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큰 법당에서 한국말을 통한 관정의식 법회가 최초로 진행되겠습니다.
티벳과 한국은 역사적으로 볼 때 왕들간의 교류나 직접적인 나라간의 교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스님들이 중국으로 오셔서 몇분은 티벳에 오신다든가 불교를 공부한 흔적이 역사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라 때 원측 스님께서 해심밀경소를 쓰신 게 티벳 장경에 포함될 정도로 옛날에는 적어도 불교 안에서는 티벳과 한국의 관계가 깊었습니다.
티벳이 현재 망명한 후에는 한국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조금씩 증가하다가 여기를 오신 게 인연이 되어서 오늘과 같은 법회가 마련되었습니다. 멀리에서 오신 스님들, 신도님들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우리 모두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한 한 불자입니다.
그래서 일단 스승이 똑같습니다. 티벳과 한국의 불법은 어디에 기원을 두는가 그것은 인도의 나란다 전통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나란다 전통이 티벳에 갔을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중관사상과 유식사상이며 이 두가지가 지금까지 발전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보살승이나 비밀불교의 진언, 천수천안 관세음보살같은 수행은 두 나라에서 똑같이 발전되어온 불교의 습관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티벳사람으로서, 한국사람으로서 서로 차이가 있지만 조상 대대로부터 부처님께서 가르친 불법을 신봉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새로운 종교를 만들거나 새로운 수행법을 만드는 것은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서로의 전통의 특수성을 유지하면서 수행 발전을 꿰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우리는 현재 21세기를 맞고 있는데 20세기에서 커다란 경험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은 한국동란을 통한 전쟁과 그로 인한 50년 분단으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를 겪었고 티벳을 예를 들어 본다면 중국의 침략으로 자유가 말살된 역사의 가장 어려운 시기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월을 지나면서 더 좋은 경험과 폭 넓은 시야를 통해서 생각으로 일치점을 찾아가면서 지구촌이 갈등 없는 화해와 사랑의 사회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실천해야 합니다.
지금 지구촌이 갈등과 서로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지금 들어오기 방금 전에 밑에서 금새 테러가 일어나서 30명 이상이 죽었고 많은 피해자들이 났는데 이 법회 기간 동안 그 분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여기 모이신 티벳 스님 사부 대중께서 삼보에 대한 찬탄게를 한 뒤 한국말로 삼귀의 반야심경, 그리고 관음정근이 있겠습니다.
---의식---
관정의 첫 부분에 예비 관정식과 길상초를 나누어 주는 두 번째 부분으로 진행이 되겠습니다.
부처님에 대한 감사 찬탄을 설한 나가르쥬나 중론 1장 1절을 말 해 보겠습니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항상하지도 않고 아주 없지도 않으며
동일하지도 않고 차이 지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또한 가지도 않는다
이러한 인연법을 설하여서
갖가지 희론(?)을 소멸시키시는
모든 성인 중에 으뜸되는 부처님께
머리 숙여 공경합니다.>
법문을 듣는 사람과 법문을 설하는 사람이 동시에 해야할 것이 귀의와 발심입니다.
그런 뒤 바른 동기를 일으켜서 법문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지금 짧은 기도 게송을 외웠는데 나가르쥬나의 기도문입니다.
이 기도문은 부처님께 귀의하여 절을 올린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모이신 분들은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받고자 모였습니다.
특히 오늘 한국의 법우를 중심으로 한 티벳의 여러 곳에서 온 난민과 함께 한 이 자리는 더없이 좋은 자리로 생각됩니다. 이것은 각각의 큰 공덕과 기쁨이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나만의 행복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모든 중생을 위한 기도를 해야만 합니다.
착한 마음, 바른 동기로 기도를 해야 세세생생 불퇴전하는 기도가 됩니다.
우리는 모든 중생이 내 어머니와 같다라고 생각을 해야 하는데 이 말은 특히 중요합니다.
우리들은 흔히 기도하라면 나와 가족 친척 친구까지는 기도를 합니다.
정말 모든 중생을 어머니와 같이 여기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분은 적으리라고 봅니다.
