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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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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3 12:12:04 (*.162.8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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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반야바라밀경” 제 5 “여리실견분”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무릇 형상을 지닌 것은 모두 다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알면 곧 여래를 보리라.”
이 말을 중관사상의 맥락에서 설명하면, 모든 형상에는 그 형상 고유의 독립적 실체로서의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에, 형상을 대함에 있어 자성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말은 이렇게 쉽게 했지만, 오래도록 불교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조차도 “형상”이니 “자성”이니 하는 말들이 매우 난해하고 민감한 개념임을 느낍니다. 어찌 보면, “자성”에 대한 정확한 개념정립만으로도 이미 상당히 심도깊은 이해를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사실, 불교 이천 오백년 역사는 “자성”에 대한 정의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자성”이란, 공사상에서 말하는 “무엇이 공한가?”에 대한 답변이고, 난해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불교철학의 가장 핵심 주제가 바로 “자성”이라고 할 수 있고, 불교 수행의 요체도 그 “자성”에 대한 이해와 통찰에 있고, 깨달음도 “자성의 없음” 혹은 “자성의 공함”을 증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성”에 대한 이해는 곧 존재 전체에 대한 근원적인 이해와 직결되고, 그렇기 때문에, “자성”에 대한 이해야말로 깨달음의 요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서, “자성”에 대한 그릇된 이해는 곧 부처의 공성에 대한 그릇된 이해가 됩니다.
“반야심경”의 메시지도 “자성의 없음”의 다른 이름인 “공성”에 대한 이해에 있다고 할 수 있으니, “자성”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일곱 차례에 걸쳐 “반야심경에 대한 어느 분의 해석에 대한 비판”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는데, 읽어보신 분들께서는 “자성”의 정의에 대해 나름으로 정리하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신지학, 특히 앨리스 베일리의 신지학 관점에서, 자성이니 깨달음이니 하는 말들이 어떤 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 나름대로 개인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도 유익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전통적 이해방식보다 더 정확하고 명료한 개념정립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공성”, “무아”, “자성 없음” 등의 말들을 이해함에 있어, “추상화된 개념의 해체” 정도의 견해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지극히 피상적인 공성관이고 무아관이라 하지 않을 수 없고, 더 나아가서 있던 것이 사라지고 없어지는 식의 실체론적 이해 역시 기본적으로 잘못된 이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앨리스 베일리의 저서들 곳곳에서 불교에 대해 거론하면서 부처의 가르침을 언급하고 있지만, 간단하게 “사성제”와 “팔정도”, 혹은 소승적 “중도”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습니다. 간접적으로 언급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서구의 “구약성서”가 동양의 불교경전이나 힌두 경전과 같은 레벨의 영성을 가르치는 경전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대목이 있고, “신약성서”가 동양의 경전들, 특히 인도의 경전들과 동등한 레벨에 있는 경전임을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죽음이라는 주제에 관련해서 말할 때도, 조만간에 죽음의 과정에 관한 티벳의 비밀문헌(티벳 사자의 서를 말하는 것 같음)이 서구사회에 공개될 거라고 언급하고 있기도 합니다. DK 대사는 또한 불교 밀교 명상수행과 관련된 “본존불 관상” 류의 명상과정에 대해서도 간단하나마 서술하고 있습니다. DK 대사가 앨리스 베일리에게 가르침을 전하고 있을 때만 해도 서구 사회에 불교의 가르침이 많이 소개되어 있지 않았고, 대승불교 관련 논서나 티벳불교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던 것을 생각하면, 매우 특기할 만한 언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 견해로는, DK 대사가 불교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는 듯한 유보적 태도를 취하면서 가르침을 