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도 권력도 명예도 우습게 본 백남준

돈도 권력도 명예도 우습게 본 백남준

http://media.daum.net/culture/others/newsview?newsid=20151215162206713



워싱턴에 있는 미국 스미소니언미술관 수석큐레이터 '존 핸하르트'는 "아이폰은 백남준의 아이디어다"라고 말했다. 백남준은 1984년 '굿모닝 미스터오웰'과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전자초고속도로'에서 '인터넷'과 'SNS'시대를 예고했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우리 모두는 백남준의 은하계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 기자 말
하나, 자신감 넘치는 세계적 발언,열등감 제로인간 백남준
백남준은 30살에 플럭서스 창시자인 친구 '마치우나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황색재앙은 바로 나다(1962)"라고 했고, 60살에 "세계(서구)역사는 우리에게 그 규칙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그 규칙을 바꾸라고 가르쳐준다(1992)"라고 했다. 이는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세계적 발언이다. 이중에서도 서른에 한 백남준의 '황화론'은 더욱 인상적이다.

 세종문화회관(미술관)에서 열리는 '백남준 그루브_흥(興)'전 미술관에 게시된 대형사진으로 "황색재앙, 그것이 바로 나다"라는 글씨가 뚜렷하게 보인다
ⓒ 김형순
'황색재앙', 이것은 13세기 초 유럽인이 몽골로부터 침공을 당하면서 받은 공포감을 뜻한다. '바로 나다' 이건 "국가는 바로 나다"라는 루이 14세의 말에서 온 것으로 영어· 프랑스어를 합성해 "짐은 황화[黃禍]다(Yellow peril c'est moi)"라고 패러디한 것이다.
백남준 그가 문화 황제가 되어 전 세계를 쓸어버리겠다는 소린데 이 말을 듣는 순간 내 온몸에 전율이 왔다. 백남준은 실제 30년 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함으로써 이 말을 실현했다. 그는 확실히 그 이전 누구와도 비교가 안 되는 인간이다.
그런데 그 이유도 있었다. 백남준 집안은 당대 최초의 재벌이었다. 동대문 창신동 저택이 3천 평이나 되었고 한국에 캐딜락이 2대 밖에 없을 때 집에 1대가 있었고 차 수리공만 10명이나 되었다. 부친 백낙승씨는 1920년대부터 천대이상의 방직기를 갖춘 '태창방직'의 최고경영자로 일본 메이지와 니혼 대학 상대와 법대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그의 부친의 여권번호가 6번이고, 백남준이 7번이었으니 그렇다면 당시 대통령, 국민총리, 장관급 다음 순위이지 않은가 싶다. 대단하다. 그의 조부 백윤수씨 역시 당시 포목점 중 과반이상을 독점하는 거상이었고 조선말기 왕실에 비단과 장례옷감 등을 댔다.
백남준은 유럽에 유학 가서 이미 한국에서 다 배웠기 때문에 여기서 더 배운 것이 없다고 했는데 그게 가능했던 건 1945년 해방기 경기중학교에 다닐 때 집에 일본 판 '세계문학전집'이나 '세계사상전집' 등이 많았나보다. 그걸 다수 읽은 것 같다.
그가 독서광이라는 건 1995년 소설가 김훈과 한 인터뷰에서도 알 수 있다. 김훈은 백남준에게 모국어로 쓴 책을 어디까지 읽었냐고 묻자 그는 '이태준, 정지용, 유진오, 한설야, 박태준, 김기림'을 읽었다고 했다. 그중 정지용이 단연코 최고라고 했다. 그의 비주얼한 언어와 상징적 의미가 담긴 날카롭고 가파른 언어구사에 매료됐다는 것이다.
17살에 한반도를 떠난 백남준이지만 그가 생각하는 한국의 기원은 아주 먼 곳 페루까지 올라단다. 그는 또 '조선', '만주', '몽골', '터키', '헝가리(훈족)', '핀란드'는 말 타는 습관 등으로 볼 때 3천 년 전엔 우리와 한 혈통이라고 봤다. E. 데커, 리비어가 저술한 백남준 연구서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에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백남준 I '피버 옵틱'(Phiber Optik) 6개 모니터 높이 2m 1995년 작. 1993년 '전자초고속도로'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지구촌 노마드 전사의 모습으로 분신한 로봇이 오토바이에 TV6대를 싣고 질주하는 모습이 익살맞고 우스꽝스럽다. 아래는 백남준이 고지도에 그린 한국의 유래