또 그렇게 가르침을 이끄는 종교도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의 기도는 대승심과 보살심을 일으키기 때문에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매일 기도를 하는데 각 종교간의 풍습과 예식은 다를 수 있지만 그 의미로 볼 때는 똑같은 것입니다.
언어와 종교는 각각 다를지라도 의미는 하나의 의미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에 대한 근본 뜻을 공부하고 그 것에 관심을 갖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통 입으로는 그럴 듯하게 하는데 행동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기도 습관입니다.
기도 할 때 기도 단어 한마디 한마디가 아주 중요합니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할 때 그 산스크리트 말로 붓다는 티벳말로 쌍게라고 하는데 안으로 들어간다라고 하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삼귀의 할 때 이 붓다의 근본 의미를 알고 기도해야 참으로 바른 기도가 되겠습니다.
우리가 삼보에 귀의합니다라고 할 때 어느 보가 가장 우리와 밀접하고 가까운 보인가, 부처가 된다는 것은 어떤 원인과 이유를 통해서 부처가 되겠습니까. 법을 근거로 해서 부처가 되었고 법을 근거로 해서 승단이 모여있습니다. 부처의 법륜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단체가 승보입니다.
우선 우리는 법을 중요시하고 공부하여야만 궁극의 지혜에 도달할 수 있고 이것을 통해서 지혜가 익고 익으면 무학도의 경지에 들어갑니다. 완전히 정화되고 완전히 배워 완전해질 때 그 때를 무학도의 경지라고 하지만 여기가 부처입니다.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것과 지혜라는 단어를 잘 살펴볼 때 모든 중생을 가르치고 해탈시킬 수 있는 그 경지가 바로 부처의 경지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티벳말로 템빠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뭘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법을 보여주시고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다음 승보는 도반인데 우리가 살아가고 수행해 가면서 버리고 취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법을 티벳어로는 최라고 하고 산스크리트어로는 다르마라고 하는데 무언가를 지닌다는 뜻이 있습니다.
지니는 근본 뜻을 잘 지켰을 때 나쁜 업이 되지 않는데 근본과 맞지 않는 어떤 행위는 부정적인 업이 됩니다.
우리가 삼보에 귀의하고 수행하면서 처음부터 부처님의 공부는 너무 어려워 하면서 자포자기 하는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입니다. 뭐든지 한 걸음부터 하듯이 부처의 깨달음에 갈 때까지는 한걸음수행으로 점차적으로 가야합니다.
공덕을 쌓아야 하고 자량을 쌓아야만 하며
보살도의 길이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스님들은 큰 복전이 되어 일반인들에게 모범을 보여야만 합니다. 바로 법의 근본 뜻을 잘 지녀 스님들의 그 모범을 보면서 스님들과 함께 하는 것이 맞습니다. 삼보의 하나의 일원으로서의 스님들이 바르지 못한 것을 가진다면 밑에서 따르는 사람들은 큰 실망을 하게 되며 참 법우가 되지 못한다는 모순점을 갖게 됩니다.
스님의 역할은 신도가 공부를 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아주 중요한 조정자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초발심자격문에 보면 '선지 지범개차니라' 하는 말이 나옵니다. 불교에서 대치법은 기도에는 없습니다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증오나 원한을 많이 가지고 살아갑니다. 증오나 원한은 나라는 자존심에서 출발하는데 이것을 버리는 법으로서의 대치법은 나, 시기심, 질투심을 버리는 방법으로 자비 사랑 선한 행위가 있습니다.
진정한 선한 행위에는 나라는 자존심이 없습니다.
내가 없는 자리는 보리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시기 질투 등 나쁜 생각이 일어날 때 보리심으로 대치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성제에서 고통의 원인을 없애는 근본 길입니다.
원인이 나쁘면 결과도 나쁩니다. 고통의 원인을 없애는 대치법이 생각으로는 잘 되지 않고 행동으로만 되는데 이것은 깜깜할 때 등불을 켜야하는 것과 같습니다.
구체적인 대치법으로 이를테면 시기심 자만심을 없애려는 것으로서 불법에서는 수희찬탄이 있는데 그런 마음으로 구체적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런 대치법으로 부처님께서는 고집멸도 사성제를 설하신 것입니다.
