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교란 무엇인가? 8 (달라이라마) - 금강승과 바라밀다승의 차이

밀교란 무엇인가? 8 (달라이라마) - 금강승과 바라밀다승의 차이

사임당|11.02.23|32목록댓글 0

밀교란 무엇인가? 8 (달라이라마) - 금강승과 바라밀다승의 차이

 

1. 비슷한 가르침

 

(1) 세가지 상속 

 

탄트라(밀교)는 한자로 '속(續)'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이는 상속(相續)을 줄인 말로써, 마치 흐르는 시냇물과 같다는 뜻이다. 따라서 밀교를 ① 근속(根續) ② 도속(道續) ③ 과속(果續)의 세 가지로 분류한다.

① 근속(根續)이란 수행자의 근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무상요가부의 비밀집회인 구화삼마자 탄트라
에 따르면, 수행자를 다섯 가지 종성(種姓)으로 구분하고 있다.

첫째는 백련종성(白蓮種姓)

둘째는 청련종성(淸漣種姓)
셋째는 홍련종성(紅蓮種姓)
넷째는 전단종성(전단種姓)
다섯째는 진귀한 보배종성(珍寶種姓)이다.


근속(根續)은 자성이 이러한 종성들 속에 머울러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자성은 달리 법계. 불성. 여래
장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근(根)'이라 부르는 까닭은 이것이 수행의 근본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 

② 도속(道續)이란 수행자를 정화하는 수행 방법이다. 밀교의 하삼부에서는 이 수행 방법을 유상요가와 무상요가로 나누며, 무상요가부에서는 모든 업장을 정화하는 생기차제와 직접 부처의 자성자리로 들어가는 원만차제로 나눈다.

 

③ 과속(果續)이란 과위(果位)인 법신(法身), 곧 모든 허물을 다 떠나 원만하기 그지 없고 최고의 위치인 지금강의 지위이다.

밀교부의 경전에는 이 근속과 도속과 과속의 세 가지 탄트라가 모두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밀교경전
들의 주석서에도 수록되어 있다.

 

 

(2) 보리심과 공성

 

 

바라밀다승에서는 오직 수행자들에게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한 보리심의 원력과 육바라밀행을 강조할 뿐, 다른 수행의 방편에 대해서는 설하지 않았다. 금강승에서는 이 기초 위에 특별히 수승한 방편법을 더 설하고 있지만, 진언승 역시 보리심의 원력과 육바라밀행을 수행하기 때문에 종카파 대사는 '오직 이 두 가지 수행 방법만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일체 중생을 이익케 하기 위해 불과(佛果)를 성취하겠다'는 보리심에 대한 견해는 바라밀다승이나 금강승이 다르지 않다. 현교와 밀교 수행자는 다 일체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최고의 깨달음인 무상정등정각을 구한다. 그 성취 또한 모든 허물을 여의고 덕을 구족하는 것을 체(體)로 하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불과(佛果)이다.

깨달음의 지견 또한 바라밀다승과 금강승이 다르지 않다. 금강승에서의 중도에 대한 해석은 용수보살
이 바라밀다승에서 가르친 것과 다르지 않다. 공성의 지혜는 성문. 연각. 보살. 부처 모두의 공통분모이다. 그러므로 대소(大小) 이승(二乘)은 방편으로 나누는 것일뿐, 지혜로써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바라밀다승과 금강승 또한 방편으로 나눌 수 있을 뿐, 지혜로써 나눌 수 없다. 종카파 대사는 대. 소 이승이나 바라밀다승. 금강승이 그 지견에 있어서는 다른 점이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견이란, 관상의 대상인 공성의 맑은 빛인 정광(淨光)이요, 공성을 관하는 지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샤카파의 조사인 샤캬뺀디다(Sakyapandita)는 금강승이 바라밀다승보다 더 높은 지견을 가지고 있다
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그러한 지견을 가지고 있다면 한다면 반드시 이변(二邊)의 희론(戱論)에 떨어지게 되고 만다. 곧 중관(中觀)이란 이미 희론을 여읜 것인데, 만약 '각 승들의 지견이 다르다'고 한다면 반드시 이변의 희론에 떨어지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구역 닝마파에서는 현교와 밀교의 지견이 다르다고 하였고, 그 다른 점을 능관(能觀)에 의거하
여 구분하였다. 또한 닝마파에서는 능관(能觀)인 혜식(慧識)과 소관(所觀)인 공성(空性)에 대해 분명한 구분을 짓지 않고 있다. 비교적 높은 단계의 수행 차원에서는 능소가 서로 융합되어 하나가 되기 때문에, 그 차이점을 말하는 것은 언어나 문자상의 운용에 불과할 뿐이다.

