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종교와 사랑의 종교...신지학에서 말하는 예수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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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종교와 사랑의 종교...신지학에서 말하는 예수의 정체성

明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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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1 10:47:42 (*.162.81.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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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베일리의 저서에서는 지난 이천여 년 동안의 세계의 종교를 크게 두 가지 시기로 분류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천 오백 년 전의 석가모니로부터 시작된 지혜의 종교, 그로부터 오백 년 후에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된 사랑의 종교가 그것입니다. 대우주적 삼위(Trinity) 중에서 제 2 위인 지혜/사랑의 원리가 두 분의 위대한 스승들에 의해서 인류사에 현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성제와 팔정도로 시작되는 부처의 가르침은 전형적인 지성적 길을 예고하는 것으로, 급기야는 중도의 가르침이라는 인류가 낳은 최고의 지성적 가르침을 열어놓았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종교 중에서 이보다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면서도, 직관적 통찰이 가득한 종교적 가르침이 없을 것입니다. 지성적 탐색이 무엇인지, 지성적 깨달음이 무엇인지, 라자 요가의 길인 멘탈체의 발달에 있어서 이보다 더 완벽한 길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가히 불교는 인류의 최고의 지성들이 몰두할 수 있는 영적 가르침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천 년 전에 시작된 기독교의 가르침은 아직도 수수께끼에 가려져 있는 그리스도라는 위대한 스승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그 분의 가르침은 한 마디로 사랑의 가르침입니다. 앨리스 베일리의 저서에서는, 먼저 지혜라는 원리가 현현하고, 그 다음 사랑의 원리가 현현함으로써, 비로소 신성의 제 2 상이 온전하게 현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류 최초로 사랑의 원리가 그 분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졌습니다. 흥미있는 것은, 신지학에서는 그리스도를 마이트레야, 즉 한문으로 미륵불과 동일존재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신약성서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미스터리였던 예수의 잃어버린 18년의 생애가 현대에 와서 몇몇 탐험가들과 학자들에 의해 밝혀졌다고 합니다. 익히 많이 알려진 자료에 따르면, 예수는 그 18년 동안 인도를 비롯해서, 티벳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여행하면서, 당대의 최고의 스승들로부터 영적 가르침을 전수받았고, 특히 불교의 가르침에 정통했다고 합니다. 예수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라다크의 불교사원인 헤미스 곰파(사원)라는 곳에서 발견됨으로써 촉발된 사건은 매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티벳 본토의 사원에서도 같은 기록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예수가 보여준 많은 초인적 이적들과 말씀은 브라만교와 불교의 스승들로부터 배운 가르침이었고, 예수 역시 타고난 영적 스승이었기 때문에, 요가의 대가로서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지학에서 매우 흥미로운 설명을 하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라, 예수라는 영적 존재와 그리스도라는 영적 존재의 관계입니다. 그리스도가 예수의 스승이고, 그리스도는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마이트레야의 다른 이름이고, 삼십 년 동안 영적 수행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사용할 수 있도록 몸을 만든 예수는 삼년 동안 몸을 스승에게 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소위 삼년 동안의 공생애는 예수와 그리스도가 교대로 예수의 몸을 사용했던 기간이라고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예수는 다시 인도로 여행을 해서 남은 여생을 다른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살았고, 실질적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역사 밖으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천 년 전에 팔레스타인에 등장했던 예수는 그 당시에 불교적으로 일래과, 즉 한 번의 생을 더 남겨둔 영적 수행자였고, 윤회의 마지막 생은 바로 다음 생인 “트야나”의 “아폴로니우스”라는 전설적 성인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고 신지학에서는 말합니다. 예수의 몸을 통해서 가르침을 폈던 그리스도는 영적 하이어라키에서 스승 중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분으로, 바로 마이트레야, 즉 미륵불과 동일존재라고 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예수라는 위대한 스승을 통해서 사랑의 가르침이 시작된 이후 삼백 년 정도가 지난 다음 불교에서도 놀라운 가르침이 전해집니다. 바로, 아상가(무착)와 바수반두(세친) 두 형제에 의해서 시작된 광대행의 가르침, 즉 불성사상이 불교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불성사상은 바로 자비사상과 빼놓을 수 없는 사상으로, 보살사상이 철학적 종교적 의미를 갖고 불교사에 등장한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그들 두 형제들에게 불성의 가르침을 전해준 존재가 바로 미륵불인 것입니다. 불교는 아상가와 바수반두 형제를 통해서 중도적인 공사상에다 실천적 불성사상이 갖추어져서, 그야말로 불교라는 수레에 두 바퀴가 구비된 것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에 비로소 자비, 즉 사랑의 메시지가 보살사상의 맥락에서 불교의 핵심 가르침으로 자리잡는데, 그 근원에는 바로 마이트레야, 다시 말해 그리스도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원리가 인류사에 현현하게 된 것은 어느 특정한 종교의 독점적 교리도 아니고, 보편적 영적 진화의 과정에서 계시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마이트레야가 동일한 존재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라면,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불교적 가르침에 비추어 해석하면, 얼마나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십자가에 못박힐 수 밖에 없었던 이유나, 구약의 가르침과 신약의 가르침이 그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를, 팔레스타인에서의 예수의 이질성에 비추어서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지난 이천 년 동안 서양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토록 왜곡시킬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한계도 이해가 됩니다. 동양적 종교 수행에 근거한 예수의 가르침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나 로마인들에게 자못 놀랍고, 충격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인류의 영적 진화라는 역사성 속에서 인류사에 최초로 사랑의 메시지가 물질세계에 현현하는 사건이었던 만큼 그 충격은 엄청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니라”고 그 이전에 누가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말씀 안에 깃들어 있는 오컬트적인 의미는 너무나도 심오한 것입니다.

