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길에 대한 개인적 생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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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의 길에 대한 개인적 생각 2

明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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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1 14:56:52 (*.94.24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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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수만큼 수행의 길이 다양하고, 또 그 수행의 길을 통해서 인식하고 체험하는

내용 역시 그 수 만큼 다양하고 많은 것 같습니다. 그것들이 모두 각각의 개별적인 경험인 한 결코

거짓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결국 그 모든 결론은 견해일 뿐인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도 우리가 믿는 과학적 발견이란 것이 가설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여러 성인

들의 견해들조차 결국에는 가설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적 표현을 빌면 

그러한 다양한 견해들은 중생들의 근기와 성향에 맞게 설해진 방편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느 만큼 객관적 보편성과 타당성을 찾을 수 있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그런 객관적 보편성에 대한 의도조차 결국 하나의 견해에 불과할 뿐인지도 모릅니다. 

앨리스 베일리를 통해서 DK대사는,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며, 바로 그 상대적인 의미에서 절대적일 뿐이며, 다음 순간

의 진리는 이전 순간의 진리를 부정할 뿐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 방대한 앨리스 

베일리의 저서들은 다만 그 무엇에 대한 하나의 해석 내지는 상대적 설명에 지나지 않음을 피력

하고 있고, 더욱 놀라운 것은 소위 절대적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진리를 찾아나서는 구도의 노력에

있어서 ABC 정도의 수준의 설명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신이라는 존재조차 상대적이며

인간의 인식의 정도 만큼 경험되는 세계가 결정되는 만큼, 신적 실재에 대한 인간의 경험과 인식

에 따라 신적 속성조차 상대성을 면하지 못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주의 크기가 망원경의 성능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크기가 정해지듯이, 세계 혹은 영적 현실이라는 것 역시 인간의 인식과 경험

의 범위에 의해 제약되고 규정된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절대적 진리에 대해 그토록 우리가 집착하고, 자신의 모든 발견을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것으로

규정하려는, 때로는 병적일 정도의 노력은 다만, 불확실성을 견딜 수 없고, 자아정체감을 어떤 식으로든,

그것이 혼자만의 확인이든, 타인들을 통해서든, 어떻게든 확인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뿌리깊은 성향의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문제삼을 것은, 절대적 보편적 진리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그런 것에

집착하면서 어떻게듣 스스로에게 설득시키려는 병적일 정도로 뿌리깊은 우리의 욕구와 노력 

그 자체를 문제삼아야 할지 모릅니다. 생각보다 우리의 자아에 대한 집착, 다른 말로, 확실성에 대한

집착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오래되었습니다. 우리는 불확실성에서 어떻게든 확실성을

찾으려 하고, 모양이 없는 것에다 어떻게든 형상을 부여하려고 시도합니다. DK 대사의 가르침을

통해서 본다면, 우리의 삶은 형상에 대한 강한 열망과 무형상에 대한 회귀의 열망이 끊임없이 갈등을

빚는 바가바드 기따의 크루크쉐트라 전쟁터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회의주의자이면서 

동시에 독단론자일 수 밖에 없는가 봅니다. 아마도 완전한 회의주의자이거나 완전한 독단론자가 될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을 세상에서 성자라고 부르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무엇이 진리라고 말하기 전에, 혹은 "이것이 진리다", "진리는 .....이다"라고 말하기 전에

왜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며, 어떤 경로로 그런 노력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서 그런 노력을

하고 있는지 문제삼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두렵고 불안해서, 어떻게든 어떤 수단을

통해서든 한시라도 빨리 안정을 찾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해 놓고 싶어하는 조급증에 시달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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