ⓒ 김형순
"선사시대, 우랄알타이족의 사냥꾼인 우리는 말을 타고 시베리아에서 페루(잉카), 한국, 네팔, 라플란드(핀란드)까지 세계를 누볐고, 그들은 농업중심의 중국사회처럼 중앙에 집착하지 않았고 몽골처럼 더 멀리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나 새 지평을 봤다." - 백남준
한국은 고대로 올라가면 '환국(桓國)'이었다. 그리고 한반도와 북아메리카 인디언, 멕시코 아스텍문명과 마야문명 그리고 잉카(페루)문명과 연결해서 본 것은 러시아 북동쪽과 알래스카 땅이 과거에는 육지로 접해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백남준은 지배자의 관점이 반영된 중국 <사기>나 <삼국사기> 등을 불신했다. 하여간 우린 밀리고 밀려 한반도까지 왔고 요동성까지 차지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를 이뤘다. 신라가 통일한답시고 고구려 땅을 당에 넘겨 한반도는 반 토막이 났다. 발해는 230년밖에 못 갔다. 고려는 조금 북진했고 조선은 반도통일을 이뤘으나 일제에 의해 망했다.
결국 우리는 40여 년 일본식민통치를 받았고 1945년 일본천왕의 항복으로 해방을 맞았으나 자력이 아니었다. 그래서 분단되었고 남한은 70년간 외국을 나가려면 배나 비행기를 타야 하는 섬이 되었다. 한국인의 자존감은 뭉개졌고 5·16군사쿠데타로 개발 독재기를 보냈고 10년간 민주주의를 하다 '헬조선'이라는 불명예까지 얻게 되었다.
지금 우리의 자존감은 고갈됐지만 조선후기도 '헬조선'이었나 보다. 정약용의 시 '술지(述志)'를 보면 당시 조선백성들이 얼마나 피폐함 속에서 갇혀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아 우리 겨레여!/마치 자루 속에 갇힌 것 같구나/삼면은 바다로 둘러싸이고/북방은 높은 산으로 가렸으니/사지는 오므라들고 굽혀져서/기개와 뜻 어디에 편단 말인가/누가 능히 이 어둠을 열어주나/고개 들어 세상 바라보니/견문이 좁고 정(情)이 흐릿하구나/남의 것 모방하기에 급급하고/제 것을 갈고 닦을 겨를이 없구나/백성의 입안에 재갈 물리고/어리석은 것 하나만 받들게 하네/차라리 단군 때/그 질박한 고풍(古風)이 그립고나!"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뭘 하려면 우선 열등감이 없어야 하고 일본과 우리는 똑 같아 전혀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백남준도 말했지만 우리에게 뭣보다 긴급하게 필요한 것은 반세기 전에 백남준이 보여준 그런 '자부심과 자존감과 자신감'이다.
그런데 백남준의 그런 자부심은 괜한 자존심이나 엉뚱한 자만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우선 6개 국어를 구사했고 인터넷 없는 시대에 한국 신문은 물론 <뉴욕 타임스> <슈피겔> 등 세계 유수신문을 읽었고 전 세계의 정보와 지식을 충분히 수집·분석하는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만우 전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의 말에 의하면 백남준은 미국 우주항공국(NASA)의 천체물리학자나 하버드대 생의학 교수 같은 과학자뿐만 아니라 세계적 예술가, 첨단 분야 전문가와 석학 등 1500명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상호 소통했다고 하는데 이런 점이 그를 세계적 작가를 넘어 세기적인 작가가 되게 한 것이다.(유튜브 자료 : 백남준코드)
우리 역사에서 단군 이래 아직 백남준을 능가하는 인물은 없는 것 같다. 결국 그는 6·25전쟁으로 한국을 떠나 글로벌 노마드 작가가 된다.

