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길에 대한 개인적 생각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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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의 길에 대한 개인적 생각3

明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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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3 14:49:36 (*.94.245.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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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출현한 고등종교 중에서 아마도 철학적이고 체계적이고, 또 그 깊이와 포괄성에 있어서 불교만한 종교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불의 가르침 만큼 복잡하고 서로 모순되면서 공부하면 할 수록 난해하고 종잡을 수 없는 가르침도 없는 것 같습니다.

흔히 초기 불교라고 말하는 상좌부 내지는 테라바다 불교와 대승불교를 비교하면, 마치 전혀 다른 불교가 아닌가 하는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을 금할 길 없습니다.

대승불교의 역사는 상좌부불교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해서, 상좌부 불교에 대한 우위성을 확립하는 것으로 결말을 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 예로, 초기불교, 즉 남방불교에 따르면 세존께서는 돼지고기(?)를 드시고 돌아가셨다고 하지만, 대승불교권에서는 버섯요리를 드시고 돌아가셨다는 전혀 다른 정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남방불교권에서는 육식을 금하고 있지 않지만, 대승권에서는, 선종의 핵심경전이었던 "능가경"에서 철저하게 육식을 금하고 있습니다. 굳이, 세존의 가르침에 보다 충실한 불교를 찾으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오래된 상좌부 불교가 우위를 점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상좌부불교 혹은 초기경전의 성립 자체가 세존의 입멸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또한 초기 경전들 사이에서도 서로 모순되고 일치되지 않는 내용들이 많고, 어찌 보면 상좌부 내의 각각의 파들이 자신들 나름의 경전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경전의 진실성은 그것이 세존께서 설한 가르침이냐에 있다고 합니다.
불교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논의된 "불설"이냐 "비불설"이냐는 문제는 정말 골치아픈 문제입니다. 불교의 정통성은 그것이 세존께서 설한 것이냐 아니냐 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준에서 정해지는 것 같습니다. 역사적인 불교에 대해 무관심했던 과거에는 누군가가 책을 한 권 써 놓고, "나는 이렇게 들었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하는 문장을 넣어놓으면 감히 아무도 그것이 세존이 설한 경전임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선불교의 원류는 석가세존이 마하가섭에게 불립문자의 가르침을 전한 것이 시초였다는 지극히 비역사적인 기록도 나와있고, 세월이 흐르면서 상당히 오랜 시일 동안 수많은 선불교 수행자들은 그것의 진실성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중국의 선불교 연구가들은 선종의 교조인 달마대사의 역사성조차 근거없는 것임을 거의 확인했다고 합니다.

초기 테라바다의 가르침은 크게 고.집.멸.도의 사정제와 팔정도, 그리고 십이 인연에 관한 세존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고 있고, 그것에 이르는 수행법으로 유명한 사마타와 위빠사나 행법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대승에서 소승이란 말로 폄하해 버린 감이 있지만, 그 이론이나 수행법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철저한 경지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상좌부의 후기 주석서로 가장 권위있는 것으로 대승권에서도 철저하게 연구하고 있는 바수반두(세친)의 아비달마구사론의 그 체계성과 전문적 서술은 한 평생을 연구하고 실천해도 힘겨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승불교의 가르침입니다. 일단 대승 경전은 남방불교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합니다.
사성제와 팔정도와 십이연기론이 성문승들의 근기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방편으로 설한 가르침이고, 진정한 불교의 가르침은 "인무아"와 "법무아"의 깨달음에 있다는 공사상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인 "무아론"의 경우에도, 소승에서 말하는 무아론과 대승에서 말하는 무아론이 상당히 차이가 있을 정도입니다. 불교 공부를 하다 보면, 과연 세존께서 설한 무아의 깨달음이 무엇인지 의아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대승권(!) 제 2의 부처로 추앙을 받고 있는 나가르주나(용수)의 중론을 보면, 가히 상좌부불교, 특히 설일체유부와 경량부의 주장을 논파해서, 무엇이 세존의 진정한 가르침이 무엇인지 천명하는 것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 중론에 대한 접근조차, 자립논증파와 귀류논증파의 두 파로 전개되면서 무엇이 세존의 진리인지 당혹스럽게 합니다. 불교의 역사는 자립논증파와 귀류논증파의 갈등에서 보여지듯이, 결국에는 긍정과 부정의 대립사이면서, 어떤 때는 긍정을, 어떤 때는 부정을, 또 어떤 때는 그 둘의 조화를 찾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일체의 개념을 부정함으로써 공성이 무엇인지 최초로 극명하게 밝혔던 용수의 경우에도, 그의 다른 저서에서는 영원불멸한 불성을 주장함으로써, 오히려 무아론과 위배되는 성향의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밀교의 단계에 오면 불교의 역사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섭니다. 티벳불교의 한 파인 닝마빠의 스승들은,  구루 린뽀체로 불리는 파드마삼바바에 의해서 비로서 세존의 가르침이 완성되었다고 말합니다. 

