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와 억압에 빠져 버린 우리]

몇가지 사건을 계기로 의문이 들었고 꿈을 통해서 몇가지 생각이 남아 글을 남깁니다.

많이 알려진 사람의 마인드 컨트롤 프로그램인 MKUltra,나 project Monarch 라는 것이 았습니다.
http://en.wikipedia.org/wiki/Project_MKUltra
http://www.bibliotecapleyades.net/sociopolitica/esp_sociopol_mindcon02.htm

간략히 요약하자면 인간을 수용할수 없는 고통속에 방치하고 기절을 방지하기 위한 약을 공급하면 생존을 위해서 뇌가 만들어내는 2중 인격체를 여러가지 비밀 프로젝트를 목적으로 이용하는 극단적인 기술입니다.

꿈에서 이는 우리사회 우리 주변에 만연해 있다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크고 작은 사건 사고속에서 끊임 없이 트라우마를 일으키게 되고 우리의 뇌는 생존의 상태로 들어갑니다. 이상태에서는 높은 사고는 불가능 하고 오직 생존을 위해서 몸부림 치는 동물 도마뱀 뇌의 상태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 합니다.

유전자가 몸을 지배하지 않는다.
http://beliveman.blogspot.com/2014/02/blog-post_18.html
http://beliveman.blogspot.com/2014/05/blog-post_9.html


우리 주변에서는 어떤 것들이 트라우마를 일으 킬까요?
크게는

BP의 원유 유출사고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마찰
각종 아동 성관련 범죄의 보도
세월호의 침몰과 많은 사람의 희생
살인사건들

작게는

화학약품에 노출된 현대인부터 중국으로 부터오는 미세먼지의 공격


이런 일들이 일으키는 사고는 매우 단순 합니다.
일본을 가면 안되겠네. 일본 음식 안먹어야 겠네, 방사능에 좋다는 미역을 많이 먹어야겠네, 이스라엘 사람 나쁘네, 내아이는 성범죄로부터 보호해야겠네. 수학여행을 정지시켜야 겠네, 배를 타면안되겠네, 이웃을 조심해야겠네, 유기농 제품을 써야겠네, 야외에서는 마스크를 써야겠네 실제로 우리나라 사회에 일어났던 현상들입니다.

언론의 공격과 그에 반응하는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이 너무 당연해 보이시겠지만 양극화의 세상에서는 어떤 방향으로 치우져도 좋을 것은 없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는 것은 그냥 나는 저런 위협 요소로 부터 벗어나야 겠다는 생각 밖에 는 할수 없고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동물에 가까운 지성으로 추락을 합니다. 지배자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양때를 몰아가기에 너무나 좋은 조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양때라는 표현을 썼는지 이해가 되기도 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간디나 Foster gamble (http://beliveman.blogspot.com/2014/05/thrive.html?q=thrive) 씨께서는 비폭력 저항을 추천합니다.

환경적 위협으로 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은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그것이 삶의 목표가 될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위협으로부터 방어하는 삶이 인간이 가진 모든 역량의 결과라는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식주가 해결 되었고 많은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다만 물건을 팔기위해서는 각종 유해성이 강조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반복되면서 사소한 위협에도 과민반응을 합니다. 마치 알르레기나 아토피 피부염과 같습니다.

이러한 자극과 반작용은 쉽게 타인이 본인을 컨트롤 하게 만들어 줍니다. 위협만 가하면 그에 반응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양치기 개가 짖어 대면 양이나 소들은 개들이 이끄는 대로 몰려다닐 뿐입니다.

이러한 작용과 반작용을 통한 억압과 통치는 우리 주변에도 만연해 있습니다.

요즘 한국 사회는 주 5일 근무라는 시대에 돌입했고 근래에 들어서는 마녀사냥, 픽업아티스트등 남녀관계에 대한 부추김이 매우 심한 사회에 와 있습니다. 의식주가 해결된 사람들을 동물적 사고의 상태에 묶어두는 것으로 성적인 것 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물론 필연적인 욕구로 해소되어야 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현대사회는 그것 마저도 자본주의적인 물질적인 행위로 평가절하 시킵니다. 성이라는 것은 가치로써 좋은 집과 좋은차를 가져다주는 댓가성 재화로 전락해 버린 것이 현대 사회입니다. 그리고 화려한 외관과는 달리 일부 부유층만이 그러한 욕구를 충족하고 삽니다.  또한 성적인 부분과 사회 구조는  매우 필연적으로 연결관계를 가집니다.