 백남준 언제나 헐렁한 멜빵패션을 하고 다녔고 젊어서부터 몽골 유목민족의 후손답게 재기발랄한 모습을 과시하다. 그만의 독특한 자신감, 자존감, 자부심으로 넘친다. 백남준 20대 때 사진이다
ⓒ 김형순
하여간 그는 남의 시선에 전혀 구애받지 않을 정도로 '자부심과 자존감과 자신감'으로 넘쳤다. 그의 패션을 보면 알 수 있다. 작업하기 편한 멜빵패션이면 끝이다. 그래서 그 행색이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이로 인한 에피소드도 많다. 1990년인가 이어령씨가 문화부 장관할 때인가 그를 만나러 갔으나 수위의 저지를 받아 처음엔 못 들어갔다.
백남준은 돈은 물론이고 권력도 눈에 안 보였고 명예도 우습게 봤다. 다만 창조하는 자의 기쁨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기에 그런 일을 당해도 아무렇지가 않았다. 그의 해맑은 미소와 천진의 얼굴은 바로 거기서 나왔고 천재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로움이다.
그는 랭보가 말하는 '견자(voyant/visionary)'였다. 남이 보지 못하는 3천 년대를 내다봤다. 그는 지구촌을 놀이터삼아 작업했고 심해 같은 TV 속에 그의 '우주관·세계관·인생관'을 다 담았다. 젊어서 찍은 재기발랄한 그의 사진을 보면 맥 빠진 우리에게 힘을 준다. 그는 비디오제국의 황제로 누구도 경쟁자가 되지 않는 '울트라 슈퍼파워맨'이었다.
지금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는 내년 1월 29일까지 '백남준 글로벌 흥(興)'전이 열린다. '호랑이는 살아있다'도 소개된다. 새천년 벽두에 발표한 이 작품은 우리에게 보내는 21세기 격려사 같다. 호랑이는 한국인의 자존감을 비유한 것으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선언이다. 그 속에 민족통일과 세계평화에 대한 간절한 염원도 담겨 있다.
백남준은 누구도 시도하지 않는 실험예술인 비디오아트에 대해 신념을 가지고 끝까지 밀어붙여 전자아트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 저력은 바로 그의 '자신감, 자존감, 자긍심'에서 온 것이리라. 그래서 우리는 백남준을 흔히 '천년을 써먹을 문화자본'이라고도 한다. 그가 우리에게 주는 영감과 에너지를 어떻게 활용할지 하는 건 우리의 몫이다.
우리는 백남준을 통해 식민사관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안 된다"는 열등감과 패배감을 씻고, 천지에 가득 찬 영기를 품고 옛 선인의 기개인 '호연지기'도 되찾아야 하리라. 그러려면 과학·문화·교육의 선진화 속에 온 국민이 '지식노동자'가 되어 뭣보다 창의성을 발휘해야 한다. 난 백남준을 그런 롤 모델로 봤기에 그의 연작기사를 쓰게 되었다.
둘, '탈영토 제국주의' 제안... 신 실크로드인 전자초고속도 구상