대승적 보살사상과 자비의 가르침이 지극히 배타적이고 이원론적인 사상이 뿌리깊이 지배하고 있는 유대(앨리스 베일리의 저서에서는, 유대인들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듯이, 그런 선민이 아니고, 발달된 문명의 변두리에 있던 낙후된 민족으로 주변의 발달된 문화를 수용해서 자신들의 종교문화를 만들었는데,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인들의 역사가 사실은 현재의 유대인들의 역사가 아니라고 합니다. 결국 현재 전해지는 구약의 유대의 역사는 날조된 이스라엘 역사라고 합니다)땅에 전해졌을 때, 얼마나 이해하기 어렵고, 이질적인 것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이천 년 전의 상황이 현재까지도 더하면 더했지 여전히 기독교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배타성과 독단성은 사실상 예수님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으로, 그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바리새인들이고 율법학자들인 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이천 년 동안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심각하게 왜곡되서 그렇게 많은 문제와 영적 장애를 낳은 것은, 순전히 영적 무지 때문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읽은 마스터들에 관련된 자료에서, 예수께서는 지난 이천 년 동안 왜곡된 기독교를 어떻게든 제자리에 갖다 놓기 위해 애를 쓰시면서 노력하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일리있는 말이라 생각됩니다.

신약성서에서 가장 난해한 요한계시록만 해도 동양적 요가수행철학과 우주론을 이해하지 못하면 절대로 해독하기 어려운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심지어 가장 철학적 분위기가 나는 요한복음은 동양적 우주론과 대승보살적 사상을 이해하지 않으면 제대로 접근조차 하지 못합니다. DK 대사의 말을 빌면 왜곡될대로 왜곡된 구약성서만 들먹이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해석하려고 한다면 어림도 없는 노력이 될 것입니다. 신약성서에 깃들어 있는 심오한 오컬트적 의미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전개된 소위 정통 기독교 신앙체계와 신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실하고 문제가 많은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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