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길에 대한 개인적 생각 6

http://theosophy.or.kr/index.php?mid=freebbs&page=16&document_srl=12573

수행의 길에 대한 개인적 생각 6

明水

http://theosophy.or.kr/index.php?document_srl=12573

2007.05.16 01:06:10 (*.94.241.248)

4156

온전한 깨달음은 완전한 포기의 다른 이름입니다. 
현대의 도시문명사회에서, 특히 정보네트워크가 지나치게 활발한 시대에서 제대로 수행한다는 것은 무척 힘들고 요원한 일인 것 같습니다.

금강승(밀교)의 중요한 텍스트인 "84명의 성취자들"에는 전문적인 승려나 수행자만이 아니라 장삿꾼, 사냥꾼, 창녀, 학자, 정치인 등이 성취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용하고 언제든지 조금만 벗어나면 고요한 곳에서 명상에 들 수 있고, 해가 넘어가면 달리 할 일이 없어서 긴긴 밤시간을 명상과 수행에 임할 수  있었던 시대에나 가능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생계수단이란 것이 주로 육체적 노동을 요하는 직업들이래서, 마음을 그리 수고롭게 할 필요가 없어서 쉽게 마음의 집중을 이룰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는 어떻습니까? 결코 그런 시대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가 알 수 있습니다.

이곳 현재의 티벳불교의 현주소도 거기에서 예외는 아닙니다. 어떤 티벳의 고위 라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거에는 평생에 단 한 가지 가르침을 받아서 평생 수행해서 많은 사람들이 수행을 성취하고 완성을 이루었는데, 현대로 오면 올 수록 수많은 가르침들이 전해져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심오한 영적 수행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고 받을 수 있는데, 정작 수행을 성취해서 완성을 이루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다고.

우리는 해가 저물어 어두워져도 할 일이 많고, 부지런히 일하지 않으면 생존에 낙오할 수도 있는 급박한 현실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끝없이 우리의 오감을 사로잡는 자극에 노출되어 있고, 어느새 그런 자극이 없이는 불안해서 하루도 살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인터넷과 대중매체에 길들여진 우리는 더욱더 실천력을 잃어가고 편한 것에 익숙해져 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과 관련된 정보에 노출되어 있게 되었지만, 반대로 우리는 실천적 수행이나 관심에는 점점 더 멀어졌습니다. 이제 깨달음이나 영적 완성도 인터넷상에서 회자되는 주제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욱더 단편화되어서 영적 수행이나 깨달음에 대해 쉽게 타협하고, 실감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의식은 숱한 정보들의 집합체가 되어 있고, 그 정보들이 저장된 방의 하나가 "수행"이고 "깨달음"이고, "영적 완성"입니다.

스승이 없이는 진정한 영적 수행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스승의 존재성은, 영적현실을 확인시켜 주는 증인이고 동반자입니다. 스승은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세계의 가이드이고, 그 길을 몸소 걸어본 실질적인 안내자입니다. 스승을 만날 때부터 영적 수행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진정한 수행의 시작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세계를 앞에 직면했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고, 그 때 비로소 스승의 존재성이 있는 것입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세계를 눈앞에 두고서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전혀 알 수 없는 절망과 열망이 뒤섞인 절실함 속에, 이제는 내 삶에 어떤 새로운 것도 없고, 그렇다고 돌아갈 수 있는 현실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음을 알 때, 비로소 스승의 존재성이 떠오르고, 그 때 스승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인도가 낳은 현대의 위대한 스승인 요가난다는, 수행자가 한 걸음 다가갈 때, 신은 천 걸음 다가온다고 말했습니다. 요가난다가 그의 스승 유크테스와를 만나는 장면은 지극히 감동적인 것입니다. 우연히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낯선 길을 헤매던 어린 소년은 길 한 복판에 앉아있는 유크테스와를 만납니다. 소년은 마치 헤어졌던 어머니를 만나는 어린 아이처럼, 스승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한 마디에 스승 앞에 엎드려 절을 하고 스승의 존재성을 확인합니다. 그의 스승에 대한 헌신과 믿음은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유크테스와의 스승은 라히리 마하사야로서, 그의 스승 바바지와의 만남은 더욱더 극적입니다. 평범한 철도청 직원으로 일하던 라히리 마하사야는 전근을 간 지역에서 우연히 산책을 하던 도중 스승 바바지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이미 결혼을 해서 처자식을 거느린 가장이었습니다. 그는 바바지 앞에 엎드려 잊혀진 모든 기억을 회복하고 스승의 존재성을 확인합니다. 바바지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잠든 채로 생사의 강을 건넜을 때, 나 또한 너와 함께 생사의 강을 건넜다."

