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聖) 샴바라 (8) - 아카샤 기록과 송과선
11. 아카샤(akashs)의 기록
- 아카샤란 에텔(ether)을 말한다 -
비전 과학의 근본적 가르침은 아카샤의 기록이란 문제이다. 자신이 참으로 생각한 사상이나 실행한 행위는 불멸의 아카샤에 기록되어 우주를 돌아서 또 자기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은 밀교 과학의 가장 흥미 있는 가르침이다.
아카샤의 기록을 인간에 전한 말씀이 여기에 있다. 신은 영원한 존재로 먼 과거도 미래도 신 안에 있다. 신은 영원의 현재이다.
일찍이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하시는 바를 듣고서 이렇게 말했다.
“그가 먼 선조의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을 하고 있다.”는 말에 예수는 대답한다.
“아브라함은 내가 있는 날을 알고 기뻐했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
아카샤의 세계에는 시공이 없기 때문에 옛날도 미래도 현재의 여기에 있는 것이다.
라듐은 끊임없이 방사능을 발하여 변화하고 드디어는 납이 된다. 방사선은 우주를 되돌아오기 때문에 납은 다시 언젠가는 라듐이 되겠지만 그저 진동의 옥타브가 약간 다를 뿐이다. 납은 황금으로 되고 황금은 또 납이 된다.
성전 ‘침묵의 목소리’에 다음 같은 말씀이 쓰여 있다.
“화성을 보라 졸고 있는 지상으로 향하여 빨간 불처럼 눈을 밝히고 있다. 고행자의 머리위에 사랑의 손길을 뻗치고 있는 수성의 불타는 오라를 보라! 화성도 수성도 니마(태양)의 종인 것이다. 그렇지만 영겁의 과거에 있어서는 화성도 수성도 태양이었던 것이다. 미래에 있어서 이 두 별은 다시 태양이 될 것이다.”
영원 무한한 아카샤에 기록되어진 것은 별이나 라듐이나 인간의 사상 행위 등이 모두 다시 본디로 되돌아온다. 우리들의 사상은 이렇게 하여 우주를 돌고는 다시 우리들에게 되돌아오는 것이다. 아카샤가 불사 무한인 것과 같이 우리들의 사상도 죽지 않는다. 값없는 일을 생각하고 있으면 우주를 더럽히고는 재차 나에게 돌아온다. 위대한 사상은 우주로 청정케 하여 천사들과 함께하여 재차 자기에게 돌아와 자기를 정화시키고 위대하게 만든다.
성전 ‘침묵의 목소리’에 또 이렇게 쓰여 있다.
“기뻐하라 제자여! 기뻐하며 대 법칙을 마음에 새겨라. 일찍이 너는 열반의 흐름 속에 들어 왔었다. 전에 너는 지금의 삶과 미래의 삶에 있어서의 열반의 흐름의 바닥을 밟았다. 그렇지만 너의 앞에는 일곱 전의 전생이 있다. 오오, 불굴의 의지의 소유자여!”
열반의 흐름에 들어 왔다는 것은 납이 황금으로 되는 식으로 낮은 우리들이 진화하여 우주 대영의 법칙 안에 살고 신의 체험과 부다의 경지에 들어서는 것이다. 7회의 전생은 시공의 관념으로 말한다면 긴긴 기간이 될 것이지만 영원 무한의 아카샤의 세계에서는 수분 간 정도다.
흥미 있는 대 문제는 우리들이 아카샤의 세계로 솟아나오는 일이다. 자신들의 두뇌가 무서운 납덩이처럼 돼버렸고 의식은 물질의 소법위에 묶여 있기 때문에 아카샤의 세계를 알 리 없고 자기가 방출한 사상의 방사선이 우주를 돌아서는 다시 자기에게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을 알 리 없다.
물질의 세계(3차원의 세계)서는 4차원....9차원의 아카샤의 세계가 보이자 않는다. 아카샤의 세계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물질계로부터 아카샤의 세계로 나가는데 있어서는 중간의 경계 구역이 있어 거기에 23개의 통로가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 통로조차도 발견치 못하고 있는 것이 의식의 작은 제한 내에 갇힌 우리들 사람이다. 그 통로를 발견하면 우리들은 아카샤의 공간도 초월하여 불멸 무한의 의식을 전개케 된다. 통로를 발견하는 방법이 통일요가의 목적이다. 파탄잘리는 그 방법을 31가지 쯤 가르치고 있다. 그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육체와 에텔체와의 관계에 일심 집중하면 3계로부터 초월하여 하늘에 오르고 공중을 여행할 수가 있다.” 파탄잘리는 또 “각 원소에 일심 집중의 명상을 하면 모든 원소를 지배하여 일체의 기적을 행할 수가 있고 목적 도달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우주 전체의 크기로 확대되는 것도 원자의 미립자 속에 잠입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아카샤의 세계로 솟아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송과선 상부에 전 의식을 집중하는 일이다.
