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슨 vs 테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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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슬라도 영감을 이용해서 발명을 했다는 내용입니다.

1882년 2월 테슬라는 힘든 상황과 고된 일로 쇠약해진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공원을 찾았다. 공원을 거닐면서도 그의 머릿속에는 전기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순간 테슬라는 그간 생각하던 모터와 발전기의 결합이 스쳐가며 확고한 모습이 떠올랐다. “난 모래에 나뭇가지로 교류시스템을 그렸다. 내가 보았던 이미지들은 뚜렷하고 명백했다”고 그 당시의 모습을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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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슨 vs 테슬라
세상을 밝히는 싸움을 벌이다
2011년 02월 27일 (일) 00:55:15주상호 기자  jsh6294@hanyang.ac.kr
“난 하나의 기계로 1천 개, 아니 1만 개의 전등을 만들 수 있다” 에디슨이 1878년 9월 신문 ‘뉴욕 선’에서 언급한 말이다. 발명가이자 사업가인 에디슨은 생에 최고의 발명품인 전구로 세계 곳곳에서 사업을 벌일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에디슨의 직류시스템은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송신 거리가 1마일의 한계를 가진 점이다. 그 틈을 비집고 무명의 전기공학자 테슬라는 비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테슬라, 전류 전쟁을 준비하다
  
 
 ▲ 교류 시스템을 발명한 니콜라 테슬라 
 

1880년 가을, 에디슨이 그의 멘로파크 실험실에서 직류 전기 중앙발전소 개발에 힘쓰고 있을 시기 니콜라 테슬라는 스물넷의 나이로 보헤미아 프라하라는 오래된 도시의 대학에 진학 중이었다.

당시 테슬라는 매일 전기에 대한 환상에 몰두했다. 그의 마음은 모터와 발전기를 어떻게 결합시킬지 반복해서 검토하면서 모터들의 다양한 디자인들을 고안했다. 그러나 1년 후 아버지의 죽음으로 테슬라는 공부를 중단하고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이사한 후 지인의 소개로 한 전화회사에서 일하게 됐다.

1882년 2월 테슬라는 힘든 상황과 고된 일로 쇠약해진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공원을 찾았다. 공원을 거닐면서도 그의 머릿속에는 전기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순간 테슬라는 그간 생각하던 모터와 발전기의 결합이 스쳐가며 확고한 모습이 떠올랐다. “난 모래에 나뭇가지로 교류시스템을 그렸다. 내가 보았던 이미지들은 뚜렷하고 명백했다”고 그 당시의 모습을 회고했다.

  
 
 ▲ 1888년 전구의 보급으로 도심에 전선이 얽혀있다. 눈보라로 전선들이 끊어지거나 마비되기도 했다. 후에 전선들은 땅 속으로 묻히게 됐고 도심을 벗어난 지역에서도 전구를 밝힐 수 있게 됐다. 
 
테슬라는 그해 4월 전기공학자에 대한 부푼 꿈과 함께 파리로 향했다. 당시 파리는 에디슨의 직류시스템을 이용한 전구로 인해 거리가 밝혀져 있었고 테슬라는 파리의 전기에 매혹됐다. 테슬라는 파리에서 수준 높은 전기수리능력과 더불어 불어와 독일어에 능통해 에디슨 전기회사로 들어갔게 됐다.

테슬라는 직류 시스템의 한계를 깊이 고심하며 자신의 교류시스템이 이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후 에디슨과 만나게 된 자리에서 테슬라는 교류유도전동기를 설명했고 교류시스템에 대해 알렸다. 테슬라는 교류발전기가 직류 전기의 단점인 1마일의 족쇄를 해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후에 테슬라는 에디슨이 “교류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교류에는 미래가 없으며 그 분야에 몰두했던 모두가 자기 시간을 허비하고 있고, 게다가 직류는 안전한 데 반해 교류는 죽음의 전류”라고 응답했다고 전했다.

