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공]

단공1 [但空]
형태분석 : [但空]
【명사】
[불교] 소승 불교에서, 일체의 법을 공(空)하다고만 주장하고 유(有)의 측면을 생각하지 아니함.


반야심경-공즉시색 색즉시공, 화엄경 -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공부를 하면서 흔히 배우게 되고 익히게 되는 사상입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단공에 빠집니다.

단공은 여러 용도로 죽어야 할 에고가 자신을 방어할때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흥청 망청 욕망과 세상의 것을 탐닉하며 " 세상 별거 없는데 내 원하는대로 욕망을 채우자" 라는 에고의 합리화에 이용됩니다.

재벌과 나쁜 정치인들은 혹세무민의 정치를 하지만 물질의 풍요를 누리는데 내가 굳이 법규와 양심을 따라 살필요가 있는가?

인간 관계에 있어 상대가, 본인을 높여주거나 존중해주지 못한다는 에고의 신호를 받는 순간 "이 세상에 이렇다 할 것이 없는데 뭐가 잘나서 저렇게 떠드느냐  니가 뭐가 잘났느냐 라며 "공" 이라는 것이 에고의 "나" 를 보고하기 위한 명분으로 사용됩니다. 모든 것이 공한데 누가 무슨말을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오직 어리석은 생각만이 홀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낳습니다.

누군가의 청탁과 비리에 동조해야할때 신의와 선을 지키고 싶은 양심과 참나의 마음을 물리치고 "세상 별거 없는데" 라며 오악탁세에 빠지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누군가가 질투가 나고 누군가가 밉고, 화가나고, 무엇인가가 몹시 가지고 싶을때 그냥 니 하고 싶은데로 해 "세상 별거 없는데" 라며 에고가 가진 탐진치를 부추기는 역할을 합니다.

서양사상의 종착역 즈음에 나타난 현대 철학의 슈퍼스타, 비트겐 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와 철학적탐구라는 두 정반대의 사상을 내어 놓으면서 더딘 서양의 정신 문화에 공 사상을 설법하고, "있는 그대로" 라는 개념을 심어 놓습니다. 이는 대중문화로 흡수되면서 모더니즘을 거친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사조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물론 이미 1900년대 이전부터 언어철학 자들로 부터 이미 먼저 이런 개념이 나왔으며 어쩌면 비트겐 슈타인에 의해서 사회로 나타내어지고 유명해 졌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진 있는 그대로는 말그대로 위에 설명한 단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억압받는 대중들에게 자신감과 너희도 할수 있다라는 희망의 메세지라는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윤리적 도덕적 정신적 타락을 가져오고 에고의 노예로 살게 만드는 지배층의 강력한 지배 도구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시간과 돈, 노력이 드는 공부를 해서 지식을 쌓고, 열심히 살기 보다는 향락에 몸을 맡기게 만드는 역할도 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고 공하기만 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의미도 있고 공하지도 않습니다. 달라리 라마 존자 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많은 이들이 단공에 빠져 공하다 하는데 세상은 공하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에 의미가 있는 것 일까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출가를 하시게 된 계기는 아래와 같다고 합니다.

농부가 농사를 짓고 있는데 석가래로 밭을 가니 그안에서 벌레가 튀어 나오고 그것을 뱀이 잡아 먹고 얼마 안있으니 독수리가 날라와서 뱀을 잡아 먹는 모습을 보고 출가를 결심 하셨다고 합니다. (에너지가 순환하는 모습을 연기로 알게 되신 것 같습니다.)

우주는 법신불의 원리로 가득합니다. 봄여름 가을 겨울이 반복되고, 밤 낮이 반복되며, 인간도 태어남과 죽음이 반복되고, 모든 양극이 연결되서 순한되는 원리가 그 대표적인 한 예입니다.  세존께서 연기법, 무아, 회자정리, 항시 변화하여 같은 것이 없다 라고 설법을 하십니다.

이 연결된 것을 깨우친 자가 바로 불교경전에서 자주 언급되는 연각입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7%B0%EA%B0%81

(한자어 연각(緣覺)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연(緣)으로 깨쳤다'는 뜻으로 '12연기를 관찰하여 깨달음을 증득한 이'를 뜻한다)

엄연히 법칙이 존재하는 데 무엇이 공하다는 것 일까요? 

현실의 의미
http://beliveman.blogspot.com/2015/02/blog-post_21.html

읽지 않으셨다면 아래의 영화소개 글이나 영화를 보시기 바랍니다.

the youth 2015 영화
http://beliveman.blogspot.com/2016/01/youth-2015.html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오늘 말씀 드리고 싶은 내용은 우리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 공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해줄때는 한없이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다가도 서로 다툴때에는 세상의 원수처럼 생각하고 싸웁니다. 형제끼리도 유산 때문에 서로 싸우기도 하고, 서로 이념과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남북한을 가르고 죽창으로 형재 자매를 서로 찔러 죽이기도 합니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죽이기도 하고. 죽을 만큼 사랑하던 연인이 백년 해로를 약속하고 결혼을 해서 이혼할때가 되면 세상 최고의 적이 되기도 합니다.

법신불의 법칙은 우리의 의중과 상관이 없습니다. 우주의 법칙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쉼 없이 항상 지켜지고 작용하고 있습니다. 인과응보, 카르마도 사인파형처럼 매우 단순한 우주의 법칙중 하나입니다. 우매한 인간의 눈에는 당장 나타나지 않는 관계로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우주의 법칙은 매우 정확하게 적용됩니다.

하지만 인간은 올라가면 기쁨에 좋아하고 내려가면 고통에 몸부림 칩니다. 항상 올라감과 내려감이 정확히 절반이라면 굳이 좋아할 이유도 내려갔다 슬퍼할 이유도 없슴을 깨닫게 됩니다. 많이 알려진 색옹지마의 이야기와 같은 내용입니다.

어떤 마음이 일어나다면 왜 그것이 마음에 번뇌를 일으키는지 그 뿌리를 공부하는 비파사나를 통해 결국에는 마음의 작용이 공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우주의 법칙은 공하지 않으며 우리의 생활과 생각에 엄격하게 적용되며 , 우리 에고의 관점을 떠나 객관적인 법신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주는 매우 아름다운 공간이 됩니다.

많이 알려진 것 처럼 호불호를 없애면 객관적인 법신의 의중에 더 쉽게 다가가리라 생각합니다.

본인이 에고와 단공의 늪에 빠지시지는 않은지 항상 점검이 필요하고 본인의 생각과 감정에 의지하지 마시고 항상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시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달라이 라마 존자께서 대승의 법을 일반인이 듣게 되면 허무주의에 빠질수 있슴을 경고하고 계십니다.


대승불교에는 부처님의 ‘제3전법륜’에서 설법한 가르침도 있습니다. 대승불교의 경전을 두 범주로 나누면 <반야경>을 해석한 경전들과 불성佛性이론을 설명하는 경전들이 있습니다.
<반야경>들은 공성 을 강조하기 때문에 제3전법륜에서는 그 경전들을 알아듣기 쉽게 해석해서 가르쳤습니다.
대승불교의 성향을 지녔지만 아직은 공성의 가르침을 제대로 수행에 적용할 준비가 안 된 수행자들을 위해서 제3법륜을 가르친 것입니다. 만일 그런 수행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반야경>들에 나타난 문자대로만 해석한다면 극단적인 허무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야부의 경을 영취산에서 설하실 때 장소가 광활해 무수한 천인무리가 함께 법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실제 영취산 설법 장소에 가보면 일이십 명이 다리를 오므리고 들어갈 수 있는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범부에게 공개적으로 설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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