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교란 무엇인가? 9 (달라이라마) - 금강승의 수승한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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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교란 무엇인가? 9 (달라이라마) - 금강승의 수승한 점

사임당|11.02.23|24목록댓글 0가가

밀교란 무엇인가? 9 (달라이라마) - 금강승의 수승한 점

 

(1) 부처의 색신(色身)을 관상한다

 

바라밀다승과 금강승의 차이를 말하자면 두 승(乘)의 수행 방편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그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과위(果位)와도 관련이 있다.그러나 두 승의 궁극적인 과위는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두 가지 모두 불과(佛果)를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다른 점은 마땅히 불과를 증득하는 수행 방편 가운데 있어야 한다. 

방편으로 말하자면 대승은 소승에 비해 우월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승의 방편은 유정들을 이익되게 하는 무상보리심을 발심 동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대승 가운데 바라밀다승과 금강승은 방편에 의지하여 구분된다. 요약해서 말하면 부처님의 색신을 성취하는 수행법을 방편으로 섭수하고, 부처님의 법신을 성취하는 지혜로써 섭수하였는데, 부처님의 법신을 얻고자 하면 법신에 수순(隨順)하는 도를 수행해야 한다. 바라밀다승과 금강승은 다 부처님의 법신에 수순하는 지혜의 도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곧 삼매를 닦아 허공과 같은 공성을 통달하는 길이다.

부처님의 색신을 성취하고자 하면 부처님 과위의 색신을 수순하는 길을 수행해야 하는데, 오직 금강승만이 이러한 불공(不共)의 수행방편을 가지고 있다. 금강승의 수승함은 바로 이 방편에 있다. 부처님의 색신과 비슷한 몸의 현상을 수행의 대상인 소연경(所緣境)으로 운용하는 것으로, 이것은 현세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마음 속의 번뇌를 여의고자 하면 반드시 공성을 관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성불을 원만하게 하는 방편은 아니다. 왜냐하면 공성을 닦음으로써 오직 자성이 있다고 하는 '자성유(自性有)'의 지견과, 이러한 지견을 통해서 생겨난 여러 가지 번뇌를 없앨 수 있을 뿐이다. 만약 부처님의 원만한 상호와 색신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다시 다른 수행을 해야 한다.

원만하고 빠르게 성불을 성취하는 방편법은 밀교의 수행법 가운데 본존 요가를 수행하는 길이다. 이 수행을 의지하여 본인이 바로 진정한 본존불이라는, 곧 부처의 원만한 과위를 성취하는 '불만(佛慢)'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32상과 80종호의 수승하고 부처의 원만한 색신을 갖춘 몸을 성취하려면 수행자는 부처의 몸과 비슷한 모습의 몸을 관상하는 것은 공통의 성취를 얻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부처의 과위에서 불공(不共)의 원만한 색신을 성취함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길이다.

바라밀다승에서 '소지장(所知障, Jneyavarana)을 정화하려면 공성의 지혜 외에도 이타의 큰 원력과 육바라밀행을 수행의 조력(助力)으로 삼아야 한다. 보시. 지계. 인욕 등의 육바라밀은 무량한 중생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수승한 방편이며, 이러한 방편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바로 불과를 증득할 때 성취하게 되는 부처의 색신이다. 이 몸이 바로 무량한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 사업을 할 수 있는 부처의 색신인 것이다.

제법의 실상을 통달하는 지혜는 부처의 무분별지(無分別智)이다. 그러므로 이 지혜를 통해 불공의 성취가 이루어지며, 바로 일체 번뇌를 다 여의고 지혜 법신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색신과 법신의 두 가지 몸은 다 홀로 증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몸은 서로 방편과 지혜의 두 자량을 통해 성숙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두 자량은 색신과 법신의 공통되는 인(因)이요, 조연(助緣)이다. 

예를 들면, 안식(眼識)이 작용하는 데는 세 가지 연이 필요하다. 첫째는 대상이 되는 경계(所緣境)이고, 둘째는 안근(眼根)이며, 셋째는 '보는 순간에 작용하는 식(識)이다. 안식은 물건의 색깔과 형상을 구별할 수 있을 뿐, 소리는 구별할 수 없다. 눈이 무엇인가를 보고 구별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보는 순간에 작용하는 의식'의 자취인 것 때문이다. 안식이 어떤 사물의 영상을 보고 작용할 때 그것은 바로 그 사물의 자취인 것이다. 이 세 가지 연 가운데 각각의 연에 안식이 작용할 때 각자 스스로 그 자취를 가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지혜와 방편과 색신과 법신의 관계도 그와 같다. 지혜의 자취는 법신이요, 방편의 자취는 색신이다.

