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역사는 우리나라와 너무나도 많이 닮았네요.
원문의 링크에 가서 보시길 바랍니다.
http://blog.daum.net/ytnkbsmbc/7592926
[기획]베트남:40년 만에 밝혀진 통킹만 사건
영국,일본,프랑스,미국등 외세에 시달린 역사
영국,일본,프랑스,미국등 외세에 시달린 역사
필자:유태영 박사 |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오판은 한결같이 현지인들의 역사, 문화, 정치 그리고 그 나라의 민중과 정치 지도자들의 성향에 대한 뿌리 깊은 무지와 몰이해를 반영하고 있을 뿐이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 베트남에 대한 올바른 조언을 제공한 군사전문가들이 없었다고 한다. 베트남의 비정규군이 결의와 용기에 가득 찬 민족정신의 투지를 가지고 미국제국주의 침략자들과 결사적으로 대항하여 싸울 때 미국의 근대적 최신 군 장비들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점을 바로 인식 하는데 미국은 완전히 실패했던 것이다.
미국은 베트남 민중이 눈물과 고난 속에서 자유해방을 갈망하고 있는 겉모습만 보았을뿐 베트남 민중의 시련을 통하여 터득한 서방에 대한 불신과 증오심 그리고 튼튼히 단련된 정치적 의식과 전투적 세력들을 완전히 오판 했었다고 분석된다.
베트남전에 관한 의사결정에 참여했던 미국의 케네디-죤슨 행정부는 미국의 원ː� 전통에 대하여 베트남의 원칙과 전통은 무조건 복종하고 따라야 한다고 하는 메시아적 충동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미국의 공화당이건 민주당이건 오늘 미국의 네오콘은<세계 모든 사람들이 미국처럼 되고 싶어 한다> 라고 판단하는 환상적 사고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하지만 베트남 사람들도 미국인들 못지 않게 자존심이 강하다. 베트남의 신념과 그들의 민족적 가치수호를 위한 투쟁을 아무도 이길 수 없다. 이와 같은 베트남 민중의 위력은 미국 제국주의와 단호히 싸워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
미국은 베트남전에서168대1의 사상자 비례를 기록하는 끔찍스러운 전투를 감행했다. 미국군인들이 베트공을 박멸하려는 잔인한 작전 계획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베트남 민중은 민족통일을 위해서라면 비록 시체로 태산을 쌓을지라도 반드시 이룩하고야 말겠다는 각오가 되여 있는 위대한 민족이었다. 그래서 미국 군인들이 제아무리 싸워 봐야 베트남의 최후의 승리는 당연한 귀결 이었다.
조국반도의 1.5배 크기의 베트남은 인구 8천만 명이며 약 75%가 농촌에 거주하고 있다. 종족은 베트남족이89%를 차지하고 있으며 화교100만 명을 비롯하여 50여종의 산악 소수민족들이 동거하고 있다. 종교는 불교 67%, 천주교 12%이다.
베트남의 건국설화는 중국의 건국설화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신농씨의 3대 후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오늘날 베트남인들은 3대 후손 중에서 훙브엉이 기원전2,919년에 베트남 국가를 세운 건국의 아버지로 여기고 있다.
기원전 257년에 중국 세력이 들어 오기 시작하여 그 후부터 약 1,100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 939년에 베트남은 중국의 지배를 물리치고 처음 독립을 쟁취했다. 1285-1288년에 중국의 원나라의 침략을 다시 받아 싸워야 했다. 그 후 베트남은 쩐 왕조 시기에 이르러서 나라의 안정을 이루고 불교가 번성하여 베트남의 국교가 되었다.
명나라에 의해 일시 침략을 다시 받았으나 레로이 왕조가 외세를 물리치고 15세기에 베트남은 건국 이래 최고의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은 여전히 베트남에 대하여 종주국 행세를 하려고 했다.
16세기에 레로이 왕조가 쇠퇴하여 베트남은 복의 <칭씨파>와 남의 <우옌씨파>로 분열되었다.17세기에 들어서서 베트남은 북과 남 사이의 항쟁이 계속 되었는데18세기 초에 중부에서 발생한 일대 반란으로 인하여 북과 남의 대립의 장벽은 모두 다 사라져 없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살아 남은 남쪽의 <우옌씨파>가 프랑스를 등에 업고 1802년에 통일된 <남 월국>을 창건하여 현재의 베트남 땅의 영역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 <남 월국>을 <응우옌 왕조>라고 불렀다.
