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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윤회, 카르마, 영적 진화의 단계에 대해...(2)
明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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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6 16:35:14 (*.162.81.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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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지성적 원리가 고도로 발달하면, 상위 멘탈체의 기능이 강해지면서, 보다 더 근원적인 세계를 접하게 됩니다. 육체로 관계를 맺던 물질계와 아스트랄계, 멘탈계에서의 경험이 보다 의미심장한 현상으로 관찰되고 숙고됩니다. 상위멘탈체의 기능이 활성화되면서 부디 의식의 영향이 보다 의식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부디 의식을 다른 말로 그리스도 의식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본격적인 의미에서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수동적인 상태에서 하위 인성자아의 진화를 지켜보고 있던 부디 의식은 본격적으로 하위 인성자아에 관여하기 시작하고, 비로소 인간은 총체적인 의미에 있어서 물질과 영의 갈등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때까지의 갈등은 대부분 하위 자아들의 상이한 체들 사이의 갈등 내지는 불균형이었을 뿐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의 수행 내지는 공부가 비로소 의미가 있어지고, 다시 말해, 통합된 인성자아와 보다 더 근원적인 어떤 속성 사이에 첨예화된 갈등이 표면화되고, 진정한 의미에서 빛과 어둠의 갈등이 문제가 되는 시기를 맞습니다. 그런 삶은 드라마틱하게 전개되면서,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감동적 비극성과 자아극복의 한 전형을 드러냅니다. 삶과 죽음의 무게중심이 하위 인성자아에서 보편적 자아 쪽으로 옮겨갑니다. 이제 내 안의 그리스도로 인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초지 보살부터가 그런 경지인 것 같습니다.
DK대사는 부디 의식의 개화를 깨달음의 전부로 보지 않습니다. 그 때까지는 부디 의식의 경험과 활성화가 영적 진화의 목표였지만, 아직 2분의 1 밖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부디체 의식으로 변형된 의식은 보다 더 근원적이면서, 인간이 현재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는 모나드와의 연결이 조금씩 의식화되기 시작합니다. 모나드와의 연결, 즉 영(Spirit)과의 직접적이고 의식적인 연결은 부디 의식의 활성화가 이루어진 다음에야 가능합니다.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경지입니다. 그리스도야말로 모나드와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비로소 “나는 그것이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는 말의 의미가 이해된다고 합니다.
육체/에텔체, 아스트랄체, 멘탈체, 부디체.....인간의 각 체들의 발달은 결코 단순 직선적 진화노선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으로 진행됩니다. 같은 시공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각각이 고유의 영적 진화의 단계에서 나름의 진화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제 육체와 에텔체의 통제와 발달에 초점을 맞추고서 공부하고 경험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어떤 이들은 아스트랄체에 의식의 초점을 맞추면서 동시에 육체와 멘탈체와의 본격적인 관계 속에서 갈등을 겪으면서 복잡한 생애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멘탈체의 하위 속성에 집중된 삶을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생애도 단 하나의 체만을 사용하는 경우가 없고, 복잡한 스펙트럼의 색채처럼 서로 겹치고 중심점이 달라지면서 생을 영위해 나갑니다. 물질계에서 생을 영위하는 그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세계를 갖고서 영적 진화를 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토록 이 세상이 복잡하고 다양할 수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어떤 하나의 체가 발달하고 통제되기까지 상당히 많은 생이 요구되기 때문에, 여러 생에 걸쳐서 다양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 각 체가 발달되어 갑니다. 그런 발달은 필연적으로 문제를 야기하는데, 체들의 불균형적인 발달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컬트적인 의미에서 질병의 원인입니다. 또, 모든 체들의 발달은 항상 특정한 차크라들의 활성화 내지는 비활성화를 낳고, 그런 활성화와 비활성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에텔체상의 차크라들만이 아니라, 아스트랄체와 멘탈체상의 차크라들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차크라의 변화는 그대로 다음 생에 이어지고, 다음 생의 경험을 특징지으면서 새로운 경험을 가능케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카르마의 적용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다 이루어지기 전까지 그 날이 오지 않으리라” 말씀하신 뜻이 그런 것입니다. 그 말씀만큼 카르마의 법칙을 언명한 말씀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영적 진화는 필연적으로 카르마를 쌓는 과정일 수 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균형을 잡아야하는 개인적 의무와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더욱 놀랍고 의미심장한 것은, 그런 개인적 카르마의 조정작용이 그가 속해 있는 집단 (그것이 가족이든, 사회이든, 국가이든, 아니면 인류이든)의 카르마와 상호연관되면서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자칫 그릇되게 보낸 삶 속에서 만든 카르마를 조정시키기 위해서 때로는 여러 생을 통해서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할 것입니다. 특정한 차크라를 시기상조로 자극해서 그 결과를 몇 생에 걸쳐서 고통스럽게 치룸으로써, 그 만큼 영적 진화를 지연시키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합니다. 거의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암흑 속을 걸어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불안한 삶의 여정에서 지침이 될 수 있는 것이 성인들의 가르침입니다.
장구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생을 통해 각 체들이 발달되고, 궁극의 영적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윤회는 당연한 영적 진화의 원리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영적 진화의 과정에서 죽음은 단지 육체의 죽음만이 아니라 다른 체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것은 재생의 작용이고, 한 단계 상승된 삶을 위한 매개체의 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생의 인연이 경우에 따라서는 천년 혹은 이천년의 세월을 건너뛰어서 다시 인연으로 맺어져서 카르마의 법칙이 적용된다고 합니다. 그런 모든 작용들은 오로지 하나 인간의 영적 완성을 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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