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길에 대한 개인적 생각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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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의 길에 대한 개인적 생각 4

明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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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4 00:47:28 (*.94.241.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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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본격적인 명상의 과정은 "사마타"와 "위빠사나"로 나뉩니다. 

보통 "집중명상"과 "통찰명상"이라는 말로 대신하기도 합니다. 혹은, "지"와 "관"이라 하기도 합니다.

집중명상의 핵심적인 목표는 흔들림없는 고요와 평정을 찾는 것에 있고, 통찰명상은 집중명상의 고요를 바탕으로 해서 본질적 지혜를 얻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앨리스 베일리를 통해서 전해진 DK대사의 가르침을 비교해서 설명하면, 집중명상은 아스트럴체를 통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통찰명상은 멘탈체의 통제와 그로 인한 부디체의 자각과 연결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윤회와 고통의 원인을 두 가지 장애, 즉 번뇌와 미세한 무지에 원인을 두고 있습니다. 번뇌를 가라앉히는 것은 가능해도, 근본적으로 없애는 것은 오직 미세한 무지의 제거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앨리스 베일리의 가르침을 비교하면, 번뇌를 없애는 것은 아스트털체의 통제, 미세한 무지를 제거하는 것은 멘탈체의 통제를 목표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미세한 관념들과 개념들을 관찰하면서 사고작용을 분석하고 통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정과 욕구의 동요와 산만함이 어느 정도(?) 극복되어야 합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감정적 동요와 욕구의 대립은 미세한 상념들의 변화에 기인하기 때문에, 먼지가 잔득 낀 거울로는 사물을 제대로 비추어볼 수 없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감정과 욕구의 통제를 넘어가면, 진정으로 번뇌의 작용을 통제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은 통찰명상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그것은 집중명상과 통찰명상이 절묘하게 결합되어서 명상이 진행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집중명상이 이루어지는 정도만큼 통찰명상이 성취된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말일 것입니다.

아스트럴체의 방해와 산만함과 치달음이 가라앉아서 통제되기 시작하면, 미세한 멘탈체의 작용을 감지하고, 어떻게 하나의 관념이 감정적 욕구적 경험을 유발하고, 심지어 소위 정신적 이미지와 사고 작용이 이어지는지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민감한 관찰은 나아가서 미세한 관념 하나가 감정적 육체적 변화를 어떻게 유발하고 지속시켜 나가는지 알게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멘탈체의 미세한 관념의 변화들을 관찰하고, 그러다 보면 관념들이 어떻게 해서 생기는지 무엇을 원인으로 해서 생기는지 인식하는 단계가 됩니다. 그것은 관념을 넘어선 다른 세계에 대한 자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영적 세계 내지 비이원적인 세계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 때 기능하는 것은 부디체의 기능이고, 멘탈체와 부디체는 미세한 의식적 연결점을 확보하게 됩니다. 그 때 비로소 인간에게 의식적인 영적 지각 능력과 인식 능력이 생긴다고 합니다.

불교적 명상에서 통찰명상도 그와 유사한 경로를 밟는 것 같습니다.

집중명상을 통해서 마음의 고요가 성취되면, 명상의 과정은 미세한 상념들과 개념들을 다루는 차원으로 발전합니다. 그 결과 성취되는 것을 불교에서는 무아, 즉 실체하는 것이 없는 공성의 진리라고 합니다.

미세한 상념들을 넘어서 상념들의 실체가 없음을, 즉 특정한 상념이 특정한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인식이 생깁니다. 그것은 일체가 개념으로서만 존재할 뿐이지, 그 개념들의 지시대상, 즉 그 개념들의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통찰이 이어집니다. 여기에서 불교적 명상, 특히 티벳불교적
명상은 크게 두 가지로 갈라집니다. 귀류논증파의 주장을 따르면, 일체가 개념으로서만 존재할 뿐 그 개념들이 가리키는 대상이 진정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오고, 자립논증파적인 주장을 따르면 일체의 개념적 작용을 넘어서 그 개념적 작용을 가능케하는, 공하면서도 작용을 가능케 하는 의식의 작용을 동시에 인정하게 됩니다. 간단한 말로, 공성과 자각이 하나인 인식이 이어지게 됩니다.

티벳불교의 밀교 수행은 후자의 관점, 즉 공성과 자각이 하나임을 전제로 해서 펼쳐집니다.