<응우옌 왕조>의 제2대 황제 민망왕이 베트남을 통치하면서 외세 배제 정책을 감행하여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하는 반 서방 사건이 발생했다.그 동안 프랑스는 음양으로 베트남에 침투하여 특히 카톨릭 선교를 가장한 침략행위를 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상인과 군대와 더불어 천주교를 이용하여 베트남에서 식민지 기반을 공고히 하고 있었는데 영국과 경쟁하면서 일찍부터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한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프랑스 나폴레옹 3세는 베트남에서 선교사 처형사건을 핑계 삼아 1858년에는 다낭을 공격했고1884년에는 베트남 전역을 프랑스의 신민지로 삼았다.
프랑스 침략을 물리치기 위한 베트남 민중의 독립운동이20세기에 들어와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중국을 비롯한 외국에서 베트남 독립운동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 직전 파리에서 베트남 공산주의 운동이 태동되고 있었다. 베트남 민족주의 지도자 호지민이 파리에서 정치수업을 쌓고 있었는데 그는 1920년에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소수민족 자결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아1927년에는 드디어 <베트남 국민당>이 조직 되었고 1930년에는 호지민이 주도하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창설되었다. 이 조직은 그 후 각파의 정치세력을 규합하여<비엣민>을 설립하여 투쟁을 맹렬히 전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일본이 베트남에 침입하였다.일본군이 침입하자 프랑스는 그 동안 80여 년간의 베트남 식민통치를 완전히 포기하고 물러갔다. 하지만 <비엣민>은 베트남의 여러 민족주의 세력들을 규합하고 또한 가장 뛰어난 투쟁력을 발휘하면서 일본군을 대항하여 끝까지 싸웠다.
일본이 패전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됨에 따라 베트남이 해방되었다. 1945년 9월2일에 정치적 공백기를 이용하여 호지민은 재빠르게 정치적 결단을 발휘하여 하노이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 국제연합(UN)은 <연합군 일반 명령 제1호>를 공포하여 일본군의 <무장해제>라는 명목으로 중국군과 영국군이 베트남을 분할 점령했다. 이런 틈을 타서 프랑스는 <극동 원정군>을 베트남에 급파하여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진압 하고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를 다시 시작하는 계기로 삼았다.
중국은 역사적인 이유로 베트남에 장기주둔을 포기하고 <프랑스-중국협정>을 맺고 1946년2월에 완전 철수를 했다. 영국은 프랑스와 충돌하기는 했지만 이전에 베트남을 지배했던 프랑스의 압력에 못 이겨 영국군은 모두 다 철수했다.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베트남인 <바오다이>를 매수하여 그를 내세워 사이공에 친프랑스 괴뢰정권을 세우는 음모를 꾸몄다.
이것은815해방 후에 미국이 우리 조국반도를 남북으로 갈라 놓고 이승만이 주도하는 단독정부를 서울에 세우도록 부추긴 미국의 침략정책과 동일한 프랑스의 베트남에 대한 침략정책 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 미국이 주동하는 UN은 제 3세계에서 가는 곳 마다 둘로 갈라 놓는 역할을 했으며 결국 전세계를 동서로 둘로 갈라 놓은 냉전시대를 초래했다.
당시 호지민은 사이공에 세운 친프랑스 괴뢰정권에 맞서서 <월남 독립연맹>을 북부 하노이에 창건하여 동남아 최초로 공산주의 나라인 <베트남 민주공화국,월맹>을 창건 했다.
이로서 1945년을 기점으로하여 북부는 호지민이 주도하는 <월맹>이 장악하고, 남부는 프랑스가 장악하여 치열한 대결과 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 치열한 대결과 분쟁이 드디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유발시켜 <월맹>과 <프랑스>는 8년 동안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자행했다.
호지민은 공산주의자였으나 동시에 철저하게 민족을 사랑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프랑스가 베트남을 또 다시 강점하여 남 베트남에 친 프랑스 어용정권을 세우는데 대하여 재빠르게 대처하여 조직적이며 결사적인 투쟁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월맹을 눈에 가시로 여긴 프랑스는 공산주의에 대한 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미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미국은 공산주의 국가의 확대를 우려하여 프랑스에 막대한 군사지원을 제공했는데 2차 세계대전 때 쓰다 남은 잔여 무기들이 속속 제공 되였으며 프랑스는 이 무기들을 남 베트남의 군대에게 보급했다.