사성제에 대해 말하면 고통이 집제인데 이 집착에서 생기는 고도 세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고고가 있는데 근본 자체의 고통을 말합니다.
둘째, 낙고가 있는데 잠시 행복한데 나중에 고통의 원인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천상계의 중생들은 천안통이 있는데 인생이 잠깐 행복한 것 같지만 복진타락으로 자신들이 복이 다하고 나면 고통스러운 세계로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괴로워합니다. 집착이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이 낙고입니다.
세 번째 행고가 있는데 어쩔 수 없이 오온이 없어지는 고통을 행고라고 합니다.
이런 고통의 인은 어디에서 오느냐 그 근본을 알면 탐진치 삼독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근원은 본성을 알지 못하는 무명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 밝지 못한 무명을 거둬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 5독 번뇌인 번뇌장과 집착이 떨어지지 않고 삿된 견해나 미세한 번뇌를 갖고 있는 소지장이 다 해야 하고 그래야 우리의 본래 부처의 참 본성이 드러나는 것이고 수행의 힘을 얻어 그 때 우리는 불퇴전의 지위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는 자량을 충분히 쌓고 그 힘이 구족되었을 때 가행정진을 할 수 있고 그 정진력을 통해서 실제적인 견도에 올라 생각뿐만이 아닌 원력이나 말뿐만이 아닌 도의 길을 실질적 수행과 구체적 실천으로 가게 되어 드디어 부처님이 보여주신 멸제가 되어 원만한 성불의 지위까지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고집멸도라는 사성제의 부처님법을 의지해서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으로 갈 수 있는 것이고 그 열반의 법에 귀의하여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을 성취할 수 있는 그런 가르침에 의지해 공부를 해야 하는데 그 고통이 없는 행복의 언덕을 열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열반은 공성에 의지해야 하는데 그 공성은 나가 없는 인무아(?)와 법도 없는 법무아에 의지해 해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 의지해도 어느 정도 깨달음에 이를 수는 있지만
이 공성을 의지한 구경해탈의 깨달음을 주신 불교만이 완벽한 구경해탈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마음으로 삼보님께 귀의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의 내용을 요점만 세가지로 추려보면 제행무상, 연기에 의한 공성을 이야기한 제법무아, 열반적정인데 이 세가지가 반야경에 설해져 있으며 그 요점이 바로 반야심경입니다.
그 안에는 부처님의 공성의 내용을 연기법에 의해서 설해 놓았는데
부처님의 근본 정신은 이 연기법에 의한 공성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있어서 저것도 있지만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기 때문에 본래 모든 것은 원래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가자가자 열반의 언덕으로 가자 하는 뜻은 윤회계와 세간의 모든 고통을 여의는 행복과 열반으로 가자는 것인데 많은 법을 듣고 자량을 쌓아 연기와 공성을 이해한 후 가행정진력에 힘 입어 열심히 정진을 했을 때 처음 공성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
그 공성을 깨닫는 견도의 지위에서 수행을 끊임없이 했을 때 수도의 지위에 오르게 되어 마지막에 원만한 불과를 증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야심경에 보면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오온이 다 공한 것을 보고나서 모든 고통의 인을 여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빈 것이냐, 여기서 오온이 공한 것을 알았다 했는데 오온은 근본적으로 청정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본성 자체는 근본이 청정한 것입니다. 우리가 연을 의지해서 있다면 하나가 혼자 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의지해서 있기 때문에 거꾸로 모두 부정을 해 보면 근본적으로 공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이루고 있는 색수상행식 그 모두의 공성을 깨달으니까 집착할 것이 없게 되며 모두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에 의해 일어났더라를 알게 되니 고통의 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법이 본질 자체가 공하다는 것을 연기에 의해 알게 된 것인데 색이 공하다는 것을 알고 나니까 수가 공하고 수가 공하다는 것을 알고 나니까 상이 공하고 상이 공하다는 것을 알고 나니까 행이 공하고 행이 공하다는 것을 알고 나니까 식이 공하더라 그래서 전부 없는 것이다라고 되는 것입니다.
모든 법이 진제와 속제에 의지하는데 우리가 공성을 알아야 완전한 지위에 오릅니다.