영적 스승의 고귀함과 절실함은, 그가 제자를 위해 여러 삶을 함께 하면서 각기 다양한 모습으로 제자에게 현현하면서 일정한 시기가 될 때까지 인내하면서 제자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단 하나의 제자를 위해서 수천년을 물질계와 영계를 넘나들면서 함께 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 그 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으며, 그 보다 더 큰 희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죽음에 이르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태어나는지 모르면서 잠든 삶을 살고 있을 때, 어떤 한 존재가 여실히 깨어서 생사의 강을 함께 넘나들고 있다는 것을 직접 경험해본 사람이면, 눈물을 떨구면서 자신의 한 평생을 오로지 영적 수행과 완성에 바칠 수 밖에 없음을 절절히
깨달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너무나 유한하고 덧없어서,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함부로 죽음이 무섭지 않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죽음은 실제적인 사건이고, 예행연습이 허용되지 않는 단 한번의 중대한 순간입니다. 죽음 앞에서 버텨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석가세존께서도 여래보다 더 강한 자가 있는데, 그가 바로 죽음의 신이라고 했습니다. 삶의 무상한 실상을 모르는 사람은 아직도 삶이란 허황스런 단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사람일 뿐입니다. 인생을 어설프게 긍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대한 긍정은 다만 삶에 대한 집착을 가장한 변명일 뿐이고, 임기응변식의 눈가림일 뿐입니다. 오직 영적 완성을 이룬 존재만이 삶을 진정으로 긍정할 수 있을 뿐이고, 그 때까지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온갖 선택의 기로에서 불안감을 안고서 결정의 순간을 뒤로 미루고 싶어하는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 가만히 앉아 있는 가운데, 어딘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무의식적으로 소름이 끼치는 공포감에 휩싸이는 존재들입니다. 

지금은 영적 수행과 깨달음에 관심을 갖고 고민하면서 모색을 하고 있지만, 과거의 생에서 우리가 그런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었는지 확신할 수 없고, 다음 생에 우리가 이 생의 연장선에서 영적 관심에 삶을 쏟을 것이라고 누구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전혀 영적 정보를 얻을 수 없는 황량한 곳에서 오로지 생존을 위해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할 삶을 살게 될 수도 있습니다. 모처럼, 아니,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어진 기회인지도 모릅니다.

나로빠가 더 이상 안주할 수 없는 현실을 직면하고서 미련없이 날란다 대학을 떠나서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삶을 시작했다는 것이 의미심장한 사건입니다. 밀라레빠가 많은 사람들 죽이고서 더 이상 자신에게 보장된 것이 없다는 절실한 인식을 했을 때, 비로소 그는 스승을 찾아나섰습니다.  어느 날 밤, 갑자기 찾아온 죽음의 경험을 한 17세의 라마나 마하리쉬는 더 이상 예전의 삶을 살 수 없었습니다. 그는 집을 떠나 아루나찰라로 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영적 부름에 이끌려 갔다고 하지만, 그는 그가 비로소 진정으로 살 수 있는 삶을 향해 떠난 것입니다.

Previous
Next Pos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