한편 월맹군도 중국과 소련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점차적으로 남베트남을 향하여 그 세력을 넓혀 나가고 있었다.
프랑스에 이용되고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는 남베트남 군인들은 사실상 월맹군을 항하여 적극적으로 싸울 의지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남베트남의 국민정서는 프랑스인들의 재차 베트남을 강점하고 있는데 대하여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호지민의 뜨거운 민족주의적 애국심을 이해하는 남베트남의 민중들은 낮에는 프랑스 편이고 밤에는 월맹의 지배를 받는 특이한 상황이 되어가고 있었다. 호지민의 애국적인 지도력은 월맹과 남베트남을 하나로 단결시키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미국의 군사원조를 받아 막강한 전투력의 우세를 과시하고 있던 프랑스는 위기를 느껴 총공세를 가하여 월맹군을 분쇄할 특별한 작전을 세웠다.
프랑스군은 제대로 무기를 갖추지도 못한 호지민의 월맹군을 깔보고 일방적으로 전차를 앞세워 총공세를 가하면서 단시일 내에 전쟁을 끝낼 것을 장담하고 있었다.
하지만 월맹군은 베트남의 절묘하게 생긴 자연적인 지형의 이점을 유효하게 활용 하는 게릴라전과 또 중국과 소련이 제공해 준 무기들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정규 군의 위력 이상으로 전투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치열한 전투가 계속 되면서 월맹군을 얕보던 프랑스군은 도처에서 사상자가 속출하고 전세는 시간이 흐를수록 프랑스군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전면적인 전선이 없는 게릴라전에서 월맹군은 야음을 틈타 여기저기에서 총격을 가함으로써 프랑스군을 정신 없게 만들었다. 게릴라전이 끝없이 계속되는 정글 속에서 프랑스군은 점점 헤어날 수 없는 수렁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어려워지자 프랑스군은 월맹군과 북베트남 전역을 초토화 시킨다는 작전을 세웠다. 특히 라오스 접경지역과 중국으로 부터 보급을 받는 지역을 차단하여 월맹군의 숨통을 차단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1951년11월20일에 프랑스군 사령관은 작전개시를 명령하면서 다음과 같은 오만한 언명을 했다. 프랑스 사령관 나바르 장군의 언명은 상식에 벗어난 군사령관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쌍스러운 말>을 내뺐고 있었다.
…전쟁은 여자와 같아서 덮칠 줄 아는 사람에게 몸을 맡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 만만하게 작전을 명령했다.
프랑스군은 대대적인 공수작전을 시작했다. 1만 6천명의 병사들이 수송기를 통 하여 낙하산을 타고 착륙했다. 월맹군은 어디론가 도망쳐 없어지는 것 같아서 마치도 전투는 이것으로 모두 다 끝이 나는 듯 했다.
프랑스군은 북배트남 <디엔비엔푸프>를 요새로 삼고 그곳에 활주로를 새로 건설하고 미국으로 부터 원조 받은 많은 전차들과 화포들이 대량 공수되었다. 월맹군들은 겁에 질려 숲 속으로 모두 다 도망쳤으리라고 프랑스군 사령관 나바르 장군은 생각하면서 안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덮칠 줄 아는 사람이 이긴다>라고 <쌍스러운 말>을 내 뱉은 프랑스 사령관 나바르 장군의 전투작전계획은 완전히 빗나갔다.
월맹군의 사령관 보구엔 지압 장군은 결코 만만한 지휘관이 아니었다. 그는 밤에 야음을 틈타 숲 속에 피신했던 월맹군을 모두 집결시켜 프랑스군이 요새로 만든 <디엔비엔푸르>를 완전히 포위했다. 프랑스군의 순찰 비행기 70대가 제아무리 감시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월맹군의 대 부대는 오직 달도 없는 밤에 자전거, 소,말등에 탄약과 식량을 지고 운반했다. 프랑스 대군이 요새로 만든 <디엔비에푸르>를 월맹군이 완전히 포위 하고 주위에 진을 치기 시작했다.
보구엔 지압 장군은 월맹군 전군이 이곳에 모두 집결하기 전에는 절대로 산발적 공격을 하지 않도록 엄명을 내렸다. 월맹군의 총병력5만명이 포위망에 집결이 완료되었을 때 비로서 죽은 듯 고요하던 <디엔비엔푸르> 적진은 갑자기 전장터로 돌변했다.
