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사건은 여러가지의 차원으로 나뉠수 있습니다. 인간은 언어를 그리고 3차원적인 세계를 살기 때문에 그때 그때 사회에서 교육 받은, 혹은 본인의 이익과 관련된 정보만을 이야기하고 듣기 때문에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한가지의 일이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차원으로 설명이 가능하며 , 얼마나 많은 연결을 가지며, 얼마나 많은 차원으로 그것을 볼 수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지식이 쌓이고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된 것을 알게 되는 사람일수록, 조금더 정확하게 사실을 보게 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다각도로 사건을 해석하고 그 다각도의 해석을 서로 연결하여 상호간에 불일치 함이 없는지 확인 하는 과정에서 진실에 더 가깝게 다가가게 됩니다.
지성이 높아질수록 더 많은 연결과, 차원을 고려하게 되고, 더 차원이 많아 질수록 사실에 가깝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지성인은 이런 차원 또한 무한이 분화하며 스스로 개인이 가진 지성이나 에너지의 한계까지만 차원을 인식할수 있슴을 깨닫게 되고 그걸 깨닫게 되면 스스로의 한개를 인식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스스로의 확고한 믿음을 포기하고 결국 최상의 깨닳음은 스스로의 능력이나 생각으로 알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절대자인 창조주 하나님께 의탁하거나 스스로 겸손하여 끊임없이 가르침을 갈구 하는 상태의 구도자가 되게 됩니다.
반면 세상을 본인의 안위와 이득으로만 보는 사람들은 본인의 이득이라는 차원으로 모든 일을 해석하기 때문에 사실과 다른 허구의 세상과 생각으로 머리를 채우게 될뿐만 아니라 서로서로에게 해가 되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 되어서 결국 서로가 서로를 힘들게 하는 세상을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많은 종교에서 이타행을 초입과정에 두는 이유역시 이러한 어리석고 뒤바뀐 생각을 바로잡아 세상을 바로 보게 만들려는 것 같습니다.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이라는 논리적인 판단의 차원도 개체분화함을 설명하는 트리)
세포 분열 혹은 이분법 적인 논리적인 사고가 이분법적으로 계속 분화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트리
하나의 인격체로 보자면 우리가 최상의 하나님부터 분화된 우리, 개인까지 혹은 모든 것이라는 것부터 구체적인 주변에 일어나는 사실까지 여러 분화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2개로 분열을 하는데 (세포가 2개씩 분열하듯) 그 과정에서 계속 좋고 나쁨도 함께 생겨나서 하위의 구체적인 일로 내려 올수록 머리속에서 좋고 나쁨의 바이너리 트리 구조가 생기고 그것들이 모두 좋고 나쁨이 없어져서, 마음이 가장 태초의 하나님 까지 연결이 될때 결국 우리가 신성, 공, 하나님, 무한의 에너지를 가져올수 있다. 좋다 나쁘다에 빠져서 스스로 마음의 고통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닌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결국 욕망에서 파생된 하나의 허상일 뿐이고 그것이 우리들이 깨닳음으로 가는 가장 큰 장애물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물리적, 권력적, 법률적인 장애들은 사실상 그것을(마음) 을 비추기 위해 창조주 께서 만들어 놓으신 장치일 뿐이라는 생각이며 그것이 도움이 되어 우리는 호불호를 탈피하여 모든것이 그대로 여도 좋은 상태에 이르고 각종 번뇌로 부터 해방이 된다는 소식입니다.
이는 불교에서는 공즉시색 색즉시공, 화엄 교학, 다즉일 일즉다 과 같이 익히 많이 알려진 것이긴 하나 우리가 그것이 정확하게 어떻게 우리의 감정과 생각이라는 차원에서 작동하는지 알기 어렵고 그것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면 양극에 현혹되어 마음이 일어나는 것에 노예가 되기 마련입니다. 익히 알려진 불교 가름침인 좋고 나쁜이 없다를 실천하는 것이 견성에 가는 길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트리 내에서 B라는 일을 생각해 봅니다. 나는 이 일에 대해서 옳고(D) 나쁘다(E)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는데 내가 좋다 나쁘다 이렇게 해야한다 저렇게 해야한다라고 생각했던 일마져도 A라는 차원이나 일, 즉 그것이 더 합쳐져 있는 차원으로 가게되면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예를 들면 정치적 이유로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경상도와 전라도 간의 지역 감정을 봅시다. 개개인의 사람들에게 어떤 두 지역간에 발생된 분쟁을 이야기하면 각각의 지역 사람들은 각각의 지역에서 한 일이 맞고 당연하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경상도, 전라도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컨셉으로 합일된다면, 혹은 이것이 더 상위의 한반도라는 단위로 합일이 된다면 그것 분쟁이 혹은 그 옳고 그름이 문제가 될까요? 그렇다면 왜 정치인은 이런 지역을 둘로 나누고 그런 지역감 정을 만들어 내는 걸까요? 그것을 통해서 이들은 어떤 이익을 취하는 것일까요?
정치라는 측면에서는 개개인이라는 사람들을 통치의 대상으로 보는데 시민들 개개인이 욕구가 있어서 그것이 충족되지 못할때 불만을 가지고 통치하는 사람을 교체하게 만드는 촉매가 됩니다. 그래서 통치는 사람은 본인의 부나 이득을 최대화 하는 과정에서 시민들에게 불만을 사게되고, 그런 불만이나 에너지를 자신에게 오게 하기 보다는 시민들끼리 서로 상충하게 만들어 그 에너지를 무력화 함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는 잘 알려진 Divided and Conquer 정책입니다.