 백남준 I '기마민족(Equestrian people)' 1995년 작품. 이 작품을 보면 과거 영토시대에는 가장 빠른 말을 가진 나라 예컨대 몽골 같은 나라가 세계를 지배했지만 탈영토시대에는 수송, 유통, 인터넷 등 정보통신과 소통기술이 가장 빠른 나라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기마민족인 한국이 정보시대에 세계로 크게 뻗어나갈 거라는 기대가 포함되어 있다. 아트선재 소장품
ⓒ 아트선재
과거 세계사를 돌아보면 그리스,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 유럽에서는 한 번씩 돌아가며 제국주의를 경험했다. 다만 독일이 이런 경험이 적어 1차·2차 대전을 일으켰다 실패했다. 일본도 2차 대전 때 유럽을 모방해 제국주의 경험을 했다. 하지만 그중 역대 최고의 제국주의는 역시 몽골이었다.
몽골제국주의('팍스 몽골리카')는 칭기즈칸이 동아시아부터 동유럽과 러시아까지 3300만㎢가 넘는 땅을 차지해 탄생된다. 그의 군대는 놀라운 기동력으로 국가를 연결하는 가공할 만한 네트워크 역참(station)방식으로 세계를 지배한다. 백남준이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그들의 군사력이 아니라 나라와 나라를 잇는 인터넷 개념인 '네트워크' 방식이다.
하여간 잃어버린 자존감과 자의식을 되찾으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탈영토 제국주의'의 경험이다. 이는 다른 나라를 폭력으로 지배하는 기존의 제국주의와는 정반대로 남의 땅을 차지하거나 침범하지 않고도 평화롭게 세계를 호령하는 '21세기형 디지털제국주의'를 말한다. 우리가 백남준을 달리 부를 때 '문화 칭기즈칸'이라고 일컫는 이유다.
이를 이루기 위해선 정보화된 지식과 축적된 학문과 앞선 하이테크가 뒷받침돼야 한다. 우리가 지구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 가장 먼저 대안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백남준은 이런 아이디어를 '탈영토제국주의'로 구상했고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출품작인 '전자초고속도로(新실크로드)_베니스에서 울란바토르까지'를 통해 그런 꿈을 형상화했다.
이 작품에는 인류최초로 동서의 관계를 잇는데 기여한 '마르코 폴로', '칭기즈칸', '훈족 아틸라 왕', '알렉산더대왕' 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또 일제가 제거한 단군도 부제 '스키타이 왕'을 붙여 위풍당당한 전자영웅으로 복원시켰다. 백남준의 이런 동기는 바로 탈영토제국주의 걸맞은 평화지향적인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셋, 지구촌소통 위한 인터넷 착안... 백남준의 국제어 '참여와 소통'

 세종문화회관(미술관)에서 열리는 '백남준 그루브_흥(興)'전 전시장에 백남준 1973년 작 '글로벌 그루브(Global Groove 신나는 세계축제)' 작품을 재구성해 입체적 시각효과를 주다
ⓒ 김형순
백남준은 1984년 지구촌 평화공존을 위한 제안이 담긴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발표한다. 이 작품에 대해 백남준은 "초우주적 버라이어티 쇼, 글로벌 디스코텍, 복합적인 시공간의 심포니, 우주오페라, 세계최초의 쌍방향아트, 대륙 간 피드백, 견우와 직녀의 랑데부 쇼"라는 자평을 남겼다. 이 작품이 어떤 아이디어로 구상됐는지 알 수 있다.
여기에 더 근원적인 이 작품의 지적 계보학은 뭔가, 그건 아마도 백남준이 17살에 경기중학교 시절 안병욱 선생에게 배운 맑스, 그가 착안한 '코뮌'사상인 것 같다. 백남준은 그 사상을 평생 간직했고 그걸 비디오아트에 적용해 'TV(비디오)코뮌'을 만들었다.
백남준의 코뮌연작은 <'참여'하는 사회와 '소통'하는 인간>이 주제이다. 이것은 <'소외'된 인간과 '착취'하는 사회>라고 자본주의를 비판한 맑스에 대한 백남준 식 대안이다. "참여가 있으면 소외가 없고 소통이 되면 착취할 수 없다"는 메시지다.
이 '비디오코뮌'은 '글로벌 그루브'과 '굿모닝 미스터오웰' 연작으로 이어진다. 이 연작은 위성아트가 된다. 그 최종판이 '굿모닝 미스터오웰'이다. 2500만 명이 시청한 것으로 추산되는 백남준의 출세작이다. 백남준은 이 작품의 중요성을 "21세기는 1984년 1월 1일부터 시작된다"라는 말로 대변했다. 드디어 지구촌에 가상이지만 '인터넷의 꽃'이 피어났다.

