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길에 대한 개인적 생각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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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의 길에 대한 개인적 생각 5

明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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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6 01:00:13 (*.94.24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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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글에서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 현대적인 용어로 집중명상과 통찰명상의 수행에 대해 말했습니다. 집중명상의 수행없이는, 집중명상을 성취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지혜, 즉  불교적인 맥락에서 공성의 지혜를 인식하거나 증득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요가철학적인 의미에서 감각의 온전한 통제와 의식의 철회없이 삼매에 들 수 없고, 나아가서 영원한 관찰자에 대한 인식을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실제적인 영적 현실에 들어가는 것 또한 힘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개념적 집중에 지나지 않는 상태를 집중명상의 성취, 즉 삼매의 성취, 혹은 불교적인 용어로 선정을 이루는 것으로 오인합니다. 인간의 사고작용은 미세하고도 미세해서, 어디까지가 사고이고, 어디까지가 실제의 현실적 경험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미세한 개념적 작용을 이원성을 초월했다거나 공성을 자각했다거나, 혹은 영적 현실을 자각했다는 식으로 확장해석하기 쉽습니다. 물론 그런 미세한 개념의 세계에 들어가기도 쉽지 않습니다. DK대사의 가르침을 적용하면, 상위멘탈체의 속성을 갖는 의식의 작용을 자각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연히 간헐적으로 그런 상위멘탈체의 작용을 경험하는 것으론 미세한 세계를 알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영적 세계, 공성의 세계는 그런 미세한 개념의 세계를 넘어서서, 심지어는 카르마에 의한 경험과 인식이 드러나기 이전의 차원에 대한 자각을 경험한 이후에야 비로소 통찰할 수 있는 영역 이라고 말합니다. "카르마에 의한 경험과 인식"이라는 말은 불교의 유식학 가르침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인간의 현존재의 육체적 정신적 제경험은 무시이래의 전생과 이 생에서 쌓아 온 카르마의 힘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합니다. 그런 카르마의 작용을 인식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카르마에 의한 경험과 인식이 드러나기 이전의 차원을 자각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식과
경험이 그런 카르마에 의존하고 있다면, 도대체 어떻게 그런 것들을 넘어선 세계를 자각할 수 있을지 의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보기에, 씨앗들의 저장소(?), 혹은 씨앗들의 집합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알라야 식은 DK대사의 가르침에서 등장하는 원인체(causal body)에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진정한 영적 완성의 절정은 그런 원인체의 소멸에 있다고 하고, 유식학적으로 깨달음은 알라야 식의 해체, 혹은 알라야 식의 변형에 있다고 한다면, 과연 그런 알라야식과 원인체에 의해서 인식과 경험이 제한될 수 밖에 없는 우리가 어떻게 영적 현실을 인식하며 또 그것이 영적 현실임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속세에서의 수행이 가능할까? 진리 혹은 무엇인가 영적이고 고귀한 가치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면 누구가 물어볼 질문입니다. 출가하신지 20년이 넘은 어떤 한국 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속세에서는 수양은 가능하겠지만, 수행은 어렵겠지요."

물론 여기서 수양이라는 말의 뉘앙스는, 소위 현실에서 말하는 건전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고, 수행이란 말은 현실적 세계를 넘어선 영원불멸의 영적 현실, 이 현실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그래서 때로는 현실을 부정할 수도 있는 그런 의지적인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해 소박한 차원에서 관심을 갖는 소위 하사도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속세에서의 삶을 영위하면서 어느 정도의 괜찮은 종교적으로 건전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나 절에 가고, 말씀이나 법문을 듣고, 기도나 참선을 하고, 성경이나 불경을 읽으면서, 혹은 각종 고귀해보이는 서적들과 모임들에 참석하면서 사는 삶이 그런 것입니다. 주말에 하루쯤은 명상과 종교적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소위 속세에서의 무리없는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일컬어 니체는 낙타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속세에서 무리없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상사도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전적으로 의탁할 수 있는 스승을 만나서 흔들림없는 지혜와 깨달음을 성취한, 그야말로 성취자(siddha)들입니다. 혹은 마스터라고 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직접적인 스승이 없어도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조차 규칙적으로 선정삼매에 들어야 합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원하면 선정삼매에 들어서 영적 현실 속에 의식적으로 있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일컬어 우리는 스승들이라고 합니다.

