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현존, 그리고 고요한 수행처의 필요성

http://theosophy.or.kr/index.php?mid=freebbs&page=13&document_srl=12715

스승의 현존, 그리고 고요한 수행처의 필요성

이상수

http://theosophy.or.kr/index.php?document_srl=12715

2009.02.12 11:02:35 (*.142.195.24)

2229

스승의 현존, 그리고 고요한 수행처의 필요성

본격적인 명상을 시작하기로 결심한 사람이라면 조만간 누구나 알게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에서 명상을 하느냐 또는 어떤 누구와 함께 명상을 하느냐에 따라서 집중력과 깊이가 확연히 차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도시의 한가운데에서 부산하게 정리안된 방에서하는 명상과 산사를 찾아가 선승들과 함께 정진하는 것에는 엄청난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파도가 너울거리는 바다에서 헤엄을 치는 것과 잔잔한 강을 흐름을 따라 헤엄치는 것과의 차이에 비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요? 어차피 눈을 감고 앉으면 거기가 자신의 명상처이고 외부환경은 핑계일 뿐인것은 아닌가? 하고 누군가는 물을 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작용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고유한 진동수를 가지고 있고 파동으로서 주변에 영향을 줍니다. 어떤 파동들은 매우 강력해서 주변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은 끊임없이 이런 파동을 일으키며 서로에게 무의식적인 영향력을 주며 비슷한 속성들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산하게 살아가고 있는 도시의 환경은 이렇듯 수많은 복잡한 상념과 정념들로 넘쳐나는 곳이지요. 쉽게 마음이 집중되고 가라앉을 수가 없습니다. 반면, 고요한 산사는 일단 그런 외적인 영향력이 없는 - 물리적으로도 고요하지만 - 환경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거기에 더불어 오랫동안 수행해온 수행자들의 고요하고 수준높은 파동들의 영향력이 깊이 베어있습니다. 그런 곳에서 다른 수행자들과 함께 명상에 드는 것은 바람을 등에 업고 달리는 것처럼 수행자의 명상을 돕게 됩니다. 비슷한 수준 혹은 자신보다 높은 수준의 파동들이 공명하며 수행자의 진동수를 한껏 고양시키고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뛰어난 성취를 이룬 스승의 영향력은 일반수행자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승은 언어로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큰 도움과 인도를 보이지 않게 자연스럽게 제자들에게 베풀게 됩니다.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의 현존에 대한 제자들의 증언은 그런 점을 확연히 알려줍니다. 마하리쉬는 단지 침묵하며 함께 앉아있는 것 만으로 제자들의 영적 성장을 급격하게 일으키곤 했습니다.

따라서 이런 점을 이해하면, 왜 수행자들이 성지순례를 떠나는지, 왜 불교도들이 진신사리 친견을 위해 먼 길을 떠나는지, 왜 위대한 스승을 친견하기를 간구하는지 이해할 수 있으며, 정해진 수행처의 필요성과 공동명상의 힘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초보자가 홀로 도시에서 수행하는 것은 지극히 무모하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영적인 성취를 원하는 수행자라면, 주변의 고요하고 한적한 산사나 도심의 선방이라도 찾아 함께 수행하는 사람들과 공동명상에 참여하기를 권합니다. 그러나 그럴 환경이 되지 않는다면, 적어도 자신만의 명상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고, 주변을 간소하게 유지하며, 늘 그 장소에서 되도록 같은 시간에 명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PS. 글에서 굳이 불교와 선방을 예로 든 것은 불교의 참선이 우리주변에서 가장 쉽게 찾을 수 있고 믿을 만한 공동명상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글을 이해하고, 선방과 비슷한 명상공동체가 있다면 그 어디라도 상관은 없을 것입니다.

Previous
Next Pos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