테슬라는 에디슨에게 자신의 생각이 묵인된 후 교류 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해 뉴욕에서 에디슨의 직원으로 1년도 일하지 않고 나왔다. 이후 자신은 교류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나가 현재의 직류 시스템을 교류로 대체하기 위해 교류에 관한 특허들을 당시 엄청난 자본력과 탁월한 경영능력을 지닌 조지 웨스팅하우스에게 로열티를 받으며 팔았다.

웨스팅하우스는 사업 1년 후에 68개의 교류 중앙발전소를 건설했다. 그는 전기의 새로운 선도주자로 유명해져 에디슨의 가장 큰 경쟁자로 나타났다. 테슬라는 웨스팅하우스와 함께 전류전쟁의 수면위로 올라왔고 에디슨과의 전쟁이 시작됐음을 알리고 있었다.
에디슨, 전쟁을 선포하다
  
 
 ▲ 직류 시스템으로 전구를 보급시킨 토머스 에디슨 
 

웨스팅하우스의 사업능력과 교류의 이점에 위험을 느낀 에디슨은 평소 알고 지냈던 기자에게 편지를 보냈다. “웨스팅하우스는 어떤 크기의 교류시스템을 설치한 후 6개월 내에 한 명의 고객을 죽일 것이다. 교류를 실용적으로 작동하기 위해 수많은 실험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결코 위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곧 전기의 표준을 향한 싸움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1887년 말 에디슨은 맨해튼을 중심으로 외곽지역에 121개의 직류 중앙발전소를 건설했다. 그러나 에디슨은 지속적인 방해에 부딪히고 있었다. 직류발전소를 설치했을 때 반경 1마일밖에 전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이상에 전기를 보내기 위해서는 더 높은 전압이 필요한데 비싼 구리 값으로 인해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의 교류발전소는 전체 마을에 쓰일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에디슨은 지금이야말로 직류산업에 사활이 달렸음을 깨닫고 웨스팅하우스를 향한 적의를 계속해서 키워나갔다.

한편 1887년 11월 초 미국 뉴욕 주 사형위원회는 교수형보다 품위 있는 대안을 찾았다. 사형위원회는 에디슨에게 편지를 보내 전기를 통해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지에 대해 발명가의 의견을 구했다. 그해 12월 9일 에디슨은 위원회에게 답장을 보냈다. “가장 바르고 고통 없는 죽음은 전기 사용에 의해 이뤄질 수 있고, 그 목적에 가장 적합한 장치는 이 나라에서 웨스팅하우스에 의해 생산되는 ‘교류장치’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이들 장치에서 나오는 전류는 가장 가볍게 접촉만 해도 즉사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 무렵 브라운이라는 무명의 전기공학자는 전류전쟁의 중심 속으로 들어와 교류 전기의 위험성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했다. 브라운은 “나는 정의감으로 논쟁에 이끌렸고, 어떤 회사의 재정적ㆍ상업적인 이익도 대표하지 않았다”고 전하면서 “교류와 직류의 차이에 대해 토론했고 반복적 실험으로 생물체가 직류에 더 잘 견딜 수 있음을 증명했다”고 밝혔다.

브라운은 시연을 하기 위해 커다란 검은 리트리버 개를 이끌고 나타났다. 개에게 재갈을 물리고 우리에 집어넣었다. 개의 저항은 1만 5천옴이었다. 브라운은 직류 300볼트부터 시작해 점점 높이기 시작했다. 직류가 400볼트를 넘어가자 개는 발버둥 쳤고 전압을 1천 볼트까지 증가시켰을 때 청중들은 브라운에게 그만두라고 소리쳤다. 브라운은 그제야 직류 실험을 중지했다. 곧 조수는 교류장치를 개에게 부착했고 330볼트가 리트리버에게 흘려보내졌다. 그러자 개는 순식간에 쓰러져 숨을 거뒀다. 이 실험을 통해 브라운은 교류 전기가 더 낮은 전압에서 직류보다 더 큰 위력을 가진다는 것을 보였다. 그러나 이 실험에서 보여준 것과는 달리 실제 전기가 피해를 입히는 것은 전압이 아닌 전류였고 교류와 직류의 차이 또한 없다.