 '백남준 아트센터(용인)'에서 2014년 11월 6일까지 열리는 '굿모닝 미스터오웰' 전시장면. 1984년 당시 영상을 재현한 것으로 뒤로 앤더슨, 커닝햄, 긴즈버그, 보이스, 케이지 등 유명인사들 모습이 보인다
ⓒ 김형순
백남준은 소통을 강조하는 예술가다. 그는 위성아트 연작을 통해 평생 서양인이 동양인을 '불가해한 사람(inscrutable oriental)'으로 보는 편견을 없애려 애썼다. 그래서 작품의 콘텐츠를 보면 서양 것과 함께 인디언, 오키나와, 한국 등의 춤과 노래와 민속 등이 많이 소개된다. 이런 방식이 언어의 벽을 뛰어넘는 효율적 소통방식으로 봤기 때문이다.
지구촌 사람들 모두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주제 하에 동서의 상호불신과 배격을 해소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부부도 대화가 부족하면 부부싸움이 일어나듯 백남준은 동양과 서양이 상호소통이 부족하면 전쟁이 난다고 봤다. 그런 면에서 그는 평화주의자이다.
이런 백남준의 미학은 우리도 잘 아는 '이심전심'이 작동한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세상 그뿐만 아니라 위성과 위성, 미디어와 미디어가 통하는 다시 말해 첨단 네트워킹으로 연결되는 '인터미디어'를 뜻한다. 즉 지식과 정보가 공유되는 인터넷 개념이다. 백남준은 이걸 불교의 '인드라망'이나 도교의 '도(道)'와도 같은 개념으로 봤다.
백남준의 이런 사상에 또한 영향을 준 사람은 맑스 외 칭기즈칸이 있다. 이 황제는 "말에서 내려 국가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나라를 연결하는 게 자신이 세상에 온 이유"라고 설명했다. 백남준은 이렇게 'TV"와 '코뮌(네트워크)'와 '위성기술'을 최초로 예술화했다.
넷, 피드백혁명과 문화의 민주주의... 그가 창안한 SNS 댓글 혁명

 들라크루아 I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아래 클릭하면 이를 오스트리아 만화가 올리버 쇼프(Oliver Schopf)가 패러디한 '민중을 이끄는 인터넷 여신'이라는 작품을 볼 수 있다. www.voxeurop.eu/fr/content/picture/498941-l-internet-guidant-le-peuple
ⓒ 위키피디아
백남준은 모두가 한 마을사람이라는 맥루언의 '지구촌'개념에 공감했다. 이의 전제조건으로 '소통과 참여'는 필수적이다. 이와 연관해 생각나는 백남준 말이 있다. "민주주의가 뭐냐?"고 누가 그에게 묻자, "말대꾸하는 것이다"라고 촌철살인 같은 한 마디를 남겼다. 이건 바로 쌍방적소통인 '댓글'을 말한다. 'SNS' 방식을 취하는 피드백 혁명이다.
이런 'SNS'와 같은 쌍방소통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맞은 나라를 지켜주는 효율적 대안이다. 이런 장치는 정치민주화와 함께 문화민주주의에도 도움이 된다. 이를 잘 인식하고 있었던 백남준은 첫 전시부터 놀랍게도 전시의 주인공이 작가가 아니라 관객이라고 했고, 그래서 일방소통의 수직적 전시가 아니고 쌍방소통의 수평적 전시를 선보였다.
이용우 미술비평가는 백남준 이런 정신에 대한 평가에서 "관객의 참여방식에 의한 그의 미적 실험은 백남준 미학의 하이라이트다, 그는 '참여와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는 예술적 실천을 독재 또는 독백예술로 봤고, 고급예술로 변질된 모더니즘이 관객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아 결국 예술의 계급화를 초래했다"라고 논평했다.
그는 이미 1인 미디어시대를 예언했고 지구촌 소통시대를 맞아 페이스북, 트윗, 유튜브 등 다양한 SNS방식이 발명되면서 미디어소통이 더 활성화됐고 표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나가는 데 대들보 역할도 한다. 그걸 증명해주는 역사적 사건이 바로 2010년과 2011년에 이슬람권에서 일어난 '아랍의 봄'이다.
이런 민주화운동이 이슬람권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지만 결국 'SNS'혁명은 작동했다. 프랑스 언론은 '들라크루아' 작품을 패러디해 원 제목인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 아니라 '민중을 이끄는 인터넷 여신'이라고 제목을 붙여 신문만평에 실기도 했다.
다섯, 현대예술을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바꾸다... 확장·융합하는 총체예술론