양측의 격렬한 폭격으로 주변의 정글에는 성한 나무 한 구루 없는 황무지로 변했다. 사방에서 몰려 들어와 공격하는 월맹군과 이를 방어하는 프랑스군의 전투는 프랑스군의 위력에 대한 헛된 믿음을 폭로하는 전투장이 되었다.
월맹군의 잘 계획된 기습에 당황하게된 프랑스군은 우왕좌왕 하다가 결국 방어진이 무너졌다. 실제로 프랑스군의 강력한 화력으로 월맹군의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지만 전우의 시체를 뛰어 넘어 계속 돌진하여 공격해 들어 오는 월맹군의 투지에 프랑스군은 도저히 이길 능력이 없었다.
프랑스군은 막강한 무기로 구축해 놓은 <디엔비엔푸르> 요새에서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 빠져서 프랑스군이 거의 궤멸되는 지옥으로 변하여 최후의 패전을 시인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결국1953년5월7일에8년 동안의 전쟁은 끝 났으며 프랑스군 사령관 나바르 장군은 월맹군 사령관 보구엔 지압 장군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이로서 프랑스는 치욕스럽게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군대로 알려 진 월맹군에게 항복하여 100년 간의 식민시대를 마감했다.
1954년에 프랑스는 제네바에서 휴전협정을 맺고 베트남에서 남과북 전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휴전 협정에서 협의한 총선시행의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모든 군대만 철수시키고 협의한 의무에 대해서는 무책임하게 이행하지 않고 베트남을 떠나가고 말았다.
프랑스가 무책임 하게 떠나간 후에 베트남에서 남과북이 통일을 위한 총선이 순조롭게 시행되지 못하고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미국은 이 혼란기를 틈타 <반공의 명분>으로 재빠르게 남 베트남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앞문으로 호랑이 <프랑스>가 떠나간 후에 뒷문으로 사자 <미국>이 들어 왔다. 순진한 베트남 민중들은 상상도 하지 못 할 재앙이었다.
미국은 프랑스가 떠나간 후의 시기에 미국 내부에 메카시즘이라고 하는 극히 심한 반공주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가 확산되는데 대하여 히스테리를 앓고 있었다. 특히 미국의 군수산업체 사람들과 국방성의 사람들은 베트남의 평화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미국은 프랑스와 베트남 사이에 맺은 제네바협정을 통하여 베트남의 남과 북이 합의하여 총선을 하도록 되여 있는 협정을 모르는 척하고 완전히 무시했다. 그리고 미국은 남베트남에 꼭두각시 단독정부를 세워 <고 딘 다엔 정권>을 수립하도록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
미국은 남베트남에 고딘 정권을 세우고 엄청난 자금을 들여 지원 했다. 그 연장 선상에서 고딘 정권은 유권자 보다 투표자가 더 많은 부정선거에서 98%의 득표를 얻어 1955년에 남베트남에 단독정권을 창설했다.
태생적으로 불법으로 세워진 고 딘 대통령의 정권은 부패와 독재로 말미암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미국의 원조만 허비하다가1963년에 암살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미국은 사망한 고딘 대통령을 지원하기 위하여 1961년부터 군사고문단 1만여 명을 이미 남베트남에 파견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낱낱이 밝혀지고 말았다.
고딘 대통령 사망 후 남베트남에서 반정부 <민족해방전선>이 남베트남 전역에 확장됨과 동시에 <베트공>의 조직적인 반미 투쟁이 곳곳에서 활발하게 전개 되고 있었다. 베트공의 출현이 미국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북베트남에서는 호지민이 영도하는 월맹군의 대남 총공세가 날이 갈수록 급속히 강화되고 있었다.
이에 당황한 미국은 베트남 전체가 공산화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전면적 전쟁을 시작하기 위하여 작전계획을 세웠다. 이 작전 계획이 이른바 <통킹만 정보조작>사건 이다.
미국군은 북베트남 지역을 공격할 구실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1964년 8월 4일에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워싱톤에 허위보고를 조작했다. 미국 죤슨 대통령은 조작된 허위 보고를 근거로 하여 북베트남을 공격하여 전쟁을 개전하기 위한 결의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의회는 1964년 8월 7일에 베트남 전쟁의 개전을 승인했다.
<통킹만 정보조작 사건>이란 무었인가?