아래의 나무 모델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부부가 합일하여 2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이 두명의 자식은 서로 부모의 재산을 가지기 위해서 서로 법적인 다툼을 하고 있습니다. 각각 개개인에게 사정을 물어보게 되면 이들은 각각의 이권을 대변하는 논리를 (이분법적인) 설명하며 본인이 재산을 더 가져야 한다는 말을 할것 입니다. 물론 구체적인 상황이나 조건은 그때 그때 다르겠지만 법률적인 싸움이 일어났다는 말은 본인의 이득이라는 차원은 변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나뭇잎)은 만들어낸 나뭇가지에 해당하는 부모님께 이러한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아들들이 주장하는 좋고 나쁨의 의미가 소멸되고 의미가 없슴을 알수 있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아픈 손가락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개개인이 아니라 합일이 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면 일어나는 분쟁이 선과악의 개체분화에서 일어나는 허상이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결국 두 손가락이 혹은 오른손과 왼손이 싸우게 되면 주인되는 몸통만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몸통이 죽으면 그것을 통해서 누가 이득이 취하는지만 지켜보면 왜 뱀이 선악과를 아담과 이브에게 줬는지 알게 되실 것입니다.
근래에 일어나는 메갈리아와 같은 남녀간의 대립을 통해서 그것을 조장하는 사람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자를 옹호하는 설명을 들으면(위 트리에서 D 노드) 일리가 있고 남자를 옹호하는 설명을 들으면 (트리에서 E노드) 그것또한 맞는 말 같습니다. 결국 우매한 사람들은 D와 E를 중 선택을 해야 한다는 오류에 빠지고 맙니다. 너는 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 너는 전라도냐 경상도냐? 너는 남자편이냐 여자 편이냐? 너는 육식이냐 채식이냐?
과연 세상의 일들이 이렇게 선과악으로 이편과 저편으로 나뉘어 질수 있는 것일까요?
만약 지금 시대에서 남자들이 좀더 이득을 취하는 구조라면 과연 여성이라는 나, 개인이라는 개체분화의 측면에서 보자면 분명 손해가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가족 우리 아빠 내 남동생 내 남편이 남자가 가지는 이득을 취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면 이렇게 가족이라는 합일된 컨셉으로 간다면 결국 그 손해와 이득이라는 분화된 컨셉이 소멸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양극의 생각과 마찰을 통해서 사회가 발전하고 좀더 균형있는 발전을 이루에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지만 지금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남한과 북한, 좌파와 우파, 남과 여 의 대립을 통해서 누가 이득을 취하게 된다면 이런 양극화는 순작용보다는 역작용이 더 많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밤과 낮, 겨울과 여름 처럼 이러한 양극은 서로 순환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에 힘쓴다고 하여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쓰는 에너지와 노력은 끊임 없는 순환속에 들어가서 윤회하게 만드는 주원인이 됩니다. 그 끊임 없는 인간의 윤회를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주 에너지로 삼아 생존하는 존재들에게는 매우 환영하고 권장할 일입니다. 그것이 익히 알려면 Arkon, pindar, 데미 우르무스의 역할인 것입니다.
여하튼 이러한 사실을 알게되면 우리는 우리의 반대되는 극, 즉 적을 이기는데 에너지를 쓸것이 아니라 남과여 남한과 북한 , 더 나아가서는 인류, 나와 남 이라는 것을 넘어선 합일된 의식으로 생각함으로 양쪽 극에게 모두 도움이 되는 생각과 행동을 할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는 하나라는 하나님, 견성, 법신에 다다르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구의 과정을 이수하게 만드신 이유입니다. 그것과 연결된 사람은 무한한 창조주의 창조의 에너지를 가져올수 있게 되고 그것이 이런 오악탁세의 세상에서도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입니다. 순간 순간 인간들은 자신도 모르게 간절한 때에 이미 이러한 에너지를 기도나 마음의 힘으로 가져다쓰고 있으며 그것을 배우고 익히기 위해서 윤회를 계속 거듭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그냥 그대로 두어도 이미 창조주 하나님은 음과 양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게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평안에 이르게 되며, 일어나는 일들을 겸허하고 침착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작용만이 우리가 주권자인 관계로 우리가 이런 밸런스를 맞추어야 하고 우리 외부의 것 들은 하나님이 양극의 밸런스를 이미 주관하심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나와 남, 개인과 집단이라는 개체의 차원에서 분화됨을 설명하는 나무그림)
우리 개개인의 인간(leaf)이 어떻게 집단 지성(나무가지)와 연결되어 있으며 그 작은 나뭇가지는 더 굵은 나뭇가지와 (붓디의식) 그 굵은 나뭇가지는 하나뿐인 가장 굵은 기둥과 연결이 되고 (법신, 하나님) 또 다시 그 기둥은 음으로 또다시 분화하여 뿌리로 개체 분화 한다. 아래의 자장이 활동하는 것과 똑같은 모양의 물리적 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즉 자장의 (작은것) 움직임이 나무(큰것)의 생김새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에너지의 작용도 결정을 한다.
(에너지의 순환이란 차원에서 의 양극)
나무는 하늘의 태양으로 부터 가볍고 뜨거운 양(태양)의 에너지를 받아서 뿌리로 전달하고 뿌리는 무겁고 차가운 물의 에너지를 땅으로 부터 흡수하여 이파리로 전송을 하는 음과 양의 조화 그리고 자장이 N극과 S극이 연결되어 서로 순환하는 자장의 모습이 현실에서 어떻게 물질적으로 나타내어지는지 잘 나타나는 모델이다.
나무의 모양과 닮아 있는 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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