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의 조우 [정보의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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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생: 세계 각지에서 예전에 남겨진 불도신(佛道神)의 각종 장엄한 형상은 조각·그림으로 표현했는데 어떤 형식을 통하여 인간 세상에 남겨 내려온 것입니까? 

사부: 당신이 말하는 것은 그 부처의 형상을 인간이 어떻게 아는가 하는 것이 아닌가. 인류 도덕문명이 아주 좋은 시기는 인류도덕이 좋지 못한 시기의 사람과는 차이가 대단히 크다. 인류사회의 도덕이 높으면 신이 인간에게 펼쳐 보여주는 우주의 진상도 많은데 이것은 전체사회에 가져온 상태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사회는 안 된다. 오늘날의 사회가 신앙하는 것은 과학이지 신이 아니므로 갈수록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과학은 또 외계인이 인간에게 창조해 준 것이며 외계인도 이 공간의 생명인데 그것은 기타 행성(星球)의 생명에 불과하다. 프랑스 루브르 궁전의 그런 벽화들은 아주 많이 그린 것은 신의 일들이고 그린 것이 아주 진실한데 내가 보았는데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의 전성시기에 남겨진 것으로 다시 말해서 그것은 인류의 도덕이 가장 좋을 때, 신을 가장 믿을 때 남겨져 내려온 것이다. 그렇다면 많은 예술가들은 그도 경건한 기독교 신자인데 그럼 신은 바로 그에게 펼쳐 보여주며 그는 볼 수 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그의 순간 기억력이 아주 좋기 때문에 그가 그런 신들의 이런 광경을 보았을 때 그럼 그는 그것을 그려냈다. 나는 아주 비슷하게 그려졌고 아주 진실하게 그려졌다고 느끼는데 정말로 그러한 것이다. 아주 많은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벽화를 본 후 그런 신성하고 또 경앙(敬仰)하는 감이 우러나오는데 그런 위대한 신에 대한 경앙이다. 그 불상은 바로 이렇게 인류에게 남겨진 것이다. 
(1999년 5월 2일부터 3일까지 시드니에서)




~ 달라이 라마 존자님의 입보리 행론 법문 中 에서

반야심경에서 사리자와 천신의 형상인 관세음보살과의 질의응답 경우는 업이 정화된 사람에게 가능한 것이다 - 달라이라마 존자님
<반야심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불교경전 전체 속에서 <반야심경>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반야심경>은 대승불교 경전인 <반야경>들 중의 하나입니다.
이 <반야경>들을 부처님의 설법들 중 두 번째 범주에 속하는 ‘제2전법륜’의 핵심이 되는 가르침들을 담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의 가르침들은 부처님이 인도의 라자그리하의 영축산에서 가르친 설법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초전법륜은 ‘고통’과 ‘고통의 소멸’등을 강조한 반면에 제2전법륜의 가르침은 ‘공성’을 강조했습니다.
대승불교에는 부처님의 ‘제3전법륜’에서 설법한 가르침도 있습니다. 대승불교의 경전을 두 범주로 나누면 <반야경>을 해석한 경전들과 불성佛性이론을 설명하는 경전들이 있습니다.
<반야경>들은 공성 을 강조하기 때문에 제3전법륜에서는 그 경전들을 알아듣기 쉽게 해석해서 가르쳤습니다.
대승불교의 성향을 지녔지만 아직은 공성의 가르침을 제대로 수행에 적용할 준비가 안 된 수행자들을 위해서 제3법륜을 가르친 것입니다. 만일 그런 수행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반야경>들에 나타난 문자대로만 해석한다면 극단적인 허무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야부의 경을 영취산에서 설하실 때 장소가 광활해 무수한 천인무리가 함께 법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실제 영취산 설법 장소에 가보면 일이십 명이 다리를 오므리고 들어갈 수 있는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범부에게 공개적으로 설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공개적으로 설하신 것은 결집삼장입니다. 일반 역사에서도 이런 사실을 인정합니다.
여기에 비해 대승은 공개적으로 설하지 않았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역사학자들은 보편적인 역사적 사실을 기본으로 배열하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설하지 않아 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가르침의 내용을 생각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했지만 공개적으로 설하지 않으셨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업이 정화된 이들에게 설하셨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반야경에서 사리자와 관세음보살 혹은 수보리와 관세음보살의 질의 응답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사리자와 수보리는 인간의 존재이기 때문에 쉽게 서로 대화나 접근이 가능했지만 사리자와 관세음보살과의 질의응답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천신의 형상인 관세음보살과 질의응답은 업이 정화된 사람에게 가능한 것이지 업이 정화되지 않은 사람이 십지보살과 질의응답의 기회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때문에 업이 정화된 이들에게 설하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정해진 시간과 장소일 필요가 없습니다. 업이 정화된 중생이 있다면 부처님께서 나투어 법을 설하실 수 있습니다.
특히 밀교의 경이 불교인지 의심하는 이들이 나오게 됩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욱이 밀교는 그 중에서도 가장 업이 정화된 대근기에게 설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성천보살의 논서 가운데 오종성의 뜻을 풀이하신 논서에서도 말씀하셨듯이 무착행, 바라밀행, 유착행 세 가지로 소승행에게는 무착행을, 넓지 않은 이에게는 바라밀행, 심원함에 나아가지 않는 이에게는 유착행이라는 심행을 말씀하시고 비구의 모습인 부처님께서 만다라의 분노본존의 모습으로 변해 밀교경을 설했다고 인연을 밝힐 때 나오며 사실입니다.
그러한 가르침은 가장 업이 정화된 1,2명에게 나타나서 설하실 지도 모릅니다. 가장 업이 정화된 이들에게 설하셨음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그러한 가르침을 부처님께서 살아계셨던 동안-80세 정도 사셨지만 그 동안 설해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후에 근기가 되는 이들에게 나타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티베트에 종파를 떠나 많은 스승들께서 부처님뿐만 아니라 용수보살과 성천보살을 직접 친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쌀마(후에 발전한 새로운 종파)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닝마(기존의 종파)에서 해심밀이라는 것이 나오고 성천보살이 나타나 어떤 본존에 의지할 것인지 말씀하고 그에 맞는 비밀의 가르침과 수행법이 나오는 것입니다.
업이 정화된 특별한 이들에게 만다라의 본존이 나타나 특별한 비밀의 가르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달라이라마 밀교 설법 10편에서
그러나 오직 밀교의 하삼부 수행만을 의지하여도 현생에 성불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지나치게 밀교의 하삼부를 찬양한 찬사에 불과하다. 밀교의 하삼부 수행자도 모든 일반적인 공통의 성취를 하여 제불보살을 친견하고 법문을 들음으로써 제불보살의 가호 아래 빨리 정각을 성취할 수가 있다. 그러나 바라밀다승보다 빠르다고 하는 것은 오직 자량도와 가행도의 수행에서일뿐, 견도(見道)'와 '수도(修道)'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을 수행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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