<1964년 8월2일에 3척의 북베트남 어뢰정이 통킹만에서 작전중이던 미국 해군 구축함 매독스 호를 향하여 어뢰와 기관총으로 선제공격을 가했다> 라고 그 당시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이 주장하는 사건이다.
<미국 군의 매독스호가 즉시 반격을 가했으며, 주변에 있던 항공모함 타이콘데로거 호와 구축함 터너조이 호도 반격을 가하여 북베트남군의 어뢰정 1척을 격침 시켰고 2척에 손상을 입혔다> 라고 보고한 것이 바로 <통킹만 조작>사건 이다.
그런데 통킹만 사건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도발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순전히 조작한 사기극 이었다는 사실이 뉴욕타임스를 통하여 낱낱이 밝혀 졌다.
미국 국방부의 방대한 베트남전 비밀보고서에 의하면 이른바<펜타곤 문건>을 입수하여1971년6월13일 부터 연재한 기록에 의하면 통킹만 사건은 순전히 날조된 사건이었다.그 당시 국방장관이였던 로버트 맥나마라도 1995년에 <제2차 베트남 전쟁의 시작은 자작극에 의하여 시작된 전쟁이었다>라고 자백 했다. 비극적인 베트남전쟁은 존슨 대통령이 <허위보고>에 근거한 선전포고에 의하여 1964년 8월 4일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의 종식은 이른바 <닉슨 대통령 독트린>에 의하여 1973년 3월 29일에 베트남전쟁이 완전히 끝났던 것이다.
미국의 야만적인 베트남 전쟁에 대하여 서방의 언론들은 어떻게 표현했는가?
지옥의 묵시록이었다. 노루사냥 이었으며 살인 전문부대의 악행 이었다 라고 표현했다. 미국이 베트남을 20년 동안 강점하고 있었으며 또 노루사냥 하듯 8년 동안 전쟁을 했는데 그 동안 미국이 전쟁에 투입한 전비는 알려진 것만 총 1,600억 달러로 집계되었다.이 전쟁으로 사상자는 미군 사망자 5만 8천여 명, 미군 부상자 30만 6천여 명 그리고 1,836의 실종자가 발생되었다. 미군이 귀국 후에 발생한 정신병환자 70만 명, 미군의 고엽제 후유증 환자 8만 명으로 각각 나타났다.
이 전쟁에서 발생한 베트남인들의 사상자는 얼마나 되는가?
정부군 사망자가 13만 6천명, 민병대 사망자 70만 명, 민간인 사망자 200만 명(추정)으로 알려져 있고, 부상자 총수는 60만 명, 난민 총수는 600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그리고 미군이 동원된 연인원은 1천만 명으로 집계되었고, 이 전쟁에 퍼부은 폭탄투하량은 무려 650만톤으로 밝혀졌다. 여기에서 손실된 헬기 숫자는 5000대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엽제로 인한 후유증 환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특히 고엽제작전에 의한 미곡피해는 그 당시 17만 2천 톤 이었다고 한다.
고엽제란 무엇인가?
미군은 밀림 속에 숨어서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는 베트공들을 살해하기 위하여 비인도적이며 잔인한 방법으로 고엽제를 밀림지대에 대량으로 마구 살포했다. 고엽제에는 청산가리의 1만 배, 비소의 3,000배의 독소가 있는 독약이다. 그래서 사람이 일단 고엽제에 노출되는 경우에는 각종 종암과 신경적 기형을 유발하고 그 독성이 20년까지 지속되고 2세에게도 극심한 피해를 끼치는 것으로 의학계에서는 설명해 왔다.
남한군의 경우에도 베트남전에 참전 한 것 때문에 그 이후 고엽제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발견되었다. 그 피해자와 후유증 환자 수는 약 2만5천명인데 미국과 남한정부로부터 응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보장이 없는 소송만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는 형편이다.
베트남전에 남한 군이 참전한 이유는 미 당국의 요청도 있었지만 박정희 군사정권이 자진하여 지원하였기 때문에 이뤄진 것이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정통성을 국제적으로 과시하고 경제적으로도 이득을 획득하려는 불순한 저의가 깔려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자기 국민들이 희생 당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 개의치 않았다.
이러한 박정희 군사정권의 행위는 그 당시 국민들의 크나 큰 비판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미국의 동맹국들도 거부한 베트남 파병이었다. 그런데 남한은 전쟁기간 10년간 연인원 무려 31만 3천명을 파병했다. 이렇게 남한이 자청한 것은 우리 민족의 큰 수치스러운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 있다.