빌헬름 라이히는 남녀가 충전된 이온을 성행위를 통해 방출하지 못하면 육체적 정신적 질환의 원인이 된다고 말합니다.
http://beliveman.blogspot.com/2013/08/blog-post_20.html?q=%EB%B9%8C%ED%97%AC%EB%A6%84

이러한 작용과 반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남녀관계를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밀당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MKUltra처럼 트라우마를 기반으로 한 기술이라 할수 있습니다. 여러가지 기술들이 있지만 그 저변에는 상대방에게 트라우마를 일으키고 의존성이나 부족함(deficiency)을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는 상대방에게 관심이 있는데 상대방의 의도(밀당) 를 보니 나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보이게 되고 이것의 횟수나 강도가 반복되는 과정에서 심리적인 붕괴가 일어나고 상대방을 잃기 싫은 마음에 의존성이 발생합니다. (억압과 피억압의 빌헬름 라이히를 참조).  결국 서로를 존중하는 이상적인 관계는 없고 억압 사회, 파워정치의 표본인 주종관계를 형성해서 상대방을 억압하고 컨트롤 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현대인들의 사랑이자 픽업 기술이자 밀당인 것입니다. 상호 존중이 없는 관계의 질이라는 것은 진정한 관계의 질을 경험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매우 무가치하게 보입니다만 그런 절대성(이타성)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이런 연인간 억압의 게임 역시도 통치자들이 대중에게 사용하는 것과 많은 부분 닮아 있습니다. 트라우마를 이용합니다. 이별을 통보하거나 불행을 당했다고 말하거나 상대방이 아끼는 것을 없애버려서 본인에게 의존하게 만듭니다. 다른 이성친구를 이용하고 질투심을 유발하는 것도 흔히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강도를 계속 늘려가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마치 평범함 성관계로 만족하지 못하고  페티시를 지나 SM이나 그룹으로 관계를 하지 않으면 흥분이 되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결국에는 킬빌의 배우 처럼,

`킬빌` 캐러딘, 자위행위중 질식사` 쪽에 무게

(http://www.mt.co.kr/view/mtview.php?no=2009061319544476448&ERV2)

산소공급의 차단과 그로인해서 몸에서 분비되는 쾌감과 결부시켜 극단의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일부는 마약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는 상대계의 세상에서 추구하는 욕망의 한계를 잘 나타내는 부분입니다.

강약의 문제이지 보통의 연인들은  본인이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지도 모르고 서로를 억압하기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부부사이도 마찬가지 입니다. 100년가약을 맹세한 부부지만 막상 결혼생활이 시작되고 나면 서로 약점을 잡고 우위에서서 상대방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용하기를 원합니다. 부부, 연인, 직장, 친구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이러한 현상을 보입니다. 본인들은 그러한 세상에 사는지 그러한 행동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그렇기 때문이고 그런것이 스탠다드 이고 그런 것을 구분할 만한 지식도, 의식도, 시간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다만 모를 뿐입니다.  석가 모니부처님께서는 사람들이 알지 못해서 욕망에 사로 잡힌다 하셨고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라고 말씀 하셨는지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이것 역시도 작용과 반작용을 이용합니다. 작용에 대응하는 반작용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 강도를 높이면 됩니다. 강도가 높아지면 상대방에게 트라우마가 생기고 그 효과는 매우 좋습니다.