 세종문화회관(미술관)에서 열리는 '백남준 그루브_흥(興)'전 벽에 붙은 대형사진으로 "TV로 작업을 하면 할수록 신석기시대가 떠오른다"라는 글씨가 아래 보인다
ⓒ 김형순
백남준은 "TV로 작업을 하면 할수록 신석기시대가 떠오른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비디오아트 이전과 이후를 구석기와 신석기로 나눈다는 뜻인가. 하긴 '대상을 그리는 것'과 '소리를 그리는 것', 삶과 예술을 '나눠 보는 것'과 '같이 보는 것', 피아노를 '치는 것'과 '부수는 것', 재현하는 '기존예술'과 소리를 시각화한 '비디오아트'는 확연히 다르다.
이뿐 아니라 백남준은 음악을 구음악과 신음악으로 나눴는데 백남준은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엄숙한 카라얀을 너무 싫어했다. 백남준은 악보중심의 '구음악'의 룰을 깨고 온몸으로 하는 '신음악' 즉 '액션뮤직'을 발명한다. 신석기와 구석기만큼이나 그 차가 크다.
신음악과 구음악과 연주방식도 다르다. 구음악은 피아노를 손가락으로 치지만 신음악은 머리로 팔꿈치로 피아노를 치고 비디오카메라로 피아노를 치면서 그걸 영상에 나타나게 도 한다. 피아노를 넘어뜨리는 건 다반사고 이뿐만 아니라 피아노에 못을 박거나 대패질하거나 그 페달을 혀로 핥기도 한다. 피아노의 기능을 이렇게 다양하게 확장시킨다.
백남준은 공간예술인 미술과 시간예술인 음악의 경계를 없애고 '제3의 영역'을 개척하려 했다. 미디어를 융합하는 이런 관점은 이미 오래전부터 구상돼왔다는 것은 아래의 백남준 말 "장자(莊子)에게서 내가 배운 게 시공간이야, 시공간을 따로 놓지를 않고 하나로 봐, 그 스케일이 너무 크고 무시무시해"라는 말에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세종문화회관(미술관)에서 열리는 '백남준 그루브_흥(興)'전 벽에 붙은 백남준과 그의 예술 파트너 샬럿과의 공연사진이다. 여기 보면 구음악과는 너무 다른 백남준의 신음악이 뭔지 알 수 있다. 일명 '액션 뮤직'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는 전자로봇 K-456도 연주자가 된다. 1964년 8월 17일 사진가 '피터 무어'가 뉴욕 백남준 스튜디오에서 찍은 사진을 재구성하다.
ⓒ 김형순
백남준은 이렇게 서구의 이원론을 깨고 동양의 일원론을 도입한다. 미술에 음악을 가미해 비빔밥미디어를 만든다. 사실 나치나 2차 대전의 원인 중 하나가 선과 악, 음과 양,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는 '이분법' 때문이었다는 건 서구인도 인정한다. 또한 이런 면에서 음악전공자 백남준이 시각예술가가 된 건 또한 자연스럽다.
시각예술이나 '시간예술(time based art)'을 중시하는 백남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의 시간론을 알아야 한다.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제곱근이다"는 그의 시간개념을 요약한 말로 여기서 노스탤지어는 과거에 대한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라 과거에 이루지 못한 꿈과 비전을 이루는 무한동력을 뜻한다. 결론으로 인간이 시간의 주인이라는 메시지다.
그의 첫 전시 16테마 중 하나가 <내용 없는 시간은 가능한가?>인 것도 그의 시간론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내용 없는 시간'이란 1960년 이후 비디오아티스트가 보여주는 '추상시간'을 말한다. 1950대까지 현대미술에서 추구한 '추상공간'과 상반되는 개념이다.
백남준은 미디어융합만 아니라 미디어확장도 시도한다. 맥루한이 착안한 "의복은 피부의 확장, 자동차는 다리의 확장, 컴퓨터는 두뇌의 확장, 전기는 중추신경의 확장, 책은 눈의 확장, 라디오는 귀의 확장, TV·영화는 눈과 귀의 확장"같은 개념을 작품에 녹여냈다.
임흥순 작가는 지난 6월에 다큐영화로 만든 <위로공단>으로 한국작가로는 세계미술계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베니스비엔날레 은사자상'을 받았는데, 여기서 영화가 어떻게 미술인가 하나 오늘날 미술의 영역은 많이 확장됐다. 이제 회화, 조각, 설치, 사진, 디자인, 장식미술뿐만 아니라 퍼포먼스, 건축, 타이포그래피, 영화 등이 다 미술에 포함된다.
이뿐 아니라 백남준은 '보들레르' 상징주의의 대표적 시 '조응(照應)'에 "어둠인지 빛인지/광활한 어스름의 깊은 합일 속에/긴 메아리가 멀리 잦아들 듯/색채·소리·향기가 상호 조응하네" 등의 구절에서 나오는 '색·음·향'의 공감각적 미학을 발굴하고 시 제목처럼 상호 반응하는 방식을 도입해 전자아트의 시각·청각·촉각의 요소로 융합시켰다.
백남준 타계 10주기 앞두고 <백남준 그루브_흥(興)>전
세종문화회관에서 내년 1월 29일까지