동남아의 공산화를 막는다는 대의명분으로 세계 경찰의 역할을 자처하였던 미국은 거대한 물량지원을 남베트남에게 제공했는데도 불구하고 베트남 전쟁은 미국과 더불어 월남의 패망으로 끝나고 말았다.
<통킹만 조작사건>을 자백한 베트남전 실패의 주요 책임자 중 하나로 악명 높은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사임한지 28년만인 1995년에 <베트남전의 비극과 교훈> 이라는 회고록을 발간 했다.
맥나마라는 우리가 세계 역사에서 배워야 할 것은 우리의 실수를 바로 알아야 한다라고 했다. 그는 회고록을 통하여 베트남전에서 <월남 패망>의 전모를 고백했다.
맥나마라의 <베트남전의 비극과 교훈>이란 회고록 요지:
첫째, 미국은 지정학적 판단에 의하여 조금이라도 불리하다고 판단되는 대상은 무조건 적으로 여기는 오만한 판단을 베트남에서 자행했다. 미국은 베트남의 민중들과 정치 지도자들이 민주주의와 민족에 대한 내적인 뜨거운 열정과 애국심을 가지고 있는데 대하여 무조건 무시하고 오판했다.
통일 베트남 수도 호지민 시의 일부 모습 |
셋째, 한 나라의 가장 근원적인 힘은 그 나라의 군사적 강대함이 아니라, 그 나라 국민의 단결력에 있는 법이거늘, 우리는 그것을 시인하는데 실패 했다.
네째, 우리는 미국의 지도자와 국민들 모두가 절대로 전지전능 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 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나라들을 우리들이 생각하는 이미지대로 만들 수 있는 신의 주권과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다섯째, 미국은 국제사회의 공동적 문제에 있어서만 미국이 군사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하는 원칙을 고수하지 않았다.
여섯째, 미국은 국제사회의 공통적 문제에 있어서와 또 인생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 가지로 당장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데 실패했다. 미국은 때로는 불완전하고 엉성한 세상에 몸을 맞추어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 했다.
일곱째, 미국은 지극히 복잡한 정치 군사력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도록 베트남에서 우리의 목표와 대안적 정책 그리고 실패가 명확해 졌을 때 정책을 변경할 필요성을 논의하고 분석하는데 있어서 실패했다.
맥나마라는 미국이 베트남을 침략하고 전쟁을 일으켰으며, 결국 베트남에서 패전하여 베트남을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어 놓고 떠나간 미국의 실패에 대하여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위에 살펴 본 맥나마라의 회고록은 오늘 미국이 이라크-아프칸 전쟁에서 당면하고 있는 상황과 매한가지라고 판단 된다. 사실은 이라크-아프칸 뿐만 아니라 중동과 남미등 수없이 많은 분쟁과 분규들이 기본적으로 미국의 오판과 오만 때문이라고 하는 것을 맥나마라는 말해 주고 있다.
그러면 <월맹>이 승리를 거둔 비결은 무엇 이였는가?
첫째, 월맹은 태생적으로 베트남 민족의 정통성을 보유하고 있는 정권이다. 남베트남의 월남정권은 프랑스가 세운 어용정권으로 외세를 등에 업고 독재와 부패로 민중의 적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에 미국이 막대한 원조로 세운 이른바 민주주의 정권들은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정부였다. 남베트남의 군인들은 용병의 역할만 하고 있었으니 월맹에 패할 수 밖에 없었다.
둘째, 월맹이 승리한 결정적 원인은 호지민의 절대적이며 초월적 지도력이였다. 남베트남 <월남 정권>은 말로는 자유를 주장하고 있지만 쿠테타가 9번이나 발생한 불안전한 나라였다. 미국은 할 수 없이 개입하여 <티우 정권>을 세워 튼튼한 친미 국가를 세웠다. 하지만 정부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정부가 아니라 친미적 독재와 부패로 일관하였다.
셋째, 남베트남의 민중들은 낮에는 <월남군>을 못본 척 하다가 밤에는 <월맹군> 을 위하여 열성으로 봉사 했다. 낮에는 정글 속에 숨어 있다가 밤에는 동리에 와서 <월맹군>을 위하여 활동 했다. 그러니 <월맹군>의 승리는 당연했다.