거기서부터 아카샤의 통로가 신체 전체로 향하여 개통되어 있어 영적 전개가 전신에 걸쳐 행해질 수 있다. 이리하여 먼 과거의 자기로 돌아갈 수 있고 그리고 또 현재의 활동으로 돌아오면 현재의 활동이 된다. 이 현상은 전적으로 먼 과거를 기억해 낸다는 것만의 일 뿐 아니고 아카샤의 세계에 기록되어 있는 과거의 우대 신성한 자아를 현출하는 일이다.
흥법 대사(공해)가 불(佛)의 지혜 신, 변화 신, 허공 법계신을 현출하여 빛났다는 것도, 예수가 산상에서 빛이 나서 옷이 눈처럼 희게 되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게 했다는 것도 ‘침묵의 소리’에 있는 “전에 너는 금생과 미래 생에 있어서의 열반의 흐름의 바닥을 밟았다고 하는 것을 실증한 것이다.”
아카샤의 세계에 솟아나면 우리들은 샴바라에 있게 될 수 있다.
송과선에 전심 집중이 될 수 있으면
우리들은 머리위로부터 발광하고
전신이 알케미적 변화를 일으켜서 샴바라의 대사들과 결합된다.
송과선은 두개골 중앙의 바로 밑에 있다. 옆으로 말하면 귀의 조금위의 내부에 해당한다. 오늘의 과학은 송과선의 기능에 관하여 아는 바가 없지만 동양의 고성은 상세히 이것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송과선을 요가에서는 일반적으로 ‘1000개의 연꽃의 자리’라고 말하며 또 ‘범(梵)의 자리’라고도 한다. 범이란 영원 무한한 진리를 말한다. 신이란 표상어로 표현해도 된다. 송과선을 사하스라라 차크라라고해서 호흡의 과학적 기술과 명상의 심리적 수행에 의하여 그 진동을 촉진시키는 것이 인류 진화의 최상역에 달하는 것이고 종교적 체험의 최고의 도달점을 의미하는 것이다.
송과선은 공동을 이루고 있어 공동의 하부에 일곱의 마니 보주(寶珠)가 있다. 이것을 과학자는 뇌사라고 부르고 뇌사는 오스미암과 인과 2종의 칼슘으로써 이루어져 있고 이것이 진동되면 육체 전체가 발랄한 생기에 충만되어 경쾌 건전하게 되는 것이나 그 진동이 약해지면 육체의 질병을 면하지 못한다. 뇌사의 아래에는 지방조직이 있어 뇌사의 진동이 약화 되면 지방이 올라와서 뇌사를 밀어 붙이기 때문에 드디어 진동이 멈추어진다. 진동이 멈추어져 버리면 송과선 전체가 위축한다. 해부 학자는 이 송과선이 연령 21세까지는 있지만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서 사라져 없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6-70세가 되어도 건전한 송과선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뇌사가 있는 곳을 물질계와 대령계와의 접촉점이라고 한다. 뇌사의 진동은 대령의 활동을 각성시켜 물질계를 지배하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혼의 눈이라고 말한다.
예수는 “하나의 눈이 밝으면 전신이 밝아질 것이다.”고 말하였는데 요컨대 혼의 눈이 열리게 되면 물질계의 일이 일체 명료하게 이해가 된다는 의미이다. 뇌사의 진동은 오스미암에 우주의식 발전 작용을 일으켜 인에 발광작용을 일으키고 칼슘에 과거 영겁에 관한 기억 기능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때문에 요가의 명상에는 두부로부터 발하는 빛을 명사시키는 방법이 있다. 빛이 보여 지면 대공의 성자가 나타난다고 한다.
파탄잘리의 라자요가 경전에서 말하고 있다.
“두뇌 내에 빛의 초점을 만드는 명상을 하면 성자들을 보고 또한 그들에게 접촉할 수 있다.” 고 말한다.
뇌사에 우주의식이 발전 작용을 일으켜 척추 아래의 쿤달리니라고 하는 발전 작용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된다. 쿤달리니를 활동시킴에는 연수의 중추로부터 척추 밑 쪽으로 내려가는 세 줄기의 작은 우주 에너지의 통로들인 슈숨나, 이다, 핀카라를 활용치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요가 호흡에서는 이 세 통로를 이용할 수가 있다. 사람은 호흡에 의하여 공기 속에서 산소를 섭취하여 혈액의 정화작용을 촉진시키는 것뿐만 아니다. 동시에 공기 속에서 우주 에너지 즉 전파를 호흡으로하여 패장안으로 뿐만이 아니고 연수의 중추로부터 돌려서이다.
