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복껍질에서 탄생한 철갑탱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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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복껍질에서 탄생한 철갑탱크

오늘날 더 나은 인간생활을 위해 몰두하고 있는 연구자들은 이미 동식물이 오래 전에 겪었던 것과 동일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결국 이들이 눈을 돌려 모델을 찾을 수 있는 곳이란 자연밖에 없다.

어느날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조르주 드 메스트랄은 엉겅퀴 씨앗이 강아지 몸에 가득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호기심 많은 그는 불평 대신 이 현상을 흥미있게 관찰했다. 그리고 엉겅퀴 씨앗의 갈고리가 개털 조직 사이사이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여기서 영감을 얻은 메스트랄은 갈고리와 섬유질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달라붙었다 떼어낼 수 있는 제품을 고안해냈다. 우리가 흔히 ‘찍찍이’라고 부르는 벨크로 테이프(우단(VELvet)과 갈고리(CROchet)를 합성한 상표 이름)는 이렇게 탄생했다. 오늘날 벨크로는 옷소매에서부터 무중력 상태인 우주선 안의 도구를 고정시키는데 이르기까지 그 쓰임새가 매우 다양하다.

생존경쟁을 위한 선택

엉겅퀴 씨앗이 갈고리 모양을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학자들은 이에 대해 “바람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엉겅퀴가 번식을 위해 씨앗을 새의 깃털이나 동물의 털에 달라붙여 먼 곳까지 운반하는 기막힌 방법을 스스로 개발한 것”으로 해석한다.

비단 엉겅퀴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식물과 동물의 감각, 성장, 재생에 이르는 생명작용은 하나같이 그 나름의 최적 상태를 이루고 있다. 이를 테면 사막의 선인장은 수분을 덜 발산시키기 위해 가시로 진화했고, 낙엽수는 추운 겨울을 이기기 위해 잎을 떨어뜨린다. 이는 바로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물이 도출해낸 해법에 다름아니다.

오늘날 과학자와 공학자, 디자이너 등 더 나은 인간생활을 위해 연구실을 지키고 있는 이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동식물들이 이미 겪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연구자들이 쓸모 있는 물건과 재료를 개발하거나, 또 이미 만들어진 물건을 개선하기 위해 골몰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고차원의 생존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여기서 주의깊게 살펴볼 부분은 이들의 연구가 결코 거창한 문제의식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벨크로의 예가 보여주듯, 오히려 허다한 발명과 발견은 실로 단순하기 그지 없는 관찰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대부분.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듯이, 연구 과제 역시 하늘에서 뚝 떨어져 시작되는 것이 아님을 헤아린다면 이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연구자들에게 최고의 아이디어 제공처는 두말할 것도 없이 자연이다. 생물의 모양이나 운동, 분자구조, 습성, 생명 과정 등을 둘러싼 비밀이 조금씩 걷히면서 오늘날 많은 기업과 아카데미 영역의 연구자들은 자연의 특성을 흉내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생체 모방’(biomimicry)이라 불리는 이 아이디어는 일본에서는 ‘지능 구조’, 영국에서는 바이오미메틱스(biomimetics), 미국에서는 ‘스마트 물질’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면서 오늘날 과학과 공학의 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자연물의 구조나 성질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한 것인지, 아니면 원하는 성질을 가진 자연물을 재료로 이용하는지 여부에 따라 용어를 구별하기도 하지만, 이름이야 어떻든 간에 ‘자연에서 한 수 배운다’는 애초의 관점은 별 차이가 없다.

물론 요즘은 재료로서의 이용보다는 아이디어 차용 쪽이 강세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연구자가 아이디어를 취하는 것은 생물 그 자체라기보다는 해당 생물의 특징이다. 이 때문에 생체모방은 애초 아이디어를 제공한 생물의 모습과 기능, 구조와는 전혀 엉뚱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은 완벽한 모습을 갖추기까지 무수한 세월을 진화해왔다. 우리는 생물학적 구조를 살피고, 이를 인공계에 접목시키고자 한다”는 미국 애리조나 대학 폴 캘버트 교수의 설명은 생체모방을 정확하게 정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섬유 거미줄

사실 자연을 차용해 사물의 설계도를 그리는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네오나르도 다 빈치가 새의 비행을 연구한 뒤 하늘을 나는 기계를 설계했고, 물고기의 동작을 연구해 날씬한 선체(船體)를 설계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 또 라이트 형제도 터키 대머리수리가 자신의 몸을 이용해 난류를 줄이는 것을 분석해 비행기를 안정하게 했으며, 이순신 장군은 거북의 갑피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거북선을 만들었다.

오랜 연원을 가진 생체모방에 대한 관심은 최근 들어 질과 양에서 폭발하고 있다. 새 것을 개발하고 옛 것을 개선하기 위해 참고할 만한 대상에 자연만한 모델이 없기도 하거니와, 이를 이용함으로써 연구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쓰레기를 줄이거나 비용을 절약할 수있다는 현실적인 이득에 눈을 뜨게 된 때문이다.