 

 

(3) 정광(淨光) 

 

 

삼매 속에서 공을 관할 때에는 능소(陵所)가 하나가 되어 차별이 없는데, 이것은 평소의 언어 개념으로 형용할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상을 여의고 언어가 끊어진 경계라고 한다. 이 경계에서는 방편과 지혜가 둘이 아니요, 대락(大樂)과 공성(空性)이 차별이 없으며, 일체의 희론과 분별이 없다. 그리고 진제(眞諦)와 속제(俗諦)가 둘이 아니게 되는데, 이와 같이 깊고 심오한 교외별전(敎外別傳)의 가르침은 모든 언설을 다 동원하더라도 그 뜻을 명확히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곧 닝마파에서는 소관(所觀)인 정광(淨光)과 능관(能觀)인 정광(淨光)이 전혀 차별이 없는 경지에서 
그 성품의 본질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견해에서 본다면 바라밀다승과 금강승도 다른 점이 없다. 겔룩파의 쟘양샤파는 소관(所觀)인 정광(淨光)을 '공성(空性)'이라고 하였는데, 이 관의 대상이 되는 '소연경(所緣境)에 대해서는 현교와 밀교의 가르침이 다르지 않다.

그러나 능관의 정광이 지극히 미세한 구생정광심(俱生淨光心)이라는 가르침은 오직 무상요가부에서
만 있고, 밀교의 다른 부파나 바라밀다승에는 없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구역인 닝마파에서는 능소 정광을 분별이 없는 본성자리라 하여 '희론분별을 여읜 자리'라고 하였다. 그 자리는 본래 청정하다 하여 티베트어로 '까닥(본연 청정)'이라 이름하였는데, 그것은 긍정의 부정으로, '공성(空性)'과 같이 단순한 부정은 아니다.
신역(新譯)인 샤카파. 까규파. 겔룩파에서는 이 정광을 '승의광명(勝義光明) 원만차제'라 하였으며, 승
의제(勝義諦)라고도 하였다. 또 바라밀다승 중관자속파에서는 '은유승의제(隱喩勝義諦)'라 하였다.

일반적으로 정광은 공성(空性)을 소연경(所緣境)을 삼은 심식(心識)을 가르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상요가부에서 세속의 원만차제인 환신(幻身)과 승의의 원만차제인 정광(淨光)을 가르
칠 때, 그 승의(勝義)는 공성을 가리키는 것이지, 공성을 관하는 수행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때 능관인 마음과 소관인 공성이 전혀 다르거나 차별이 없으므로 '승의제' 또는 '은유승의제(隱喩勝義諦)'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상과 같이 신역 여러 종파의 논술에서의 '승의제(勝義諦)'라는 명사를 자주 사용하였는데, 그 뜻이
'공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이치로 볼 때에는 밀교와 현교 사이에 지견상의 차별이 있다. 그러나 종카파 대사가 설한 지견은 소관은 소관의 정광이 공성임을 가리킨 것이요, 이 공은 이미 이변(二邊)의 희론을 다 여읜 경지이므로 밀교와 현교에 있어 차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4) 그 밖의 비슷한 점 

 

또한 육바라밀 수행법으로 바라밀다승과 금강승을 나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금강승 역시 밤낮을 여섯 등분하여 수행할 때 한 차례는 오직 보시. 지계. 인욕 등의 육바라밀을 닦는 시간으로 정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바라밀 수행 여부를 두고 이 두 승을 구분하여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부처님의 색신을 성취하는 근본 요결은 방편에 있으므로, 자비로써 인을 삼아 일체 유정들을 이롭게 하는 보리심을 일으켜야 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법신을 성취하는 근본 요결은 공성을 통달한 지혜이다. 