용수보살도 말씀하셨는데 성문, 연각, 벽지불, 보살불 부처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공성을 알게 되면 모든 현상에 속임을 당하지 않게 되고 현실에 매하지 않게 되는 것이며 공성의 진리를 깊이 사유해서 수행을 했을 때 성불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불의 경지라고 하는 것은 번뇌장과 소지장을 완전히 여읜 경계를 말하는 것인데
이 성불은 보리심과 공성이 생명입니다.
이것은 대승불자의 생명과 같은 것인데
소승 대승이 다르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이 보리심에 있습니다.
보리심을 근거로 해서 공성을 깨달았을 때 대승의 행자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승의 보살도는 보리심과 공성의 기초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럼 이 대승의 두가지 요점을 어떤 단계를 밟아 깨달을 것인가 경전을 많이 보고 법문을 많이 들은 다음 생각을 많이 해야 합니다.
아 정말로 그렇겠구나, 그것이 성불의 뿌리구나 확신을 갖은 다음에 수행을 통해 반복하여 수행의 경험을 통해 느끼게 되고 더욱 확신이 서 어느날 공성을 보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무학의 지위에 오르게 되는 것인데 무학의 지위 이전에는 모두 유학입니다.
그럼 보리심은 어떻게 일깨울 것인가?
중생에 대한 대자대비심, 일체중생이 나의 어머니라는 것을 사유하고 알아서
그 고통을 없애주겠다는 원력을 세워야 합니다.
나의 능력이 없는데 어떻게 중생의 고통을 없앨 것인가?
먼저 나의 능력성취를 해야하는데 윤회의 고통의 본질을 알아 수행을 해야겠다는 염리심을 내야 합니다.
이렇게 자신이 먼저 해탈을 하고 나서 중생을 해탈케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럼 공성은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
중도 사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부처님이 가르침을 준 것이 유식사상입니다.
이 유식사상은 마음을 미세하게 분석해 놓은 것인데 그것을 통해 공성을 알 수 있습니다. 티벳은 사실상 대승에서 금강승으로 넘어간 불교인데 소승 대승 금강승의 가르침을 총 망라하고 있는 불교입니다.
그럼 공성을 사유할 수 있는 사구게를 말해보겠습니다.
<모든 법이 인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이 없으므로
그것이 바로 공성이다.
인연은 연기에 의해 일어난 것이므로
그것을 바로 중도라 한다.
연기에 의하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그것을 바로 공성이라 한다>
보리심을 일으키는 사구게는
<일체중생들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불법승 삼보에 보리의 정각을 이룰 때까지 제가 항상 귀의하여
지혜와 자비를 가지고 일체중생을 위해 열심히 정진해서
모든 불보살님전에 원만한 보리를 성취할 수 있는 보리심을 일으키겠습니다>
이 보리심과 공성의 게송들을 매일매일 반복해서 보고 보리심과 공성을 의지해 깨달음의 경계를 갈수록 증장시키고 안정되게 해야 하는데 금강승은 이렇게 기초하고 있으면서도 방편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금강승의 보리심과 공성의 기초 위에 방편과 지혜가 하나인 수행을 하고 있는데 육바라밀을 통한 모든 수행은 일체중생이 다 성불하기를 기원하는 것으로 회향을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금강승 즉 밀교란 지혜와 복덕자량이 구족한 수승한 근기를 가진 사람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금강승 수행을 하려면 반드시 관정이라는 의식을 거쳐야만 합니다.
오늘 관정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일체중생에게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이 구족되어 있다는 것인데 부처의 네가지 몸, 법신, 화신, 보신, 법계 최상신 이 4 신의 종자를 다 갖추고 있는데 무시이래로 태양이 구름에 가려있듯이 무명에 의해 보이지 않는 것인데 관정이라는 의식을 통해 법신을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가피는 어떻게 오는 것이냐, 간절히 청하고 성불을 해야겠다는 원력을 세워서 간절한 원력과 가피가 하나가 됐을 때 내 안에 있는 4신을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가피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관정의식이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정을 주기 전에 반드시 전행이 있습니다. 그것을 예비 수습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먼저 스승님께서 관세음보살을 청하는 기도를 통해서 스승이 육신의 모습을 지닌 중생의 몸이 아닌 불보살이 되는 의식을 해야 합니다.