특히 이같은 관심은 재료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한때 공학에서는 강도(强度)높은 재료를 만드는 것이 최고의 이슈였다. 철기시대의 전통에 충실한 이들은 쇠를 달구는 새로운 방법을 찾고, 이것 저것을 뒤섞어 합금을 만들어내면서 목표에 다가서고자 했다.

그러나 이들과 별개로 아예 새로운 재료를 찾아나선 학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철보다 더 강하면서도 흔한 물질이 지상에 분명히 있을 것으로 믿었다. 미국 워싱턴 대학의 연구자들은 전복 껍데기를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본 결과 세라믹 복합재료와 거의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전복 껍데기는 분필과 동일한 성분인 탄화칼슘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1백kg이 넘는 사람이 밟아도 부서지지 않을 만큼 강도가 높다. 여기에서 착안한 연구팀은 전복 껍데기의 분자배열을 분석해내고, 이를 이용해 탱크 철갑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강한 재료에 대한 욕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연구자들은 실크나 거미줄, 면화 등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재료를 실험실로 끌어들였다. 실제 거미줄은 무게에 비해 현저하게 질겨 철보다 무려 5배나 더 강하며, 한 가닥을 8만m까지 늘일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면화는 최초 길이를 1백30% 더 늘일 수 있는 천연 섬유 스프링이다.

누에가 뿜어낸 실크도 낙하산이나 열기구에 사용할 만큼의 탄력과 강도를 가지고 있다. 이 강도의 비밀은 실크를 구성하는 단백질 분자가 비틀린 방향과 동일하게 꼬여 있기 때문. 화학자들은 실크의 분자 배치를 흉내내 나일론과 다른 합성실을 만들어냈다. 실크는 강도 뿐 만 아니라 복원력도 좋아 바이오테크놀러지회사에서는 이를 인공으로 만들어 인대 등의 인공 근육을 제조, 화상자 치료에 이용하고 있다.
 
거미줄은 같은 무게 기준으로 철보다 5배 더 강하다.거미줄은 같은 무게 기준으로 철보다 5배 더 강하다.

벌집과 이동통신

생체 모방은 첨단이 난무하는 이 시대의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이들은 자연을 이용하던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자연에 몰입하고 있다. 분자구조를 분석하고자 다가선 현미경에서 한발 뒤로 물러났을 때 과학자들은 자연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실험실임을 발견한다.

전자 산업에도 자연에서 영감을 얻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 캐나다 연구자들은 광섬유로 이용해 비행기 날개의 피로도를 감지하는 가상 신경계를 만들고 있으며, 미국 시라큐스 대학에서는 레이저 빛을 받으면 꺼졌다 켜졌다 하는 늪지 박테리아를 이용해 1백80억비트 이상을 저장할 수 있는 메모리 소재를 개발하고 있다.

용문사 은행나무가 1천년이 넘는 세월을 견디며 보란 듯이 서 있는 것은 건축물의 피로 저항을 연구하는데 한 모델이 될 수 있다. 나무는 어린 나뭇가지가 손상되면 큰 가지를 재편성함으로써 균형을 회복하는 영리함을 발휘한다. 또 나무는 중간 줄기를 도려내면 양쪽에서 세포가 성장해 공간을 메운다. 실제로 사람의 뼈도 중간에 이상이 있으면 양쪽에서 뼈가 자란다.

이같은 성질을 관찰한 독일의 카를스루헤 핵연구소의 물리학자 클라우스 매트헤크는 나무의 생체현상을 흉내내 스트레스를 고루 분배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자동차 엔진의 무게를 20%나 줄였고, 사고로 부러진 자신의 다리에 들어가는 인공장기의 나사못을 재가공하기도 했다.

특정 생물이 가진 생물학적 특이점 뿐만 아니라 형태 그 자체를 응용하는 경우도 흔하다. 이 가운데 대표주자는 벌집. 꿀벌은 배에 붙어 있는 밀랍샘에서 밀랍을 분비, 꿀이 넘치지않도록 9-14도 정도 위로 향하게 집(하니콤)을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6각형 벌집을 일러 다윈은 “낭비가 전혀없는 완벽한 구조물”이라 극찬했다.

과학자들은 벌통의 단순함과 강도를 설명하기 위해 무척 시달려왔다. 하지만 자나 컴퍼스 없이 이같은 모습을 만든 벌의 비상한 재주보다 더 놀랄 일은 이 구조가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벼우면서도 강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안에 꿀이 채워져 있을 때는 꽤 무게가 나가지만, 꿀을 빼고 재보면 종이장처럼 가볍다.

