의 유명한 논사이자 번역가인 세랍린첸은 종카파 대사께서 말씀하신 내적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쟁론을 일으켰다. 후에 그는 자신이 잘못 오해한 것임을 깨닫고, 찬탄하는 게송을 지어 종카파 대사의 종풍(宗風)을 선양하고 자신의 허물을 참회하였다. 그는 칼라차크라 탄트라를 무이(無二) 탄트라로 인정하였다. 왜냐하면 칼라차크라 탄트라에서는 네 번째 관정인 비밀관정에 중점을 두어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 관정에는 수승한 불변의 대락(大樂)과 구경의 무상(無上)한 공성(空性)을 쌍운하는 도리가 섭렵되어 있다. 세랍린첸은 따로 탄트라와 모 탄트라를 나누고, 또 그 안에서도 각각 '불변의 대락'과 '구경의 공성' 중에 어느 한 가지에 중점을 두어 설하였다.

밀교의 네 탄트라 수행자는 그 발심 동기가 다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 구하는 목표는 모든 허물을 여의고 모든 덕을 원만히 구족한 불과를 증득하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그 발심 동기와 구하는 과(果)를 가지고는 밀교의 네 부파를 구별하거나 나눌 수가 없다. 또한 본존 요가도 네 부파가 다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존요가의 상이함을 가지고는 네 부파를 구분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각 부파마다 다 많은 본존요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의 논저 가운데 밀교의 네 부파가 인도의 4종성(네 계급)을 교화하기 위해서 생겼다는 설이 있고, 혹은 각각의 다른 번뇌를 가진 수행자들을 위하여 설해졌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 역시 밀교의 네 파를 분별하는 근거로 삼기에는 부족하며, 더더구나 네 부파 수행의 수승함을 드러낼 수 없다.

밀교의 네 부파는 교화해야 할 대상을 욕계의 유정들로 삼고 있다. 특히 욕망을 이용하여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는 근기의 수행자들을 위하여 설해진 것이다. 자연 이 네 부파는 욕망을 도로 삼는데, 욕망을 통하여 공성의 지혜를 닦고 본존을 관상하는 수행자의 능력 차이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설해진 것이다.

밀종에는 지금강불의 최고의 불과인 칠지(七支)가 있다.칠지는 ① 원만수용, ② 화합(化合), ③ 대락(大樂), ④ 무자성(無自性), ⑤ 대비(大悲), ⑥ 항상(恒常), ⑦ 무진(無盡)이다. 이 가운데 앞의 삼지(三支), 곧 원만수용과 화합과 대락은 오직 밀교부에서만 볼 수 있다. 나머지 네가지는 현교와 밀교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무자성을 대락심(大樂心)의 소연경(所緣境)이라고 한다면, 무자성 또한 밀교부의 불공법으로 볼 수 있다. 밀교의 하삼부에서는 화합에 대하여 설하지 않는다. 또 밀교 하삼부의 수행자는 오직 명비(明妃)를 생각으로 관상만 할 수 있을뿐, 실제로 여인의 몸을 가진 명비를 수행에 사용할 수가 없다. 요가부에서는 손을 잡거나 포옹하는 데서 일어나는 욕락으로 도를 삼고, 행부에서는 서로 미소를 지음으로써 생겨나는 즐거움으로 도를 삼고, 사부에서는 서로 마주 봄으로써 일어나는 즐거움으로 도를 삼는다.간단히 말해서 밀교의 네 탄트라에서는 오욕을 이용하여 도로 사용하는 것이다.

밀교 네 부파는 수행의례나 방법 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사부는 외적인 의례를 수행의 중심으로 삼고, 행부는 외적인 의례와 내적인 수행을 함께 중시하며, 요가부는 오직 내적인 수행만을 중시한다. 무상요가부의 가르침은 비교하여 설명할 것이 없다.

이상은 네 탄트라에 대해 간단히 해설한 것이다. 네 탄트라의 수행은 상응하는 근기를 가진 수행자에 근거하여 나눈 것이지, 사람들의 기호에 따라 나눈 것이 아니다. 오늘날 탄트라 수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모두가 수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출처 : 달라이라마라의 밀교란 무엇인가 / 달라이라마 저, 석설오 역 

로종 블로그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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