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perfume 을 다시보고 ]




영화 perfume 을 다시보고 몇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서양 감독임에도 12가지 순결한 처녀의 향기?를 모으는 과정이 색신의 성취를 나타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인공, 그르누이는 본인의 향기기가 없다는 공을 체험하고 이후 12가지의 색신을 성취해서 사람들의 열망의 대상인 angel 이자 죽인 여자의 아버지로 부터 my son 이라는 불림 받는, 통합된 의식이 됩니다. 사람들의 합일된 또한 진화된 의식에 대한 열망으로 남녀간 양극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마지막 과정이 스펙타클합니다.




또한 마지막 장면인 자신이 태어난 거리의  노숙자들에게 육신이 먹히는 장면은 색신을 성취한후 공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과 블랙홀로 빨려들어 통합되었던 의식이 화이트홀을 통과 하면서 넓게 퍼지는 것 처럼. 다음차원의  개체분화 일으키는 장면을 걸인들이 그루누이를 먹기끼위해 원을 그리며 모여드는 장면과 원을 그리며 흩어지는 장면으로 묘사되는 것 같았습니다. 본인이 태어난 장소로 돌아왔다는 것 또한 자장이 같은 지점을 통과하면서 통합과 분화가 반복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 했습니다.

이번에는 처음 그루누이가 시장 구경을 나올때 나온 장면인 푸른 네이비 블루 색의 천이 나중에 가장 마지막에 성취되는 여인이 입고 나온 옷의 천이라는 점과 마지막 색신의 성취를 이루고 사형장에 입고나온 푸른색 옷이 눈에 띄게 보였습니다. 여러가지 의미하는 바가 많은 듯합니다. 

또한 아래의 색신성취와 관련한 설법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달라이마라 밀교 설법 10편에서

(1) 색신은 꼭 관해야 하는가

금강승은 과(果)로써 도를 삼는다. 곧 금강승은 과위(果位)에 수순하여 수행의 길을 닦아나가는 것이다. 바라밀다승과 금강승은 다 법신(法身)에 수순하여 수행하는 길을 닦지만, 금강승이 바라밀다승에 비하여 수승하다고 하는 까닭은, 금강승이 인지(因地)에서부터 본존불의 색신에 수순하여 수행하기 때문이다.
이 색신에 수순하는 수행에 대해 어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일으켜 질문을 하곤 한다. "부처가 되고자 할 때 색신을 관상해야 한다면 전륜성왕의 장엄한 상호를 얻고자 할 때는 반드시 그 모습을 관상하며 수행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어떤 불과를 얻기 위해 그 색신을 수순하여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어째서 불과가 그 색신을 수순하지 않으면 성취하기 어렵다고 말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바라밀다승에 의하면, 색신은 복덕을 쌓아 성취되는 것이다. 제8지에 오른 보살은 부처의 몸과 비슷한 상호를 가진, 의생신(意生身)을 얻게 된다. 이 의생신이 생긴 인연으로 자신의 무명 습기가 자취를 감추고, 이 의생신을 이용하여 미묘한 무루의 원력을 성취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의생신이 차츰 향상되어 마침내 불과의 색신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라밀다승에서는 오직 복덕을 구족함만을 말하지 않으며, 또 성불할 때 얻은 색신이 과거에 이미 있었던 몸을 의지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교이든 밀교이든 다 부처의 색신상을 성취하는 것은 필수이고, 그래야만 비로소 불과를 증득할 수 있다고 한다.
무상요가부에서 설한 바에 의하면, 일등 수행자는 한 생만에 이 몸을 가지고 성불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 수행자는 이 생에 모든 장엄한 상호의 몸을 구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색신을 관하는 수행으로 이 색신을 성취해야 한다. 물론 이 생에 부처의 색신을 구족하지 못했다고 하여 성불의 행상(行相)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성불의 행상은 그가 다른 인연을 쌓아 전륜성왕이나 축생. 아귀. 지옥 중생의 행상(行相)을 받는 것이 결정되는 것과는 같지가 않다.
자신과 본존이 하나라는 것을 관상 수행하는 것은 바로 불공(不共)의 인과 비슷한 것이다. 만약 공성만을 수행하고 방편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단지 비교적 낮은 소승의 아라한과를 증득할 수 있을 뿐이다. 원만한 불과인 구경의 성취를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색신을 관하는 본존 요가를 수행해야 한다. 오직 여덟 가지 싯디 등의 공통적인 성취만을 얻고자 하더라도 반드시 자신의 몸을 본존의 상으로 선명하게 관상하여 나타낼 수 있어야 하고, 본존으로써의 견고한 불만(佛慢)을 일으켜야 한다. 실로 본존을 관상하는 수행이 없다면 밀종의 길도 없으며, 이것이 바로 밀종 수행의 정수이다.
자신을 본존의 상을 구족한 모습으로 관상하는 것이 비록 어린아이들 장난 같아서, 마치 아이에게 어떤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주어 환상을 일으키게 하는 것과 같이 보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관법에 다시 공관(空觀)을 보충하고, 이타의 발심과 그 구하는 목적에 대한 이해를 더한다면 바로 마음을 닦는 수행의 비결이 되는 것이다. 수행자가 이러한 이치를 의지해서 스스로를 본존으로 관하여 불만을 확고하게 일으키고, 또한 재앙을 소멸하는 식법(息法) 등의 수행을 함께 닦게 되면 훗날 반드시 불과를 증득하게 된다. 오직 비밀한 진언만을 독송하는 것과 색신을 관상하여 본존요가의 만트라에 안주하는 것은 그 효용이 다르다. 어쩌면 장래에 한 과학자가 이 차이점에 대해 해석을 해 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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