 백남준 I '호랑이는 살아있다(Tiger lives)' 비디오조각 2000년. 동양을 상징하는 악기인 월금(왼쪽)과 서양을 상징하는 악기인 첼로(오른쪽)가 나란히 보인다. 이 작품은 2000년 1월 1일 0시 정각에 임진각 야외무대에서 공연된 것으로 뉴밀레니엄을 맞아 기획된 작품이다. 기증 : 21세기 예술경영연구소
ⓒ 김형순
김노암 전시전문가가 기획한 이번 '백남준 그루브-흥'전은 내년 1월 29일까지 열린다. 2016년 1월 29일 백남준 타계 10주기를 앞두고 있어 그 의의가 더욱 크다. 세종문화회관(미술관)이 새로 내부를 단장한 후 첫 기획전인데 그 반응이 좋다. 전시장 입구 벽에는 "좌우간 당신이 나의 TV를 보게 된다면 제발 30분 이상 지켜보길 바란다(1964)"는 백남준의 짧은 작품 감상법도 게시해놓았다. 이번 전시제목은 '신나는 세계 축제'라는 뜻이다.

이번 전시에서 우선 가장 눈에 들어오는 작품은 새천년이 시작하는 2000년 1월 1월 전 세계 77개국에 생방송된 백남준의 4번째 위성아트인 '호랑이는 살아 있다(위 작품)'다. 동양을 상징하는 악기 '월금'과 서양을 상징하는 악기 '첼로'가 한 세트로 구성된 작품으로 이번 전시에서 '하이라이트'다.

21세기에는 남과 북이 통일로 만나고 동양과 서양이 만나 평화로 만나 진정한 공존을 이루자는 것이 그 주제다. 뉴밀레니엄을 맞이하면서 백남준이 염원하는 이상향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여기 비디오콘텐츠에는 그의 2000년까지 만든 작품이 총망라되어 있다. 첨단의 현대음악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춤 '승무'에 이루기까지 다양하다.

1995년에 발표된 피버 옵틱(Phiber Optik)'은 1993년 백남준이 베니스비엔날레 출품한 전자초고속도의 연장선에 상에 있는 작품으로 관객의 눈길을 잡는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1984년 KBS가 특별기획한 좌담 프로그램 <백남준의 비디오예술 세계>의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전시를 위해 발굴한 백남준 아카이브로 백남준 연구에 좋은 정보를 제공할 것이다. 이번 전시의 또 하나의 성과이다.

또한 이번 전시는 전시기획자 겸 총감독으로 초빙된 백남준 연구가 김남수와 협업으로 그 빛을 발하고 있다. 우선 김남수씨는 그가 백남준 연구를 위해 읽었던 관련 도서를 '백남준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 200권'이라는 제목으로 전시장 벽에 게시함으로써 전시가 알차면서도 참신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또 하나의 큰 성과는 백남준 첫 전시 포스터에 수록한 백남준 예술의 '16가지 주제'를 명쾌하게 해설했다는 점이다.

또한 1층 전시실에서는 A4용지 1003장(1003장은 10월 03일 개천절)으로 만든 <1003 다다익선의 주해>는 마치 TV모니터 1003개로 만든 다다익선의 축소판 같다. 우리가 흔히 보기 힘든 백남준의 텍스트와 이미지 등 아카이브를 A4용지 복사해 백과사전 형식으로 전시한다. 저비용 고효율의 전시의 본을 보여줘 창의성 돋보이는 전시형식을 선보인 큐레이팅의 개가인 셈이다. 전시안내 02) 399-1000 입장료 9000원 2회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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