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것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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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것이다(1)

明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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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8 13:12:57 (*.162.81.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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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것이다.”

위에 나오는 신양성서의 유명한 말은 보통 교회에서 설명하기를, 신앙생활이 오래되었을지라도, 게을리하고 태만한 사람보다는, 그 사람보다 훨씬 늦게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마지막까지 열심히 믿으면 그 사람이 마지막에 더 나은 자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식의 해석에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주변에서, 혹은 자기 자신에게서, 열심히 쉬지 않고 노력한 결과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오래도록 물질적 행복을 누리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록 일찌감치 어떤 방향으로 노력을 기울였는데, 태만해서 자신이 이룩한 것을 모두 까먹거나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결정적인 시기에 뒤처지는 예들을 많이 확인할 수 있고, 그와 달리, 막판에 열심히 분투해서 결정적인 순간에 전자의 사람들보다 더 나은 경우를 이루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의문을 제기한다 한들, “눈뜨고 봐라! 게으른 자와 게으르지 않은 자가 최후에 어떻게 되는지!”하고 예들을 제시하면, 어쩔 수 없이 수긍하게 됩니다. 

위와 같은 식의 해석에서 고찰해 볼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런 식의 해석에 숨겨진 모순과 심리적 동기입니다. 먼저, 영적 노력의 결과를 물질적 행복과 현실적 안락이라는 것으로 규정하고, 그런 결과의 관점에서 질적인 것보다는 양적인 면에서 부족하면 그 때까지 경주했던 노력이 문제가 있는 것이고, 빈약한 것이라는 판단입니다. 그런 식의 해석은, 물질적 행복과 안락이 우리가 노력을 기울여야 할 목표라는 자기모순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완성을 목표로 하는 종교의 근본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복신앙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영적 완성을 목표로 기울여지는 모든 노력을, 교묘하게 현실적 물질적 행복을 위한 노력으로 왜곡하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 완성이라는 주제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과거에 종속되고 지배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자신이 경험하고 이해한 것에 의해 세계와 인간을 해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대다수 인간의 과거와 현재는 물질적 육체적 만족을 향한 노력의 역사이고, 그런 만족에 부응할 수 있는 것이면 인간에게 긍정적 인상을 줄 수 밖에 없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식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종교적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나 듣는 사람들 모두, 자신들이 경험하고 이해한 것을 토대로 해서 종교적 교리를 해석하고 적용시킬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종교적 교리는, 영적 완성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그들의 언어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설정해 놓고 전개됩니다. 그런 매개적인 언어와 개념을 통해서, 인간들이 전혀 경험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것을 전했기 때문에, 역사를 통해서 숱한 해석과 종파들이 출몰하고 이상한 모습으로 변형되고 왜곡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영적 세계라는 희유의 존재형태를 전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무리이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의 모든 핵심적 가르침은 비유일 수 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위와 같은 말씀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의 심리적 동기는 간단하게 말해서, 기존의 교인들 내지는 새로운 신도들에게 더욱더 분발하게 하고, 소속감을 증대시키고, 정체성을 확립시키기 위한 것인데, 그 이면에는 인간의 두려움을 이용하고 있는 교묘한 이기적 동기가 있습니다. 다른 곳에 한눈 팔면서 있을 시간이 없고, 자칫 위험천만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라는 권고아닌 협박 성질의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유의 해석들은 거의 대부분, 집단의 공고성을 유지하고, 집단의 대표자들이 그들의 이익을 유지하려는 일반화된 심리적 동기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말씀을, “죽음이란 불확실한 사실이 우리의 삶의 실상입니다”라는 식으로 해석해서 덧없는 육체적 삶의 현실을 이해하도록 해서, 더욱더 영적 완성을 위해 물질적 욕망과 노력을 더욱더 줄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차라리 말씀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기독교가 지금의 교세를 이루어낼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지금까지의 카르마에 의해 지배되는 인간의 지극히 현세적인 접근과 인간의 뿌리깊은 물질적 육체적 만족에 대한 욕구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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