현교와 밀교가 이 두 가지 수행 방편에서는 다른 점이 없다. 하물며 수행 차제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바라밀다승과 금강승을 분별하는 근거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예리하고 둔한 수행자의 근기를 가지고 이 두 승을 분별할 수는 없다. 만약 이러한 이치가 성립된다면 바라밀다승 자체에 보다 많은 다른 승(乘)들이 생겨나야 했을 것이다. 또 수행자의 수행 진도가 빠르고 늦은 정도를 두고 이 두 승의 차이점으로 삼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바라밀다승 가운데에도 수행의 진도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5) 욕망과 수행 

 

 

다시 이 두 승의 다른 점은 기(氣). 맥(脈). 명점(明點)을 수행하여 대락(大樂)을 일으키는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 대락은 무상요가부의 불공(不共)의 수승한 방편이지 기타 밀교부에서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 또한 이 두 승을 분별하는 근거로 삼기에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두 승을 분별할 것인가? 금강승은 욕망을 이용하여 도(道)로 닦는 수행자를 위해 설한 것이고, 바라밀다승은 욕망을 여의고 청정범행을 의지하여 유정들을 섭수할 수 있는 수행자를 위해 설하였다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나눠야 한다고 하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왜냐하면 바라밀다승이나 금강승이나 모두 욕망을 여의지 
않고 정진 수도하는 수행법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욕망을 여의고 정진 수도하는 방편도 구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오물을 이용하는 방법을 잘 아는 농부는 마을에서 나오는 오물들로 농토를 기름지게 할 수 있듯이, 
번뇌로써 수행을 삼는 이치 또한 그와 같다. 만약 수행자가 어떻게 번뇌로써 유정 중생들을 이익되게 할지를 안다면 그 번뇌 또한 공덕 자량을 모으는 힘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치로 본다면 수행자가 반드시 욕망을 일률적으로 다 여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번뇌
의 본질적인 견해로 보면 욕망은 반드시 버려야 하는 것이다. 탐심(貪心)과 진심(瞋心) 등의 번뇌를 완전히 버리지 않는 현교의 대승보살들 또한 그 번뇌를 이용하여 중생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다. 예를 들면 국왕의 신분을 나툰 보살이 많은 후궁들을 거느리고 왕자들을 많이 낳아 함께 국가의 복리를 위해 노력하는 것과 같이, 번뇌를 중생에게 이로움을 줄 수 있는 증상연(增上緣)으로 바꿀 수가 있는 것이다. 현교의 수행에 있어 보살이 어떤 때는 일부러 번뇌를 버리지 않고, 오히려 번뇌로써 수행을 돕는 인연으로 삼기도 한다. 밀종의 수행에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보살은 시절 인연에 맞추어 방편을 쓰기 때문에 번뇌를 전환하여 도(道)로 쓸 수 있다.

좀더 미세한 관점에서 보는 사람들은 '현교와 밀교를 나눌 때 이 두 승을 수행할 수 있는 수행자의 근
기가 욕망을 이용하여 도(道)로 쓸 수 있는지의 여부로 판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간단히 예를 들면 욕망을 네 가지로 운용하는 것이다.

  ① 서로 바라보는 것(相神)
  ② 서로 마주보고 웃는 것(相笑)
  ③ 서로 손을 잡는 것(相孰手)
  ④ 서로 합하는 것(相和合)

이러한 네 가지 욕망을 통하여 네 가지의 희열(四喜)을 일으켜서 수행의 조연(助緣)으로 삼는 것이다. 
이 설은 확실히 밀교의 네 부파 가운데서 나온 것이다.그러므로 바라밀다승과 금강승의 수행자 가운데 바라밀다승은 욕망을 도(道)로 이용할 수 없는 반면에 금강승은 가능하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그러나 이것을 이 두 승을 분별하는 이치로 보기에는 여전히 부족하다. 이것은 오직 이 두 승의 수행자의 근기가 다름을 드러낼 뿐이다. 그러므로 그 또한 바라밀다승과 금강승을 구별하는 방법은 아니다.

 

 

출처 : 달라이라마라의 밀교란 무엇인가 / 달라이라마 저, 석설오 역 

로종 블로그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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