전개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서구인들을 대상으로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그들이 속한 문화적 종교적 배경을 세심하게 고려한 결과인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아직은 서구인들이 동양의 고도의 불교적 세계관과 철학을 받아들일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고, 동양에서도 상당히 의견분분하고 왜곡의 소지가 많은 전통적 해석방식을 경계하고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동양의 특정한 종교에 대한 관심이나 편향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 역력하고, 말 그대로 “세계 종교”에 대한 비전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 만큼, 불교를 위시한 동양의 전통종교들 역시 오랜 세월을 겪으면서 도그마화되고, 지방색을 많이 띠고, 상당한 부분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DK 대사가 주로 참고하고 언급하고 있는 동양의 종교적 가르침은, 신화적 민족적 색채가 매우 적은 “요가 수트라”와 “바가바드 기타”이고, 블라바츠키가 번역해서 소개한 “침묵의 목소리” 정도입니다. 그런 텍스트들을 언급한 것은, 그것들은 앨리스 베일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었을 무렵에 이미 서구에 출간되어 있었기 때문이고, DK 대사가 언급을 유보한 불교 관련 경전들은 아직 서구 사회에 거의 소개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언급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로부터 반 세기가 훨씬 넘은 지금 불교는 이제 더 이상 아시아권에 제한된 종교도 아니고, 티벳불교의 비밀스런 가르침도 더 이상 히말라야 산속에 보관된 가르침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서두에서 인용한 금강경의 “무릇 형상을 지닌 것은 모두 다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알면 곧 여래를 보리라.”라는 구절을 신지학적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형상”이라고 말할 때, (소우주적인 관점에서) 육체/에텔체, 아스트랄체, 멘탈체로 경험하는 일체의 경험을 “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보다 더 제한된 의미에서 상을 만든다고 할 때는 멘탈체의 속성을 말한다고 할 수 있는데, “개념분별 작용”이 바로 멘탈체의 특성입니다. 개념분별 작용은 조야한 수준에서 미세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방향에서 진행되고 있는데, 간단한 “관념”의 형성에서 고도의 철학적 개념 정립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사유작용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멘탈체의 활동이 표면화될 때 비로소 개인적 인성으로서의 “인성자아”가 대두되는데, 상을 짓는 주체를 총체적으로 “인성자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을 말할 때는 주로 멘탈체의 작용을 말하기도 하지만, 아스트랄체나 에텔체의 영향을 결코 무시할 수 없고, 인류의 대다수는 멘탈체의 작용보다는 아스트랄체의 작용에 편향되어 있어서, 그들이 경험하는 “상”은 아스트랄 속성을 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상”을 만든다고 할 때 매우 광범위한 범위에서 말할 수 있습니다.
금강경을 설하고 있는 대상이 이미 공성관에 관해 가장 경지가 높은 제자였던 “수보리”였기 때문에, 여기서 문제시하고 있는 “형상”이나 “상”은 멘탈체가 고도로 발달된 수행자를 전제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멘탈체의 기능이 고도로 발달되어 인성자아를 총체적으로 통합할 수준에 도달하면, 비로서 신지학적으로 “부디” 의식이 활성화되기 시작하고, 부디 의식, 즉 영혼의 에너지가 적극적으로 유입되면 인성자아에게 있서 대변혁의 시기가 도래합니다. 부디 의식의 유입은 멘탈체를 핵심에 둔 인성자아의 부정에 이르고, 인성자아의 허구성과 덧없음과 모순성을 자각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제기되는 것이 바로 “무아”이고, “공성”입니다. “자성없음”이 비로소 거기에서 제기되고, 놀라운 도약을 경험하게 됩니다. 모든 명상수행자들에게 있서 가장 불가해적이면서도 가슴으로 동의하게 만드는 자각경험이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지학적으로 인성자아의 허구성을 자각하게 하는 근원은 “부디”의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전까지의 “인성자아”에 대한 자각은 멘탈체의 개념적 분별작용의 하나이고, 그 한계를 넘기 어렵고, 결국에는 자기모순에 빠지기 쉽습니다.
인성자아로 대표되는 소우주적 존재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과 초월은 부디 의식의 적극적인 활성화로 시작되고, 실체론적 “무아”나 “개념작용의 해체로서의 “무아”가 아닌, 진정한 의미의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의 변형으로서의 “무아”를 통찰하게 됩니다. 부디 의식이 가져오는 그런 통찰의 경험에서 드러나는 것이 “실재”의 세계인 “여래”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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