집중명상과 통찰명상의 과정에서 주의할 것은, 불교의 철학적 문제들이 거론되고 분석되는 경지가 사실은 통찰명상 단계에서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의 철학적 문제들을 집중명상을 얻지 못한 단계에서 다루면서 혼란에 빠집니다. DK대사의 말을 빌면, 현재 인류의 대다수는 아르스털체의 지배를 전적으로 받고 있기 때문에, 명료한 통찰과 사고를 한다는 것은 무척 어렵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대다수의 인류는 집중명상을 성취하는 것조차 어렵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교의 역사에서 각종 문제들을 다루고 연구했던 논사들과 학자들과 수행자들은 기본적으로 집중명상을 성취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간혹, 그들의 이야기가 뜬구름잡는 것처럼 여겨지고, 괜히 쓸데없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만 같이 느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기도 합니다. 흔한 말로 탁상공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감정적 욕구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명료한 사고를 전개할 수 없는 단계에서는 당연한 평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많은 수행자들이 집중명상이 진행되면서 많은 함정에 빠집니다. 평소에 들끓던 감정적 혼란에서 어쩌다 벗어나게 되면 극도의 고요함과 평화로움에 휩싸이게 되고 흔한 말로 무념무상과 지복감에 빠지고 나아가서 자신의 의식의 편재를 경험하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넘지 못하고 자기만족감과 자아도취에 빠진다고 합니다. 그 정도의 경험도 흔치 않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보다 낮은 단계의 경험들에 도취되는 경우가 허다한데, 소위 말하는 신비적 체험들이 거기에 해당
합니다. 그것은 집중명상의 과정이 진행되면서 야기된 인체 내의 미세한 에너지 흐름의 변화와 관계있습니다.

단순한 생리적 신경적 기능 변화가 야기한 기이한 체험들이 그것들입니다. 미세한 에너지 변화는 평소에 잠재해 있던 욕구와 바램, 공포와 불안한 감정들이 중첩되면서 온갖 다양한 현상들을 표출시키고, 때로는 영적 통찰을 가장한 고상한 비전과 관념들 속에서 빠져 있게 됩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통찰명상과 같은 단계의 명상은 매우 수준이 높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힌두적 전통의 즈냐나 요가 역시 그 수준이 상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의 혼란이 가라앚아서 무엇인가가 명료한 의식이 펼쳐지는 것 같을 때, 즈냐나 명상을 통해서 실재를 경험했다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집중명상은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 돌과 잡초를 뽑아내어서 씨앗을 뿌릴만한 밭을 준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돌과 잡초만 뽑아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거름도 주어야 하고, 흙은 깊게 뒤집어서 단단한 부분을 없애서 산소의 소통과 수분의 소통을 원활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계정혜의 계에 해당합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이웃들과 송사가 있으면 모두 청산하고 성전에 들어가라고 하신 말씀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날의 상거래와 이해관계 속에서, 혹은 끊임없는 감정적 선택이 이어지면서 생각에 생각을 해야 하는 일상적 생활 속에서 통찰명상은 고사하고 집중명상의 초보적인 단계조차 성취하가기 쉽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집중명상을 성취하는 과정을 통찰명상 과정과 혼동합니다. 평소에 하도 복잡하고 피곤한 정신적 환경에다 어느 정도의 집중된 환경을 마련했을 뿐인데, 그것을 통찰명상의 단계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씨앗을 뿌릴 준비가 된 텅 빈 밭도 문제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금세 잡초가 생기고 흙은 엉겨붙고 말라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씨앗을 심는가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썩어빠진 씨앗을 심거나, 건강하지 못한 씨앗을 심는다면,  혹은 토양과 기후에 적합하지 못한 씨앗을 심는다면, 결과는 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수행의 길은 험난하고 험난해서 소위 말하는 영적 완성을 이루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계를 완성하는 것이 70퍼센트라면, 정(집중명상)을 완성하는 것은 20퍼센트이고, 나머지 10퍼센트가 혜, 즉 통찰명상으로, 그 통찰명상을 통해서 비로소 무엇인 진리이며 거짓인지, 어떻게 해서 번뇌가 생겼으며 어떤 과정을 통해서 현상계가 펼쳐졌으며, 나라는 존재가 어디서 비롯되었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인식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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