식물의 줄기, 그리고 사람의 각막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6각형 형태는 포장에 사용되는 골판지에서 벽걸이 텔레비전에 사용되는 액정화면의 구조에 이르는, 실로 다양한 분야에 응용되고 있다.

무선 이동통신의 기지국을 설계할 때 본이 된 것도 6각형이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무선전화기나 시티폰은 서비스 지역에서만 통화가 가능하지만 이동 전화는 기지국과 기지국을 넘나들며 통화가 가능하다. 이는 ‘핸드오프’(handoff)라 해서 통화가 진행되는 동안 해당 기지국이 신호의 세기가 약해지면 신호 세기가 더 좋은 음성 채널을 찾아 다른 기지국으로 이전시켜주기 때문. 여기서 하나의 무선 기지국이 커버하는 서비스 지역을 셀(cell)이라 하는데, 각 셀은 6각형 모양을 하고 있으며, 이들을 전체로 보면 영락없는 벌집 모양이다.
 
박쥐나 곤충의 더듬이에 버금가는 레이더를 만들기란 쉽지 않다.박쥐나 곤충의 더듬이에 버금가는 레이더를 만들기란 쉽지 않다.

자연에 순종하라

지금까지 살펴본 사례 외에도 우리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생체 모방의 예는 무수히 많다. 따지고 보면 인간이 이루어놓은 모든 피조물은 대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방의 범위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결국 과학이란 자연 어딘가에 그 틀을 두고 있는 ‘모방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물론 자연을 자신의 편의에 맞춰 이용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또한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위대함을 한껏 발휘한 생체모방공학을 보며 잊어서는 안될 점이 있다. 바로 자연에 대한 경외다.

생명은 자연적인데 반해 이를 이용해 만든 모방품은 모두 인위적이다. 인공물은 재료 물질에 외부의 힘을 가해서 생겨난 것이어서, 제 아무리 완전한 인공물이더라도 생물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연의 질서를 흉내낸 또다른 인공물은 필연적으로 예기치 않은 부산물을 만들어낸다. 전세계가 골치를 앓고 있는 환경오염은 자연과 인공의 차이점을 잊은 채 개발 자체에만 몰두해 일어난 사태다. 바야흐로 ‘자연에 순종하라’는 메시지에 귀 기울여야 할 때다.

인간보다 우월한 동식물 능력

동물들이 자신을 둘러싼 외부환경(場)을 감지하는 능력은 실로 비범하다. 수백년의 세월 동안 항해에 나선 사람들은 나침반을 이용해왔지만 나비나 벌 같은 비행곤충이나 조류 등은 나침반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원하는 방향을 정확히 잡아 비행한다. 이때 이들의 비행은 태양이나 별의 위치를 체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비나 구름 등의 기상조건에 맞닿으면 또다른 방법을 동원한다. 자기장을 이용하는 것이다. 상당수 곤충들은 자기를 감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지구의 자기장이 미치는 곳에서라면 절대 길을 잃는 법이 없다.

몇몇 동물에게서는 자기장 감지 외의 또다른 능력도 발견된다. 아마존강의 캄캄한 수중에 사는 나이프피시는 약한 전기를 발생함으로써 스스로의 주변에 전기장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 전기장에서 발생하는 왜곡을 감지함으로써 다른 생물이나 해양 물체의 위치를 파악해낸다.

전기 뱀장어는 이보다 한층 심오하게 전기를 이용한다. ‘일렉트로플레이트’라고 불리는 근육을 조절해 전기를 발생하는 전기 뱀장어는 일단 낮은 볼트의 전기장을 이용해 대상물을 감지한 뒤 강력한 전기를 방출함으로써 먹이를 죽이거나 겁준다. 그 강도는 0.1볼트짜리 건 전기를 수천개 직렬로 연결한 것과 맞먹는 정도. 먹이를 발견하면 모든 전지가 일시에 작동하며, 이때 거의 5백 볼트에 달하는 전기를 발산한다.

육상 포유류에서도 전기에 민감한 종이 있다. 호주 오리너구리는 스스로 전기장을 만들지는않지만, 가장 좋아하는 먹이인 민물 새우가 내놓는 미약한 전하를 포착하는 ‘센서’를 가지고 있다.

곤충들도 전기장을 이용한다. 번개구름 속에서 거대한 전기가 만들어지면 강한 전기장이 형성되는데, 벌은 이를 미리 감지하고 벌통으로 잽싸게 돌아간다. 또 번개구름에 벌이 반응하는 것처럼 햄스터는 폭풍에 대해 같은 반응을 보인다.

많은 식물들은 약한 빛이나 온도, 공기중 습도의 변화를 통해 날씨 변화를 예견한다. 별봄맞이꽃은 특히 민감한 식물이어서 비가 오기 바로 직전 꽃입을 단단히 닫는다.
 
글 : 이강필 

과학동아 1997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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