그런 두 부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상당한 시간 동안 특정한 환경과 특정한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집중된 명상수행과 종교적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사막의 한 가운데서 울부짖는 사자가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곧 굶어죽거나 탈진해서 죽을 것입니다. 그 사자에게는 푸른 초원과 먹이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수행과 종교적 생활을 위한 특정한 환경입니다. 

이미 하사도의 수준을 넘어서서 최소한 중사도의 길을 가고 있다면, 즉 자신의 삶의 부조리함과 한계성, 의식의 미묘한 작용과 때로는 통제할 수 없는 삶의 모순 앞에 극도의 고통과 좌절을 경험하면서,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한 줄기 빛에 의지해서 고분분투하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어느 시기가 되면 중대한 결정 앞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런 결정의 순간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면, 아직도 자신이 삶과 세계의 실상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증명할 뿐입니다.

인생의 특정한 시기, 즉 인생의 젊은 시기는 과거의 업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이 생의 업이 많지  않아서 민감한 지성과 감성을 갖추고 있고, 또 의지적 힘도 있어서 진리에 대한 그다지 무리없는 탐색과 노력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다른 시기, 이제는 더 이상 젊다고 할 수 없는 시기에 이르면, 이제는 과거생의 업만이 아니라 이 생에 쌓아놓은 업에 의해서 더 이상 민감한 통찰도 실천력도 떨어지는 상태가 됩니다. 그 시기가 도래하면,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합니다.

만약 그 전까지의 생활을 답습하면, 그 때까지 자신이 이루어놓은 것, 즉 자신이 이해하고 경험한 것을 나머지 시간 동안 부둥켜안고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그 생의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숱한 업을 풀어가고 있지만, 동시에 숱한 업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씨앗을 뿌리고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좋은 토양과 거름과  기후조건이 맞아야 하듯이, 영적 수행이 자라서 완성이라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그런 똑같은 환경과 조건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조차 인연의 법칙, 특정한 원인과 조건에 따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포도주는 새로운 푸대에 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집착이 워낙 뿌리깊어서 차마 그러지 못하고, 어떤 식으로든 타협을 하고 싶어합니다.

심지어 교묘한 자기타협과 합리화로 그런 집착을 치장해서, 결국에는 본인조차도 그것을 인식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포기의 정도와 깨달음의 정도는 비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 속의 개념적 포기를  실제적인 포기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포기는 실제적 포기로서, 당장 내일의 삶이 보장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밀라레빠의 고행의 의미가 거기에 있습니다. 밀라레빠는 의지할 것은 스승 밖에 없었고,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스승을 떠나서는 죽음 밖에 갈 곳이 없다는 절대절명의 현실이 밀라레빠의 포기였습니다. 나로빠 역시 스승 띨로빠를 떠나서 아무 의미도 없는 자신의 삶을 끝내려고 결심했을 때 비로소 직접 스승을 대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영적 현실을 비로소 직접적으로 대면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DK대사는, 자신을 포기하고 전체의 행복과 섭리에 자신을 맡기는 봉사의 삶을 사는 만큼 영적 지식에 다가갈 수 있음을 누누히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수행의 길은 포기의 길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포기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만큼 속세의 실상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가리키고, 그 만큼 단꿈에 젖어 있음을 의미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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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6 01:07:20 (*.94.241.248)

明水

인도라는 나라가 한국의 인터넷 환경과는 비교가 되지 않기에, 올린 글에

2007.05.16 01:09:07 (*.94.241.248)

明水

오타가 많을 것입니다. 읽으시는 분들께서 참작해서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글을 쓰다가 올릴려고 하면 로그아웃이 되어 버려서, 생각해낸 것이 제 메일에다 글을 써서 자신에게

2007.05.16 01:10:08 (*.94.241.248)

明水

보낸 다음에 다시 복사해서 게시판에 올리는 식으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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