인간의 몸이 그러하듯 인간의 정신도 면역기능이 있고 외부의 잘못된 침입으로 부터 보호하는 보호막이 있습니다.  건전한 인간의 정신은 선한 것을 바른 것을 숭고한 것을 진정한 사랑을 이타적인 것을 추구하고 이런 상태에 있을때 높은 지성과 의식 발전을 이룰수 있고 삶의 목표를 인식하며 영적인 삶을 살고 삶이 윤택해지게 됩니다.  많이 알려진 것 처럼 스트레스를 받거나, 화를 내거나, 피로하면 사람의 면역기능이 떨어지고 감기나 기타 질병에 잘 걸리듯이  정신이나 의식의 보호막도 그와 비슷하게 작용합니다. 건전한 사람은 쉽게 억압 당하지도 쉽게 누군가에게 의존하지도 않습니다. 연인이나 부부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강력한 충격을 상대방에게 가하면 상대방은 트라우마에 시달립니다. 이를 반복하면 쉽게 그사람의 의식속으로 들어갈수가 있습니다. 쉽게 지배할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서로에게 이런 테러를 가하는 인간관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 남을 생각하고 이타행을 하는 사람은 이제 사회에서는 멍청한 인간이 되어버렸습니다. 좁게는 연인과 친구사이에 크게는 국가간의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납니다.



빙의

이영돈PD, 논리로 풀다 E05,120528,#04 빙의가 귀신들림 자체는 아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TGAlabPl-Y

빙의라는 말은 의존한다는 뜻이다.
앨빈 토플러 권력 이동이라는 책에서 산업혁명이후 여자들까지 페미니즘이라는 의도적인 사조에 등 떠밀려 생산현장으로 나왔고 부부 모두가 생산의 과정에서 정신적 에너지를 소진한 관계로 실제로 아이들과 있을때 육체적으로는 아이의 옆에 있지만 아이가 원하는 정서적인 포만감을 주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현대 사회의 일이라는 것은 예전의 노동력을 쓰는 일과는 달리 정신적인 부담이 매우 커서 집에 돌아 왔을 때에는 아이를 위한 정서적 행위가 불가능 하다고 말한다. 그로인해서 현대에 태어난 아이들은 정서적 결핍에 시달리게 되고 이런 정서적 결핍은 화학물질이 가득든 음식, 소비재, 섹스와 같은  물질적인 것들로 채워 넣게 되어서 소비활동이 촉진된다고 한다. 자본주의 시대에 많은 물질의 소비만큼 더 좋은 미덕이 어디 있겠는가? 지배자의 측면에서 보자면 가장 억압하기, 통치하기, 세뇌하기 좋은 대상인 것이다. 이런 결핍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이성을 자신의 억압내에 둬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질투나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것 만큼 좋은 것이 없다. 그리고 한명의 이성이 아니라 다수의 이성으로부터 부모로 부터 받지 못한 정서적 사랑을 충족 받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정서적 충족을 줄수 있는 이타적인 사랑을 가진 사랑은 없고 서로를 굴복시키기 위한 전쟁이 시작된다. 이타성을 가진 수준에 가있는 존재는 그와 비슷한 이성을 찾게 된다.

어떻게 할 것인가?
명상을 통해 오염되지 않은 하나님, 참나, 아뇩다라삼막삼보리, 청정법신, 대일여래의 기운을 받는다.

초심자와 숙련자 모두에게 명상을 통해 스스로를 청정하게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인간이 만든  물질 문명을 떠나 산과 자연 바다에 몸을 담그면 그와 비슷해진다. 휴대폰, 컴퓨터와 상업적인 일들로 부터 멀어져 자연과 친하게 지내자.

상대를 억압하려 하지 말고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를 존중해준다. 억압의 말과 버릇이 몸에 배여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어떠한 말이라도 부정적인 말은 삼가한다. 대부분 부정적임 협박을 통해 억압을 실행한다.

모든일을 행함에 있어 나를 위하지 말고 상대방을 위해서 한다.

상대방의 억압에 반응하지 말고 호불호를 내세우지 말자.

기도하고 명상하지 않는 사람은 이고가 강하고 스스로 오염된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바꾸는 것이 힘들수도 있다. 상대를 바꾸려 하지 말고 (반작용이 일어나므로) 제도 할수도 없고 스스로 개선을 할수 없는 존재로 부터는 자신을 격리하는 것이 최선이다. 예수님이나 불보살이라 할지라도 개인의 자유의지가 선한길로 인도하는 것에 우선한다.
스스로 자신이 상대를 제도 가능하다 과대평가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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