여기 이 금강저는 본존, 즉 관음의 형상으로 관상을 해야 합니다.
여기 요령은 공성의 지견으로 관상을 하고 이 금강저와 요령은 지혜와 방편이 하나인 상징으로 보는 것입니다.
스승님께서는 천수천안의 모습을 나투고 계신다고 관상을 합니다. 우리가 있는 모든 땅을 정화해서 관세음보살님의 궁전과 정토로 관상을 하고 그래서 실지로 여기 만다라가 모셔진 것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은 천수천안을 나투신 모습이고 사방에는 오방불이 계시다고 관상을 하는데 여기 지금 왼쪽에는 티벳의 관세음보살님 탕카가 있고 오른쪽에는 한국의 관세음보살님 탕카가 모셔져 있습니다. 지금은 먼저 모든 업장과 장애를 몰아내는 기도를 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도와 함께 나의 검은 업장이 다 밖으로 나가 없어졌다고 관상을 합니다.
----기도 --- 만다라 공양 올림----
기도문
모든 부처님이 지극히 찬탄하시는 청정한 공덕 모두 쌓으신
'관세음'이라고 이름 불리는 항상 자비하심에 절하옵니다.
대지에 향을 바르고 꽃을 뿌리어 수미산과 사부주, 해와 달로 장엄하여
부처님 회상을 관상하며 이 만달라를 올립나니
모든 중생이 청정국토에서 이 즐거움을 누리게 하소서
-----
나가르쥬나가 지은 육중론(?)을 보면 대자대비가 가장 중요합니다. 관세음보살님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투시는데 여기서는 천수천안 관세음보살님으로 나투시며 이 관정법은 인도의 켈루마 팔모라는 비구니 스님에 의해 처음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의 만다라를 만드는데 있어서도 돌가루에 색칠을 하는 것과 천 위에 그려하는 것이 있는데 여기서 오늘 관정의식에 사용하는 만달라는 천으로 만든 것인데 만달라 위에 본존을 관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금 관정을 청하는 발심 동기가 아주 중요합니다.
어떤 동기를 갖고 한 것이냐, 자신만의 행복, 명예, 현실이익을 위하여 관정을 청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일체 중생들을 다 고통속에서 벗어나게 하여 해탈시키겠다는 동기를 가지고 관정을 청해야 합니다.
앞에 계시는 구루가 관세음보살님이시다 하는 마음으로 관정을 청해야 합니다.
일체중생들이 다 행복하기 위해, 다 성불하기 위해 관정을 받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제자들도 스스로 본존이라는 관상을 합니다. 본존을 관상하기 그 이전에 모든 것이 공하다는 공성을 관합니다.
그래서 관정을 청하는 나라는 것이 자세히 생각해 보면 몸에 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하는 것에 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그 어디에도 내가 없는 것입니다.
아프다고 느끼는 이놈이 나인가, 듣고 생각하는 이놈이 나인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이놈이 나인가
자세히 따져보면 나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나다라고 생각을 할 때도 내가 있는 것은 아니며 내가 나라고 생각 안할 때에도 내가 없는 것은 아니여서 나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내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생각하지만 나라는 것도 그 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색수상행미촉법안이비설신의 그 어디에도 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하는 거기에 내가 있느냐 하지만 깊이 죽은 듯이 잘 때에는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생각하는 식, 알음알이에 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망상분별을 일으키는 마음에도 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망상분별을 끊고 막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나라는 생각 나라는 것을 없애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
망상분별은 잠깐 동안 임시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는 생각은 처음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는 것은 처음부터도 없었던 것이고 부처가 된 다음에도 없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은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나라는 것이 없다면 중생일 때에도 나라는 것이 없는데 누가 부처가 될 것인가
나라는 것이 없는데 중생도 부처도 본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없으므로 물론 오온도 없는 것이고 육근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없다고 해서 사실상 내가 없느냐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받는 나도 있고 열반에 가고자 하는 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의지해서 내가 있는가?
