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탁한 세상에서 자본주의적인 보살도가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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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 사업이라는 자본주의적인 일을 통해서도 중생을 돕는 것을 추구할수 있을까?
세상에서 일을 할 때, 사람들에게 혹은 자연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통해서도 이윤을 추구 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의식발전도 도모 할수 있다.
자본주의는 돈이 최고라는 기형적인 생각을 키워 왔고 그로 인해서 많은 부작용을 만들어 내고 있지만 돈이 가지는 효율성과 확산성 동기부여 등의 긍정적인 장잠이 많아서 세상 많은 법칙처럼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이 윤리적인 의식만 잘 유지할수 있다면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수 있다.
벌은 꿀을 탐하는 과정에서 움직일수 없는 나무의 수분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된다. 자신의 씨를 퍼트리기 위해서 벌을 유혹하는 화려한 꽃과(광고판) 그안의 꿀(임금)은  자본주위 시스템과 많이 닮아 있다. 이 과정에서 벌과 나무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
어쩌면 돈(자본주의)은 우리 몸속의 피나 자연의 바람과 같이 에너지를 나르는 매개체의 역할뿐인지도 모르겠다. 바람이 불때 공기가 나쁘다고 비판할수 없으며 물이 쓰나미의 원인이 아닌 것과 같다. 돈은 다만 힘의 전달자 역할을 할 뿐이다. 그 힘(진동)을 발생시키는 것의 근원은 우리의 머리속 생각이다.
매개체들을 비판할 필요도 추구할 대상도 아니다.
그리고 일부 언론에서 사건사고 등의 인간의 부정적인 면을 호도하고 그런 사조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 처럼 말하지만 대다수인 소시민들은 오히려 성실하고  도덕적인 경우가 많다. 그들이 있기에 이 세상은 유지되고 있다. 농장에서 일꾼이 일을 하지 않는데 어찌 땅주인이 배불리 먹을수 있겠는가?
마치 소수 기득권층 본인들의 자녀를 군대에 보내지 않기 위해서 대중들에게 영향력이 큰 연예인들의 군입대를 장려하는 것과 같다. 본인들의 이득을 위해서는 타인이 그 공간을 메워줘야 하는 것이다.
언론에서 각종 사건사고, 미디어로 인간의 탐욕적인면을 과장하면 소시민들은  자신도 양심을 따르지 말고 부만을 쫓자고 생각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양심을 팔게되고 그런 상태의 인간은 돈과 그것을 가진자들의 농간에 더 저항할수 없게 되어 버린다. 나중에는 일을 하는 기계로 전락한다.
사회에서 가르치는 것에 더 충실한 소신민들 일수록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기 마련이다. 본인의 지식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 좋을 정도로 면면히 깊게 박혀 있다.
어쩌면 이런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는 인간 역사에 항상 있어 왔엇던 것이고 어느 역할을 맡던지 간에 작용과 반작용의 틀을 벗어날수가 없게 된다.
결국 현상계는  우리가 사는 차원에서 일어나는 작용의 진실을 볼수 있는 사람만이 이러한 틀에서 벗어날수가 있는 게임이다.
이것이 해탈이라 불리우는 것인데 그러한 존재들은 또 다시 무지한 존재들을 위해서 육신을 기지고 오는 보살도를 행한다.
해탈이라는 것은 거창해 보일지 몰라도 결국은 좋고 나쁨이 없는 양극화의 세상(게임)에서 벗어나는 것인데 그 벗어난 세상의 또 다른 이름이 사랑이나 그리스도의 5차원적인 영역이다. 그런 절대적 사랑의 차원에 들어간 존재들이 다른 인간을 돕기위해 육신을 가지고 다시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론이다.
법화경에서 세존께서는 3승법을 방편으로 이야기 하였고 해탈에는 오직 일승법만이 있다라고 이야기 하셨다. 세상의 공함을 알아 일체의 고통을 여읜 본인만이 평안을 찾겠다는 소승이 애초에 불가하다는 말이다. 이는 금강경에도 잘 나오는 내용이다.
모든 것이 헛된 것을 깨달아 해탈한 존재가 그 절대적 사랑의 상태에서 중생들의 고통을 통감하여 다시 육신을 타고 보살행을 하는 것을 보자면 해탈과 보살도는 일맥 상통하는 것이며.  오히려 해탈 이후에 보살행이 따라오는 것처럼 보인다. 대승불교에서 보살을 더 높이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께서 석가모니 이전에 이미 성불하신 존재라는 것은 어쩌면 나무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든다.
물론 화엄교학의 사사무애 이사무애 처럼 보살도(방편)와 공성(지혜)은 어느 것이 먼저한다라기 보다는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준다라고 보는 것이 맞겠다. 결국은 티벳 밀교의 지혜와 방편, 서양에서는 플라토의 중용이 되는 것이다.

우주의 법칙중하나는 모든것이 연결되어 끊임없이 양극과 크고 작음의 여러차원을 순환하고 서로영향을 주며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와서
현실에서 돈에 영혼은 판자들은 사악한데, 어떻게 사악한 것들과 사악하지 않게 대적할 것인가?
간디의 비폭력 저항처럼 사악함에 사악으로 대응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양극의 카르마를 만드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경쟁이라는 특성을 지닌 양극화 세상에서 어떻게 사랑이라는 핸디캡을 가지고 상대의 적대적 경쟁을 이길수 있을까?
바로 창의력이다. 사랑의 영역에서 주어지는 감로수는 바로 창조력이다.
다행이도 지금의 사회에서 새로운 기술(창조력) 이 가지는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 파괴력의 피해자는 악이고 수혜자는 우리 모두가 되는 것이다.
티벳 밀교를 비롯한 많은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남을 아끼고 사랑하는 보리심을 배양해서 사랑과 창조력의(지혜) 무기를 들고 현실(방편)이라는 전투에 임할 것인지  남을 공격하고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세속의 악한 무기를 선택할 것인지는 본인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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