밀교의 의식과 명상체계를 조금이라도 접해보면, "이것이 불교 맞아?"하는 의문을 한 번쯤은 던지게 되어 있습니다. 밀교의 가르침과 수행법은 실재론과 무아론을 절묘하게 조화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민감한 연결고리를 놓지 않으면서 아아슬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의 글을 읽는 사람이면 질려버려서 당장에 "결국에 진정한 깨달음은 직접적인 수행체험에 의해서만 밝혀질 수 있을 뿐, 개념의 나열로 일관하는 철학적 학문적 노력은 결국에 헛수고일 뿐이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유념할 것은, 불교의 역사를 주도하면서 가지각색의 사상과 주장을 내놓았던 그들 학승들 거의 전부가 상당한 수준의 영적 능력자들이었고, 이미 범인의 경지를 뛰어넘는 수행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비달마 구사론의 저자인 세친의 경우만 해도, 그 한 사람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대학자이면서 성취자로서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가르주나는 공성으로 유명한 대학자이지만, 800년을 넘게 살면서 불교의 역사를 바꿔놓았던 전설적 인물로 묘사되고 있고. 용수야말로 밀교의 시조임을 말하기도 합니다. 용수의 가르침을 가장 정확하게 계승했다는 찬드라끼르티(월칭)의 경우만 해도, 밀교의 성취자로서 벽화에 그려져 있는 젖소에서 우유를 짜서 가뭄이 들어 고생하던 학승들을 먹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것이 전설적이든 신화적으로 꾸며진 것이든, 실제 티벳불교 사원에 가면 그런 이적적인 사례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티벳불교가 낳은 불세출의 대학자이면서 밀교의 성취자였던 쫑카빠는 4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문수보살을 직접 친견하면서 귀류논증과 자립논증의 차이를 깨닫고 공성의 이치를 확연히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는 2 생 후에 다른 우주에서 부처의 역할을 할 대보살로 수기를 받았다고 합니다. 유아때부터 불교 공부와 수행으로 일관했던 위대한 수행자였던 쫑카빠는 그 날 눈물을 흘리면서 공성과 연기의 가르침을 설한 세존의 위대함을 찬탄하는 게송을 씁니다.

과연, 공성과 연기가 무엇이길래, 그는 비로소 연기와 공성의 진리를 깨닫았다고 하는 것일까요? 

나가르주나는 중론을 써서 언어와 개념의 허구성과 한계성을 분석하고 논파하고 있지만, 그런 나가르주나는 "부처의 깨달음의 세계는 언어를 넘어서 있지만, 그렇다고 언어를 무시하고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언어는 깨달음에 도달하는 없어서는 안 되는 수단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밀라레빠의 수행전통을 가장 잘 이어받았다고 하는 레충빠는 "부처의 깨달음에 이르는 모든 수행의 과정과 체험에서 말해질 수 없는 것은 없다"고 말하면서, 수행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체험과 조심해야 할 것과 나아갈 바를 상세하고 기록했습니다. 레충빠는 빛의 몸으로 화해서 승천한
성취자였다고 합니다. 

DK대사는 인류의 영적 진화의 역사는 멘탈체의 발전을 기점으로 해서 대전환점을 맞이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개념적 사고능력과 그로 인한 추상적 사고능력의 발전이 인간의 영적 진화에 있어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서 개념적 사고능력은 그 자체로 물질계에 현현하는 영적 실재의 중요한 한 단계를 예시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멘탈체의 속성인 개념 형성 과정은 영적 현실이 물질적 현실과 관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의지적 측면 내지는 감성적 측면인 아스트럴체의 기능은 그런 멘탈체의 작용에 힘을 가하는 역할, 즉 연료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감정적 기능 혹은 욕망적 기능을 그것이 쉽게 직접적으로 인식되고 경험되기 때문에, 개념이나 관념들은 실제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고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결론에 쉽게 도달하지만, 실재의 현실은 그와 반대임을 DK대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 보면 결국에는 관념 하나에 따라 숱한 현실세계의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한 생각에 의해 윤회계가 있고 열반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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