모든 것이 연기에 의지해서 인연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것인데 나라는 것도 인연에 의해 임시로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있는데 현재에 의지해서 과거가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망상분별을 일으킬 때 가만히 보면 현재에 의지한 과거와 미래의 생각을 끊임없이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으므로 찰나를 의지해서 선정삼매를 닦는 수행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 자체가 연기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바르게 알고 본래 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체 법이 본래 연기에 의해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제법이 본래 자성이 없는 것이며
나라는 것도 연기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지 본래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원래 육신의 내가 없는 나에서 관세음보살님이 생겨났다 관상하는 것입니다.
아주 장엄한 관세음보살님 모습이 생겨났다 관상하십시오.
내가 본래 없다는 관상이 확실하게 되면 육신의 모습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육신을 의지한 나라는 생각이 아닌 청정하고 원만한 관음으로서의 나라는 생각을 일으켜야 합니다.
과거의 부처님도 나를 의지해서 성불하셨고 미래의 부처님도 나를 의지해서 성불하셨기 때문에
오늘의 나도 나를 의지해서 부처님이 되겠다고 관상하는 것입니다.
보살계는 내일 받기로 하고 오늘은 보리심계만 받겠습니다.
내 눈 앞에 불보살들이 가득히 모여계신다고 관상합니다.
모든 티벳과 한국의 큰 스님들이 스승님 주위로 다 모여계셔서 우리들이 보리심을 발하는 귀의를 하고 일체중생을 다 해탈시키겠다는 원력을 내는 모습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를 보고 계신다고 관상하십시오
기도문 세 번
<중생들을 해탈시키려는 생각으로 부처님과 정법과 스님들께
깨달음의 정수에 이를 때까지 항상 저는 귀의합니다.
지혜와 자비와 함께 저는 정진으로 중생을 위해
부처님전에 항상 머물러 완전한 보리심을 일깨우도록 하오리다>
제가 하얀 소라의 물을 튕길 때마다 그 물을 내 이마에 가피하고 목에 가피하고 가슴에 가피해서 내 이마에서는 흰빛이 나오고 내 목에서는 붉은 빛이 나오고 내 가슴에선 남색빛이 나와서 내 몸에 가득 찼다고 관상하십시오.
그러면서 내 몸에 있던 병, 모든 장애가 없어졌다고 생각하십시오.
다음은 관세음보살님의 몸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생명의 나무를 심어주는 차례입니다.
지금은 만달라에 치목을 던져주는 예식을 합니다.
우리 모두 대중을 대표해서 방장스님께서 치목을 던져주시겠습니다.
옴 덴자 하사하
옴덴자 하사하
치목이 흰색을 나툰 곳으로 갔답니다.
관세음보살님은 자비의 주존이신데 너무 좋은 인연인 것 같습니다.
다음은 모두에게 감로수를 드릴 것인데 한모금은 뱉고 세 번 나무어 마실 때마다 신구의 삼 없장이 다 정화되었다고 관상을 하십시오. 그리고 지금 관정받는 제자들에게 길상초 큰 것과 작은 것을 하나씩 나누어 드립니다.
큰 것은 침대 앞에 짧은 것은 베개 밑에 놓고 오늘 밤은 망상분별을 하지말고 오로지 보리심과 공성을 생각하면서 관정을 주신 스승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면서 그 기도의 가피를 꿈으로 보아야겠다고 생각을 한 다음에 그 꿈을 인식할 수 있도록 잠자리에 들어야 합니다.
이 길상초의 꿈을 볼 수 있는 만트라가 있는데 ' 옴빼마 딴띠 훔 페'라는 만트라를 하면서 잠이 들면 좋습니다.
그리고 빨간 호신끈을 드립니다.
남자 여자 구분 없이 다 왼손 손목이나 팔뚝에 묶습니다.
이것은 나쁜 장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수희찬탄하는 차례입니다.
스스로 경축하는 환희로운 마음을 일으키는 차례입니다. 불법이 아주 귀한데 만났고 더욱 만나기 어려운 밀법 금강승을 만난 것이 얼마나 기쁜가 반드시 수행하겠다는 마음을 내야 합니다.
고기 계란이나 마늘 파 등 오신채를 먹으면 안되며 모든 계율을 청정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까지 보리심과 공성의 지견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고 그런 마음으로 이 자리에 오시기 바랍니다.
달라이라마 법회 관정수기 법회 첫날 설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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