핀카라의 두 통로로 보내주는 기능을 연출하고 있다. 보통의 호흡에서는 이다, 핀카라로 흘러내려 가는 음향 전파의 정도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에 하복 호흡을 깊이하면 그것이 척추 밑까지 내려가서 상합하고 그 조화에 의하여 쿤달리니라고 하는 우주의 화력이 각성하여 그것이 세 통로의 중심인 슈숨나를 타고 올라간다. 올라가서 드디어 송과선의 뇌사에 접하여 발전진동에 의해 우주의식이 각성케 되는 것이다. 우주의시그이 체험을 삼매라고 부른다.
여기에 요가의 대 혁명자 불타에 의하여 설파된 뇌사에 대한 해설이 있다.
“7의 보석(뇌사를 말함)으로 된 대지 상의 유일한 연꽃을 생각해보라. 이 연꽃에는 84,000의 꽃잎이 있고 하나의 꽃잎에는 84000의 맥이 있으며 그 맥의 하나로부터 84000의 광선이 나와서 그 하나 하나가 명료하게 구분되어 보인다.” 불타는 계속하여 말한다. 자신의 숨을 잘 인식하라. 어떻게 하면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빨아들이는 숨 속에는 미립자가 있는 것이다. 이 미립자가 자연의 원칙을 나타내는 것으로, 모든 생류를 생존시키고 기르고 있는 것은 이것이고 이것에 의하여 모든 것은 형태를 유지하고 또한 각각의 진동을 일으킨다. 때문에 불타를 인식 했을 때의 너의 의식은 불타의 의식과 같은 것이 되어 있다. 그래서 불타의 32호상이 너에게도 나타난다. 이렇게 하여 너 자신이 불타가 되는 것이다. 모든 부처가 가지고 있는 웅대 무한함 지식의 대해의 원천은 너 자신의 의식 속에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일심을 불타여래에 집중하여 완전한 오도의 선정에 들어 성자들을 명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때는 눈을 감고 있든 열고 있든 관계가 없다. 오로지 부터의 모습을 인식하려고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연꽃의 위에 앉아 수미산의 기슭을 돌아오는 흐름 속에 몸담고 계시는 부처님을 응시하라. 부처를 명상하는 자는 부처의 정신을 인식할 수가 있다. 부처의 정신은 위대한 자비이다.
구약 성서의 스가랴 제 4장도 역시 송과샘과 뇌사의 신비를 해설하여 말한다.
“내가 보건데 금의 등대가 하나 있고 그 정상에 기름을 담는 그릇이 있다. 또 등대 위에는 일곱의 등불 접시가 있다. 그 등불 접시는 등대의 꼭대기에 있고 그것에는 각각 일곱 개씩의 관이 있다. 또 등대 옆에는 감람수가 둘이 있어 하나는 우측에 있고 하나는 좌측에 있다.”
여기서 등대란 척추 내의 슈숨나의 뜻이고 그릇은 뇌수안에 있는 타라마스의 뜻이고 일곱의 등불 접시는 7의 보주 즉 뇌사의 뜻이다. 일곱의 관은 뇌사의 진동을 일곱차크라로 보내는 도관(道官)이며 그감람나무는 이다와 핀카라의 기도(氣道)이다. 예언자 스가랴는 몽환속에서 이 비젼을 보고 “이것들은 무엇인가?”하고 물으니 천사가 답하여 말하길 “너는 이것을 모르는가? 일곱의 것은 두루 전 세계를 뚫어 보는 여호와의 눈이다.”라고 한다.
뇌사의 진동은 우리들의 지력, 인식력을 위대하게 만들고 그 발전 발광진동은 우리들로 하여금 대성의 의식과 같게 만든다. 뇌수내의 송과샘과 타라마스와 뇌하수체의 3대 중심에는 성류가 돌아 흘러 우리들로 하여금 샴바라에 있는 영왕 사나트 쿠마라를 우러러 보게 함을 가능케 한다. 위 셋 중심을 도는 에너지의 환류는 샴바라의 자류 피라미드와 호응하는 것이다. 이 상태를 파탄잘리는 해설하여 말한다.
자아 광명을 가로막는 것을 일소시키는 명상에 의하여 사색의 제한을 벗어나서 초 육체적이 된다.
이것이 영명(靈明)의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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