바라밀다승을 '수승하다'고 하는 까닭은 부처의 무분별 지혜의 성취상인 법신의 방편을 설해 놓았고, 능히 무량한 유정 중생들의 마음을 성숙시킬 수 있는 색신을 성취할 수 있는 방편을 설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라밀다승에서 설한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하는 수행방법은 오직 육바라밀밖에 없다. 하지만 보시. 지계. 인욕 등을 수행함과 과위의 색신을 수순하지 않는 인을 통하여 부처의 정각을 증득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지 않다. 심오한 법신의 구족과, 원만하고 장엄한 색신의 구족이 서로 어우러져 하나가 되어야 불과를 증득할 수 있으며, 이것은 본성에 수순한 인(因)을 수행하였을 때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수행자는 법신에 수순하여 무아의 지견을 수행함과 동시 색신에 수순하여 광대한 수행방편을 닦아야만 하는 것이다.

 

 

(2) 본존의 몸

 

 

금강승의 '수승함'은 무엇보다도 본존의 몸에 있으며, 수행도상에서 '수승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본존의 몸을 선명하게 관상하고 스스로가 본존이라는 불만(佛慢)을 일으키는 것이다. 또 이러한 수승함을 통하여 과위에서는 일체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 사업을 성취할 수 있다. 이를 구경의 수승함이라 한다. 본존 요가의 수승함은 대일여래와 같은 본존들의 성품이 본재 공하고 무량하고 청정한 원만상을 구족하고 있음이다. 그리고 청정하고 더러운 모든 법의 성품이 비록 다 공하기는 하지만, 그 성품의 공한 법 또한 차별이 있기 때문에 두 가지를 다르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금강승에서 말하는 방편과 지혜의 쌍운(雙運) 또는 지혜와 방편의 쌍운은 방편과 지혜를 서로 융합하여 하나로 하는 것뿐만 아니라, 방편과 지혜를 모두 한 마음으로 성취함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지혜와 방편의 쌍운을 근본으로 삼아 수행하면 성불할 때 무분별의 지혜 법신과 함께 본존의 모습이 그대로 현현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본존의 몸을 관상하기 전에 마땅히 '자아(自我)의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도리(人非自性有)를 확실하게 알아야 하며, 다음으로 공관(空觀)을 의지하여 '이 몸의 성품 자체가 공하다'는 마음으로 본존의 몸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자성이 본래 공하다는 결정적인 수승한 지혜를 반연하여, 수행자는 즉석에서 본존의 얼굴과 팔 등의 상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혜로운 마음으로 본존의 몸을 나타내고, 아울러 '이 몸이 자성이 없다'는 결정적인 수승한 지혜로써 자성의 지혜와 본존요가의 심식이 본래 동일한 체성이라는 것을 통달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자취는 각각 다르다. 세속의 관점에서 볼 때 방편과 지혜가 비록 동일한 체성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차별이 존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방편을 배제하고는 방편이 아니요, 또한 지혜를 배제하고는 지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수행자가 본존의 몸을 반역하여 '내가 곧 본존'이라는 불만(佛慢)을 일으킨다는 것은 불만의 진제와 속제를 다 구족하고 있다는 뜻이다. 어느 논사(論師)는 말하였다.

"마음은 공성으로써 '요별경(了別境)'을 삼고, 본존의 몸으로써 현경(顯境)을 삼는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심식 가운데 수승한 지혜를 구족하고 있기 때문에 무자성을 통달하게 되고, 동시에 나타나는 것들을 구족하고 있기 때문에 본존의 몸의 상을 분명하게 드러낼 수가 있다. 따라서 내가 곧 본존의 몸의 상을 분명하게 드러낼 수가 있다. 따라서 내가 곧 본존이라는 불만에는 공성을 관함과 본존의 몸을 관하는 진제와 속제의 두 가지 수행문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공의 뜻이 공성의 분별식을 반연하여 드러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경전 가운데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 공성을 구족한 법은 분별식이 저 공성을 반연할 때 드러날 수 있다.
둘째, 공성을 통달했을 때 이 소연경(所緣境)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종카파 대사가 지은 『보리도차제광론』에서는 공성을 구족한 법이 분별식 가운데서 드러날 수 있다고 설하신 듯하다. 그러나 각 사찰의 교재 가운데에서는 두 번째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종합해서 말하자면 수행자는 공을 관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 심식이 공성의 수승한 지혜를 여러 차례 반복하여 수행한 다음, 이 마음으로 나타나는 것들의 근본을 삼을 수 있다는 결정적인 지혜를 내어 본존과 본존의 궁전과 만다라에 의지하여 염력을 일으킴으로써 비로소 본존과 같은 불만(佛慢)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수행자가 이러한 불만을 자주 반복하여 수행하면서 생사윤회의 근본인 '자성이 있다고 집착하는 자성유견(自性有見)'을 줄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방편과 지혜의 쌍운법은 사실이 아닌 환(幻)을 이용하여 본존을 관하는 것이다. 이것은 긍정의 부정으로, 자성이 없는 것으로서 오히려 실체적인 상을 구현해 내는 것이다. 수행자가 이러한 심념(心念)이 익숙해지게 되면 최종적으로 무상요가부에서 말하는 최상품의 원만차제의 '유학상운(有學相運)'의 지위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이 과위는 색신과 법신의 '등류신(等流身)'을 의지하여 현증(現證)하게 되는 것이다.
이 '도위(道位)'의 색신과 정광심(淨光心)의 지혜는 불과의 직접적이면서도 진정한 인(因)이다.