네째, 월남은 국토가 정글과 산악으로 가득하다. 월맹군과 베트공은 땅굴작전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월맹군과 베트공이 작전하는 땅굴은 베트남 전역에 거미줄처럼, 뉴욕시의 지하철처럼 퍼져 있는데 1만 7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지하공간을 가지고 있다. 지하 15m 깊이의 땅굴들이 수천km나 된다.
베트남전쟁에 미국 군 연인원 280만 명이 동원되었으며 폭탄 800만 톤이 투하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월맹군이 끄떡없이 최후의 승리를 거둔 것은 이들의 정신력과 베트남의 지형지물에 적합한 땅굴 등이었다고 분석된다.
다섯째, 남베트남의 월남군은 너무 미국만 믿다가 패망했다. 자주와 자주국방이 전혀 없는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미국이 언제까지고 지켜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미국은 득보다 손실이 많다고 생각되면 언제라도 손을 뗀다.
월맹군의 자도자 호지민은 베트남전 막판에 중국이 전쟁물자 협조를 약속했지만 달가와 하지 않았다는 숨은 이야기가 있다. 왜냐하면 전쟁 물자 지원받고 전쟁이 끝나면 물자를 대준 중국이 반드시 그 대가를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전투 하나하나 만을 따지고 무기 등 만을 가지고 평가한다면 미국이 전투에서 우세 했다고 말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를 보면 미국은 전쟁에서 월맹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결국 월맹은 <우리 민족끼리>의 신념으로 굴하지 않고 이길 수 있었다.
이 글을 준비하는 동안 기쁜 소식 하나를 들을 수 있었다. 북조선의 유명한 집단체조예술 작품인 <아리랑>공연의 기술이 베트남에 전수된다는 것이다. 베트남 국영 사이공 띱띠신문에 의하면 조선 문화성의 송평원 아리랑 공연 담당 부국장으로 하는 북조선 대표단에는 집단체조의 무대설계, 음향과 조명 분야의 전문가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발표 했다.
송평원 부국장은 이번 베트남 방문을 통하여 하노이 1천주년 기념식행사 개막식에 카드섹션 등 다양한 예술공연을 베트남 인민들에게 선물로 보이게 할 것이라고 했다.이것은 베트남과 북조선의 친선과 평화교류를 상징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패배한 쓴 경험과 좌절감에 오랜 동안 빠져 있었다. 아마도 그 좌절감을 회복하려고 지금 이라크와 아프간 전쟁에 뛰어 들어 몸부림 치고 있다면 그것도 애당초 잘못된 계획이었다. 지금 국제사회는 이라크 전쟁과 아프간 전쟁을 전쟁으로 보지 않고 침략행위로 보면서 그 결과는 미국이 승리할 수 없다고 내다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미국은 군사적 패권주의적 문화에 깊이 빠져 그 수렁에서 헤 메고 있다. 나는 미국인들에게 묻고 싶다. 아직도 군수산업 자본가들을 포함하여 지식인층과 종교인들이 미국의 군사력만을 과시하면서 이것이 다른 나라에게 미국의 가치를 심어 주는데 있어서 유효하다고 하는 오만 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가.
미국의 군사주의가 말 하는 자유는 본질적이며 보편적인 자유라고 말할 수 없다. 미국의 군사문화가 말 하는 자유는 오직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자유일 뿐이고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오늘 이라크와 아프칸 전쟁이 꼭 베트남 전쟁을 그대로 닮아 가는 것을 보고 필자가 조소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30년 전에 월남이 망할 때 미국에 와서 피난민 생활을 하다 고령에 숨지면서 베트남 조국을 그리면서 후손들에게 남기고 떠나간 구엔 쑤안 노인의 말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나는 그의 말을 가슴에 담고 있다.
《…아들아, 꼭 기억해야 할 것 있다. 우리 베트남 사람들은 인정 많고 감성이 풍부한 사람들 이다. 조상의 무덤을 돌보며 친척들과 함께 살기를 원했고 묻히는 날 까지 태어나 살던 동리에서 이웃들과 함께 어울리고 그 땅에서 죽기를 원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우리가 평화롭게 살도록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너의 조부모, 부모 그리고 지금 내 식구들 까지 우리는 3대에 걸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살아온 피해자들이다.
아들아, 베트남 국민들이 평화롭게 살도록 기도해야 한다. 향긋한 과일 나무를 심고 거기서 나는 열매를 따먹고 즐기며 살던 우리 선조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살던 땅 베트남과 구엔 쑤안 가문의 뿌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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