1888년 2월 에디슨은 더 이상 웨스팅하우스에 대한 비밀스런 공격으로 만족하지 않았고 그해 에디슨은 84쪽짜리 교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담긴 책자를 발간함으로써 미국 기업사에 남을만한 전기 전쟁을 시작하는 역할을 했다.

에디슨의 이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중앙발전소에서 장거리 운행이 가능한 교류의 이점으로 인해 전세는 이미 기울어졌다. 직류 중앙발전소 개수보다 교류의 중앙발전소가 더 많이 생겨났고 직류의 한계를 극복한 교류를 사용해 도심에서 26마일 떨어진 나이아가라의 폭포수를 사용해 뉴욕주를 운용할 수 있는 발전소를 만들었다.

1894년 2월 한 유명잡지 ‘센추리’에 테슬라에 대한 인물소개가 나갔다. 그 기사는 테슬라를 찬미하는 기사였다. “테슬라는 몽상가로 평가받아왔다. 하지만 그의 전문적인 동업자들은 커가는 확신을 느끼고 있다. 이제는 테슬라가 몽상가가 아님을 몸소 보여줬다” 유명잡지에 실린 기사는 자연히 뉴욕 언론이 관심을 갖도록 자극했고,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전류전쟁 그 이후토머스 에디슨과 니콜라 테슬라는 전기를 세계 곳곳에 퍼뜨리고자 끊임없이 꿈꿨다. 그러나 전류전쟁은 결과적으로 웨스팅하우스를 앞세운 테슬라의 승리로 끝이 났다. 교류 기술은 전기용량에서 놀라운 진보를 계속했는데 기관차, 자동차 등 어떤 것에라도 동력을 공급할 수 있을 만큼 싸고 풍부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이후 테슬라는 교류 전기를 계속해서 발전시켰다. 그러던 중 공황으로 인해 교류 산업에 자금난을 겪자 교류 로열티를 포기했다. 이후 테슬라도 무선 전송 장치, 원격제어 장치 등 새로운 개발을 시도했다. 그러나 당시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많은 재력가들에게 외면을 받았다. 교류 로열티를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수모도 받지 않았을 뿐더러 연구를 하고도 충분히 남을 금액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발명을 거의 하지 못하게 된 테슬라는 말년에 비둘기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고 모든 친척들이 유럽에 있었는데, 새들에게서 가족 같은 동료의식과 일종의 위로를 받았던 것이다. 또 테슬라는 다친 새를 발견하면 그 새를 자신의 방으로 몰래 들여와 다시 건강을 되찾도록 간호했다.

1943년 1월 7일 눈이 그의 방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제2차 세계대전이 전 지구를 흔들었을 때 여든여섯의 테슬라는 무일푼으로 그의 침대에서 혼자 죽음을 맞이했다. 그렇게 세상을 밝힌 발명가가 세상을 떠났다.
한편 에디슨은 발명가이자 기업가로서 삶의 마지막 10년을 보내며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됐다. 전류전쟁에 패해 전력분야에 거의 손을 땐 후에도 광석, 영화 장비 등을 발명해 다시 사업을 펼쳤다. 언론은 여전히 에디슨을 주요인사로 다뤘고 그의 유머러스한 소견은 기자들을 기쁘게 해주며 실망시키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 1914년에 그의 실험실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힐 만큼 큰 화재가 발생했다. 그런 상황에서 에디슨은 “오 시시한 것, 그게 맞아요. 우리는 이제 방금 많은 오래된 쓰레기를 없앴지”라고 말했다.
전기는 많은 백만장자들을 창출했다. 에디슨도 전류전쟁에 패했지만 그에게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었고 이후 발명으로 다시 일어섰다. 총 1093개의 특허가 에디슨의 끊임없는 노력을 보여준다. 반면 테슬라는 세상 구석까지 빛을 선사해줬지만 정작 본인은 제대로 된 빛을 받지 못해 씁쓸함을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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