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유항마편 2013, journeys to the west conquering the demons, 주성치 을보고 ]


주성치 영화 서유 항마편을 다시보게 되었다.

처음 볼때 보다 더 많은 부분이 와 닿았다.




두서 없이 정리해 보자면


우리가 수련자이거나 혹은 일반인이거나 본인의 이익에 부응하면 선이라 말하고 그렇지 못하면 악이라 하여 저항하고 이익을 위하여 그것과 싸우기 마다하지 않는다. 영화의 초기에도 무지해 보이는 어민들이 악이라 하여 무조건 죽이고 파괴하는 우매한 상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현장이 충분히 그것들을 제도할 힘이 되지는 못하지만 인간 내면에 있는 "진선미" 를 깨우쳐 제도를 할려고 한다는 점이 불교의 기본 사상인 여래장 사상, 인간 모두에게는 불성이 있다, 라는 것과 일치한 장면이다.

종종 사회가 모두 악하게 경쟁하는데 어찌 나만 뒤떨어질수 있으냐 라는 생각과 맞추어 생각해볼만하다.

돼지고기를 파는 가게에서 욕심에 눈이 먼이의 눈에는 저팔게의 삼지창이 멋진 촛대로 인육을 굽는 것이 맛있는 돼지고기로 보이는 장면이 속인들이 즐기는 것들에 독이 있음을 빗댄 멋진 표현 같았다. 반면 적은 욕망을 가진 현장의 눈에는 그것들의 실체가 보인다.

또한 돼지고기를 파는 장면에서 나오는 두 남녀는 범인들이 하는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아이러니 하게도 현장은 그런 사랑을 거부하여 나중에 후회를 하게 된다. 영화의 말미에 모든 사랑이 같다하여 모든 화현된 색계와 욕계가 청정법신에 뿌리를 둔 화현 인 것을 깨닫게 된다.




몸을 던져 현장을 보호하던 
>딱걸렸어 이래도 날 사랑하지 않나요?
사랑했어요. 처음 본 순간부터 그대를 사랑했어요.
>얼마나 사랑해요? 
아주 많이 사랑했어요. 그대를 보고 싶었어요.
>언제까지? 
천년 만년
>만년은 너무 길어 이순간만이라도 사랑해줘

많은 그루들이 미래와 과거에 의식을 두지 말고 현재에 의식을 두라는 것과 일치한다. 호흡수련시 들숨과 날숨에 의식을 두는 것은 현재에 의식을 붙잡아 두기 위함이고 티벳의 일부 종파에서는 명상시 실눈을 뜨고 앞을 쳐다보라고 시킨다. 이는 의식이 현실과 동떨어져 다른 차원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 한다. 현실은 법신의 표현이자 법신 그자체임으로 비판과 저항의 대상은 아니다.


손오공이 시체를 하늘로 올리고 빛의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
"손오공: 이봐 내가 자네 애인을 털 한가닥 안 남기고 저렇게 죽게 만들었는데 자네 그 부처님은 자네한테 뭘 해줬나?"


금강경에서 세존께서 전생의 인욕선인 시절이야기를 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꼈다. 질투에 눈이 먼 왕이 팔다리를 모두 잘라도 인욕선인은 화를 내지 않으셨다.

그 빛을 보고 있는 보습이 마치 정광명을 현장이 보는것 같다.

그리고는 각종 마귀와 악을 제도 하는 데 사용하라고 스승이 주었던 동요 300수의 새로운 발견이 일어난다, 동요로만 느껴졌던 (이해할수 없었던) 동요 삼백수가 대일여래 진경으로 바뀌어 있다. 대일여래진경은 갈기 갈기 찢어진것을 붙여 놓은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이는 영화의 말미에 나오는 스승과의 대화에서 의미가 유추가 가능하다. 중생의 고통과 사랑을 알고 경험하고 나서야 그 의미를 알고 감정을 다스릴수 있다는 내용같다.

또한 이는 과를 수행방편으로 여기는 밀교와 일맥상통한다 하겠다. 대일경을 언급한 것 역시 주성치가 밀교적 의미를 담았다 할수 있다.





무상요가 수행에서 발췌
http://www.sachal.net/v1/bbs/board.php?bo_table=maeum_10&wr_id=143

첫 번째 문자적인 의미(Tshig gi tshul, 文字方式)는 문자 그대로 드러나 있기 때문에 문장에 대한 문법적 구조와 어휘의 기본 뜻만을 가지고도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반면에 두 번째 일반적인 의미(Phyi\'i tshul, 外現方式)는 일반적인 선정 수행과 하급 딴뜨라의 차원에서도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일반적인(外現)’이라는 말은 일반적인 함축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세 번째 감춰진 의미(sBas pa\'i tshul, 內在方式)에는 다시 세 가지 유형이 있는데, 각각 (1) 욕망을 취하여 깨달음의 길로 전환하는 감춰진 방법, (2) 명백광(明白光) 증적광(增赤光) 득현광(得玄光)과 같이 감춰진 현상, (3) 환신(幻身)과 같이 감춰진 세속적 진리(俗諦)를 말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무상요가에서는 가장 중요한 지식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하급 딴뜨라에는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으며, 단지 감춰진 방식으로만 암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네 번째 궁극적인 의미(Don dam pa\'i tshul, 勝義方式)에서 말하는 ‘궁극적인(勝義)’라는 말은 정광명 그리고 무상요가의 모든 수행과 경전의 궁극적인 대상들의 심오한 합일을 의미합니다. 



대일여래 진경은 아마 대일경이 아닐까 추측하는데 이는 밀교수련의 방편이 적혀져 있는 책자이다. 현장이 그 책을 통해 수행을 하고 깨닳음을 얻음을 나타내는 것 같다. 위에 적은 글과 같이 경전의 미묘한 뜻은 처음에는 동요처럼 느껴질수 있으나 그 깊은 이해를 하기위해서는 많은 수련과 높은 수행경지를 요구하기 때문에 감독이 동요300 수라는 형태로 표현을 한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유난히 원숭이 캐릭터를 한 손오공이 눈에 띄었다.  원숭이라는 캐릭터가 힘은 좋지만 성질이 급하고 폭력적이며 잘 제도 되지 못하는 부분이 인간을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누나키들이 금을 캐기위해 붉은꼬리 원숭이, Rhesus 원숭이의 육신을 바꾸어서 인간을 유전자 조작해서 탄생시켰으나 아직 동물성을 버리지 못하고 서로 싸우고 경쟁하는 성질을 가진 다루기 힘든 인간과 닮은 것 같았다. 필립 k 딕의 원작을 영화로 한 the adjustment bureau 2011,

http://beliveman.blogspot.com/2013/09/the-adjustment-bureau-2011.html?q=Adjustment+bureau

에서도 천사들이 인간들의 자립에 맡겼으나 전쟁과 폭력을 일삼아 적극적인 개입을 하기로 했다는 부분과도 비슷한다.


성경의 바빌론 이야기나, 이 영화중 손오공이 천상계를 어지럽혀 갇히게 되었다는 부분이 다른 상위의 존재들과 마찰 혹은 그들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하고 인류의 생멸을 반복해야만 하는 현인류를 나타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에 부처님의 힘에 제도 받고 나서야 지성인으로 거듭나서 복음(경전)을 전파하는 일에 동참하는 부분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스승으로 나오는 스님의 코믹하고 인자한 모습이 거만하고 독선적인 현대 종교 지도자들과 달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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