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것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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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것이다(2)

明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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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9 01:54:06 (*.162.81.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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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인기를 얻는 경우 대부분은 영적인 것과 전혀 반대로 가고 있다고 이해하면 정확하다고 DK대사는 말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다수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으려면, 그들 대다수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것을 제공해야 하는데, 그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물질적 현실적 안락이기 때문입니다. 정작 그들이 속해 있고, 그들이 앞장서서 홍보하고 강요하고 있는 그들 종교의 창시자는 가장 낮은 자로 살면서 죽는 순간까지 떠돌면서 무소유의 삶을 그대로 실천했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핍박을 받고, 사람들로부터 냉대를 받았던 것은 그 만큼 그 분의 가르침이 영적이었고, 너무 심오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도를 거느리고 존경을 받는 성직자들 대부분이 물질적으로 누릴 수 있는 온갖 현세적인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제사장들과 다를 바 없는 이 시대의 제사장들이고, 바리새인들인 셈이지요. 예수께서는 그들 성직자들을 향해서 자신들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못 들어가게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독사의 자식들에 비유했습니다.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못들어가게 한다니...정말 큰 죄일 것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것이다.” 이 성경구절을 보면서 매우 이해하기가 어려웠고, 어렸을 때는 제자들에게 직접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윤회사상을 간접적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즉, 제자들 중에 비록 겉으로 보기에 부족해 보이지만, 이미 오랜 과거 전생들을 통해서 영적 수행과 공부를 해 왔기 때문에 상당한 상근기의 경지에 이른 제자들이 있어서, 영적 관점에서 보면 현재 겉으로 보기에 명민하고 열렬하게 수행을 하는 사람들보다 더 진화된 영혼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앨리스 베일리 저서에 매우 흥미있는 해석이 나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적으로 높은 경지를 이룬 영적 수행자들은, 어느 때가 되면 자신의 개인적 완성보다는 다른 이들의 영적 완성을 위해서 기꺼히 희생하고 봉사하면서 말 그대로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행을 실천한다고 합니다. 그 결과 인류의 우주적 한 주기가 끝날 무렵에는, 모든 영혼들이 영적 완성을 이루게 되고, 결국 먼저 영적 완성을 이룬 사람이나 나중에 영적 완성을 이룬 사람이 함께 완성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신 뜻이 대승적 보살사상의 전형적인 한 예라고 할 수 있듯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영적으로 진보된 이들의 희생과 봉사의 삶을 언급하신 것이고, 그로 인해 모든 인류가 영적 완성에 함께 들어가는 우주적 사건을 언급하신 것이라면, 현재 기독교 성직자들이 해석하는 것은 빗나가도 너무나도 빗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빗나간 정도가 아니고, 아예 정반대라고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 속에, 그토록 심오하고 감동적인 사랑의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서 자신의 영적 완성조차 유보시키면서 희생하고 봉사하는 윤회의 삶도 마다하지 않는 대승적 보살 사상이 면면히 녹아있는 말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는 말씀과 같은 뜻의 가르침은 대승 관련 경전과 논서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티벳불교의 핵심적인 논서인 “입보리행론”의 저자인 샨띠데와는 “허공이 있는 한, 중생들이 있는 한, 나 역시 이 세상에 머물러 있으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서 부처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자신도 부처의 경지를 이루지 않고, 중생들을 위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겠다는 대승불교의 보살 사상의 핵심을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확연히 찾을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육체적 만족과 현세적 행복을 위해서 영적 가르침을 곡해하고, 호도하면서, 왜곡하는 것은, 다만 영적 통찰과 경험이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해하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선에서,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선에서 해석하고 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조야하고 본능적 충동과 제약 속에서 느리기 이를 데 없으면서 항상 질병과 사고로 부서지기 쉬운 육체, 끊임없이 에너지들이 유입되고 드나드는 에텔체, 온갖 감정과 욕망이 뒤섞여서 시시각각 기쁨과 불쾌감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쉬지 않고 인간을 부추기고 내몰고 있는 아스트랄체, 어느 것이 내 생각인지 남의 생각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무엇이 온당한 생각인지 불합리한 생각인지 구분하는 것도 애매하고, 넘치는 상념들과 정보 속에서 더욱 더 헷갈리는 상념들만 만들어내는 멘탈체...그런 우리의 삶에서 온전한 영적 이해와 경험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 체들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체들이 관계를 맺고 있는 물질계, 아스트랄계, 멘탈계까지 고려하면, 온전한 생각이나 이해를 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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