 

 

(3) 관법이 수승하다 

 

 

이제 금강승과 바라밀다승의 뚜렷한 차이점을 밝히면, 금강승은 부처님의 색신을 성취할 수 있는 불공(不共)의 방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수행자가 오직 본존만을 관상하고 공성을 관상하지 않으면 지혜를 성취하기에는 부족하다. 반대로 오직 공성만을 관하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비록 바라밀다승이 성불의 길을 설하여 놓았지만, 오직 바라밀다승을 의지해서는 구경의 원만한 불과를 성취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바라밀다승에서 설하는 공성을 관하는 등의 방편으로 수행하면 깨달음을 성취할 수는 있는데, 반드시 무량겁의 장시간 동안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속히 정각을 이룰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사실 수행자가 부처의 색신을 수순하는 인행(因行)을 닦지 않으면 성불을 할 수가 없다. 바꾸어 말하면 부처의 몸을 관하는 수행을 통해야만 불신(佛身)을 증득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마땅히 수행자는 본존불을 관상함에 있어 본존불의 형상이 분명히 눈앞에 나타날 때까지 끊임없이 수행해야 한다. 마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을만큼, 또한 상황에 따라서는 다른 대상에게 자신이 본존불의 모습과 똑같은 장엄상을 나투어 보일 수 있어야 비로소 원만히 성취가 된 것이다.

바라밀다승에서는 수행자가 발원과 계청등의 기도를 수행함으로써 부처의 색신을 증득하고자 하는 사람도 발원을 하는 것으로 족할 뿐, 굳이 공성을 닦는 수행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실로 불과(佛果)는 공성을 관하고 본존의 몸을 관상하는 두 가지 수행을 함께 하는 '심현(深顯)불이(不二)'의 수행을 통하여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에, 두 가지 원만한 수행차제가 부족한 상태에서는 성불할 수가 없다. 이것은 밀교의 하삼부가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도리이며, 무상요가부에서만 가지고 있는 특별한 견해가 아니다.

사부(끄리야 탄트라)와 행부(짜리야 탄트라)에서는 상단이변(常斷二邊)을 여읜 구경의 청정법신은 무상(無相)요가를 의지하여 증득하게 된다고 하였고, 상단이변(常斷二邊)을 갖추고 있는 청정하지 않은 색신은 유상(有相)요가인 본존요가를 의지하여 성취된다고 하였다. 요가부(요가 탄트라) 중에서 '오상증보리(五相證菩提, Abhismbodhi)의 다섯단계는 바로 이 본존요가를 설한 것이다.

'심현(深顯)불이(不二)'의 수행은 금강승의 근기를 가진 수행자가 마땅히 해야 하는 수행이기는 하지만, 모든 금강승 수행자들이 닦아야 하는 유일한 길은 아니다. 자신을 본존으로 관상할 능력이 안 되는 수행자에게는 자신을 본존으로 관하지 않고 눈앞의 허공에 본존불을 관상하는 '대생본존(對生本尊)'의 수행법을 닦으며, 만트라를 염송하고 기원을 하는 등의 방편법이 있다.

