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학적 개념을 적용한 불교 해석 (2) --- “색즉시공”의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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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학적 개념을 적용한 불교 해석 (2) --- “색즉시공”의 깨달음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위의 말은 대승불교의 정수이며, 부처의 깨달음이 무엇인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말이고, 대승불교권에서 가장 많이 암송되고 되뇌이고 인용되는 말입니다. 팔만사천법문의 요점이라고 할 수 있으며, 깨달음의 경지와 그에 이르는 방편까지 함축하고 있는 말입니다. 이 지구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 심오한 만트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고, 그야말로 신지학의 표현을 빌면, “말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진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글자일 뿐이지만, 모든 신성한 가르침이 그렇듯이, 이 말은 영적 깨달음의 씨앗과도 같고 만트라와도 같아서, 지성적으로 이해하든 이해하지 않든, 암송하고 되뇌이며 명상하는 모든 이들에게 미래의 깨달음을 가꾸는 (불교식으로 말하면) 공덕을 쌓는 말입니다. 그런 말이니 만큼, 염송하고 명상하는 모든 이가 가장 순수한 영적 열망을 품고서 다가가야 할 말입니다. 그 말은, 뱐야심경에 나오듯이, 최상의 주문이며, 가장 성스런 주문이면서, 모든 부처들의 깨달음이 비롯되는 근원입니다. 불교 수행자로서의 최고의 축복은, 죽음의 순간에 이 말을 기억해서 의식이 사라지는 순간까지 그 말에 집중하고 명상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일찍이 티벳이 낳은 위대한 스승의 한 분인 쫑카파 대사는 사십 초반에 오랜 시간의 초인적인 고행과 명상 끝에, 위대한 스승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다른 말이라고 할 수 있는 “연기가 공성이고, 공성이 연기”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고, 눈물을 흘리면서 연기의 가르침을 설하신 부처에게 경배를 올렸습니다. 쫑카파의 깨달음이 완성된 순간이었습니다. 그 역시 깨달음을 경험하고 나서, 부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시고 그랬듯이, 공성의 가르침을 전할 방법이 없으며, 이해시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실감했습니다. 쫑카파가 설명하기가 불가능한 공성의 가르침을 전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지혜의 화신인 문수보살의 권고였다고 합니다. 

연기에 대한 이해는 쉽지 않습니다. 소승적 관점에서 본 연기는 12 연기를 말하는데, 대승적 관점에서 바라본 연기는 인간의 분별적 사유에 의해 겉으로 드러난 제현상의 존재방식, 혹은 인간의 개념적 분별 사유에 의해 경험되는 세계를 말하기도 합니다. 상대적 세계관 내지는 상호의존성 같은 것을 연기라고도 하는데, 그런 것은 연기의 한 면을 말하는 것이지, 연기라는 말의 포괄적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굳이 간단히 말한다면, 인간이 경험하는 이원적 세계 전체를 연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신지학적 개념을 적용하면, “육체/에텔체, 아스트랄체, 멘탈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경험하는 일체의 세계를 연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윤회를 하면서 형상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보통 신지학에서는 “삼계”라고 하는데, “물질계, 아스트랄계, 멘탈계”를 말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욕계, 색계, 무색계”에 상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의 최종적 깨달음은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하고, 그것을 니르바나라고 합니다. 신지학에서도 소우주적 영적 완성의 경지를 물질계, 아스트랄계, 멘탈계의 환영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합니다. 연기의 세계라면 그런 삼계의 모든 경험을 일컫는 불교식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온개공”이라 할 때, “색수상행식”의 “오온”도 연기와 다른 각도에서 존재계를 바라보는 것이고, 결국 삼계에서의 인간의 경험방식을 서술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색성향미촉법”에서 “색성향미촉법”은 단순히 인간의 육체적 경험방식만이 아니라, 정신적 경험방식 일체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신지학의 세 가지 체들의 경험방식을 서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연기의 세계를 “육체/에텔체, 아스트랄체, 멘탈체”로 경험되는 “욕계, 색계, 무색계”를 아우르는 표현이라고 하면, 실체론적으로 이해하게 되어서, 그런 세계가 실제로 명백하게 구분되어 칸막이가 쳐져 있듯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실체론에 빠지기 쉽습니다. 사실상, 삼계에 대한 이해나 세 가지 체들에 대한 이해는,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 의식이 비롯된다고 할 수 있는 “부디 의식”이 어느 정도 활성화되어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됩니다. 삼계에서 가장 원인적인 세계라고 할 수 있는 세계는 멘탈계라고 할 수 있는데, 세 가지 체에서 가장 원인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멘탈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상위 체에 의해서만 하위 체가 인식되고 이해되듯이, 부디 의식이 활성화되어야만 멘탈체의 작용과 그 실체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비로소 하위 세 가지 체에 대한 본격적인 통제력이 작용할 수있습니다. 아직, 인류의 대다수가 아스트랄체에 경도되어 있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멘탈체를 넘어서는 부디 의식의 영역을 감지하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경험하는 멘탈적인 존재방식은, 아스트랄체와 멘탈체의 경험이 뒤섞인 것이 대부분으로, 어디까지가 아스트랄체의 존재방식이고 어디까지가 멘탈체의 존재방식인지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의 멘탈적 경험은 하위 멘탈체의 활동에 중심을 두고 있어서, 멘탈체의 작용을 감지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추상적 사유나 보편적 원리에 대한 사고가 더욱 어렵습니다. 멘탈체에 집중된 삶을 사는 사람들을 세간에서는 지성인이라고 말하고, 물질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세상에서 주도적으로 대중의 의식을 선도해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멘탈체의 상위 영역에 속하는 추상적 관념의 세계를 접하고 그것을 구현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일 뿐이고, 인류사에서 지성적 사유의 높은 경지를 이룩한 사람들이 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말은 사실상 부디 의식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대해서 고도의 철학적 방법을 적용하면서 지성적으로 이해하려고 해도, 그런 노력 자체가 이미 멘탈체의 활동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이해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습니다. 부디 의식이 완전히 활성화된 상태에서 영적 실재의 세계를 경험한 이후에, 가장 높은 상위 멘탈체에다 부디 의식의 경험이 최초로 각인되었을 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말 그대로 “그냥 이해하는 것”이지, 일반적인 사유과정을 통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지학에서는 그런 기능을 “직관”을 통한 인식이라고 합니다. 반야심경의 모든 메시지에서, 바로 그런 부디 의식의 경험이 상위멘탈체의 정점에서 표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최상의 만트라라고 하고, 신성한 주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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