금강승에서 섭수하고자 하는 정기(正機) 수행자란 원만한 진언 수행을 받아 행할 수 있는지를 말하는데, 그들이 받아야 하는 가르침 중에는 반드시 자신을 본존으로 관하는 '자성본존(自成本尊)'의 수행법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몸 안에 각 차크라를 이용한 금강염송(金剛念誦)이나 보병기(寶甁氣) 등의 풍요가(風瑜伽)를 수행함으로써, 여러 가지 다른 성취를 얻게 되고 본존요가의 형상을 더욱 더 견고하게 할 뿐 아니라 진여실상(眞如實相)을 통달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4) 만다라와 관정

 

 

밀교의 수행 특징 가운데 하나는 만다라(慢茶羅) 행법과 관정(灌頂)이다. 만다라란 '깊고 깊다'는 뜻이다.
왜 '깊고 깊다'고 풀이하는가? 만다라를 관상 수행함으로써 해탈과 일체지에 장애가 되는 것들을 대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러한 장애를 일으키는 미세한 습기까지도 끊어 없앨 수 있다.

실로 지혜가 부족한 사람은 만다라의 실제 의미를 통달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만다라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직 신심만 구족하면 되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을 이익하게 하고자 하는 보리심을 발하는 것이 꼭 필요하지도 않고, 이타(利他)의 보리심이원만히 성숙되지 못했을 때도 만다라에 들어가 관정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규제는 있다. 무상요가부의 두 가지 차제를 수행하는 사람만이 비로소 만다라에 들어가고 관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만다라에 들어가고 관정을 주는 의식을 아주 정중하고 진지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일을 엄격히 구별해서 행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티베트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관정을 전수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지금강불께서 전수한 원만한 수행차제에는 여러 가지 다른 단계의 차제들이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면 오직 만다라에만 들어갈 수 있는 의례가 있고, 만다라에 들어가 감로와 법관(法冠: 오방불의 모자)관정 등을 받을 수 있는 의례가 있다. 법규에 의거하여 행할 때, 라마는 관정을 전수하기에 앞서 관정을 구하는 제자가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수지하여 삼마야를 잘 지킬 수 있는가를 반드시 관찰해야 한다. 신심은 구족하고 있으나, 그릇을 감추지 못한 제자에게는 오직 만다라에 들어가는 것만을 허락할 뿐, 그에게 관정을 주는 것은 거절하도록 되어 있다. 만약 여법하게 이러한 명문 법규들을 지킬 수 있는 제자가 있다면 관정의 진실한 모든 뜻을 감추어야 한다.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법규들과 제도를 준수하지 않고 행하기 때문에, 스승과 관정을 받은 제자들이 함께 장애를 불러들이게 되는 것이다.

옛날 까규파의 한 갈래인 둑빠까규파에 전해져 내려오는 한 이야기가 있다. 둑빠꾼렉이라는 사람이 마침 한 라마가 관정을 전수하는 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때 라마가 있는 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다 엄숙하게 서서 합장을 하였으나, 둑빠꾼렉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자 라마가 그에게 빈정대는 어조로 말했다.
"내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일어서서 예경을 하는데, 자네는 참 예의가 없구만." 하지만 둑빠꾼렉은 도리어 이렇게 답하였다. "당신은 항상 많은 대중들에게 관정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삼마야의 서원을 어기게 하지 않았습니까?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지옥의 문을 열지 않았습니까?"

만약 우리들이 윤회의 실상을 조금이라도 사유할 수 있고, 진실한 인생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불교를 의지하여 선행을 닦고 마음을 조복받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너무 지나치게 지옥고의 상황과 죽을 날짜가 곧 닥치리라는 말들을 심각하게 설한다면 두려움으로 인해 마음이 오히려 위축될 수도 있다.
티베트의 어느 한 사원에 주지 라마의 설법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시자에게 물었다. "지금 주지 스님은 어디에 있소?"
시자 라마가 대답하였다.  "그는 지금 지옥 이야기로 노인네들을 놀래켜 주러 갔습니다."

만약 우리가 종교적인 수행으로써 의미 있는 인생을 성취하고자 노력한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먼저 우리는 마땅히 지성으로 불. 법. 승 삼보에게 귀의해야 한다. 다음으로 '별해탈계(別解脫戒: 재가 오계 또는 사미계. 비구계 등)'를 받고, 다시 이타 보리심의 원력을 발해야 한다. 그리고 밀법의 수행을 들을 수 있는 적합한 때가 되었다면 마땅히 『보살이십송(菩薩二十頌:Bodhisattva-Samvaravimshaka)』과『사사오십송(事師五十頌:Guru-panchashika)』을 배워야 한다. 그런 뒤에라야 비로소 관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꼭 명심하기 바란다.

 

 

출처 : 달라이라마라의 밀교란 무엇인가 / 달라이라마 저, 석설오 역 

로종 블로그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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