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체계의 의미...불교와 신지학적 관점에서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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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불교 전통에서 매우 중요한 저서 중의 하나가 쫑카빠께서 지으신 “람림(보리도차제론)”인데, 티벳불교 종파의 하나였던 까담빠의 창시자인 아띠샤 존자의 “람림”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합니다. 왜 이 전승이 의미있는가 하면, 이전의 다른 논서들과 달리 “람림” 전통은 불교적 깨달음에 이르는 단계론적 접근만이 아니라, 수행자의 근기면에서도 단계론적인 관점을 갖고서 서술되고 있는 데 있습니다. “람림”이란 말은 티벳어로 “단계적인 길”을 의미합니다.

불교 이천 오백년 전통의 긴 역사 속에서, 다양한 불교 해석과 종파가 있어 왔지만, 그것은 불교의 문제이기 보다는, 일차적으로 석가 세존께서 사십 년이라는 꽤 긴 시간 동안 다양한 근기와 성향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가르침을 전하셨고, 석가 세존의 사후-사실상, 세존께서 살아계셨을 당시에 이미 그런 오해와 혼란이 있었고, 심지어는 세존의 면전에서도 그런 혼란과 분규가 있었다고 합니다-나름대로의 다양한 교리가 체계화되면서 많은 혼선과 갈등이 있게 되었습니다. 종교적 교리의 다양화와 상충은 비단 불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종교의 특징이고, 심지어 무척 최근에 체계가 잡힌 것이고, 창시자의 가르침이 글자 그대로 명문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신지학에서도 그런 혼란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종교나 사상의 문제라기 보다는, 인간들의 다양성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앨리스 베일리의 저서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모나드는 일곱 광선(Seven Rays) 하나에 귀속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칠종의 모나드가 있게 됩니다. 그렇지만,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육체, 에텔체, 아스트랄체, 멘탈체, 인성자아, 영혼이 나름대로의 광선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경우의 수는 49가지가 생길 수 있고, 거기에다가 한 개인이 속한 국가와 민족에 영향을 미치는 광선들까지 포함시켜서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한 개인이 오랜 윤회 속에서 진화해가는 각각의 단계-신지학에서 진화를 말할 때는 한 개인을 구성하는 각 체들의 다양한 발달과 성숙을 말하는 것입니다-를 생각하면, 어느 한 개인의 복잡한 정체성을 정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인간의 모든 견해와 경험이라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DK 대사는 사소하고 당연시하는 경험조차도 타인이 자신과 같이 보고 경험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인간의 영적 진화가, 영혼(Soul)을 의식적으로 접촉해서 영혼의 빛을 능숙하게 활용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고 나서야 비로소, 그런 오해와 갈등을 극복할 수 있고, 진정으로 타인의 견해와 경험의 지평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영혼의 빛을 활용할 수 있는 단계는,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닌데, DK 대사는 자신이 “영혼”이라는 말을 쓰고는 있지만, 과연 현재 지구상의 인류 중에서 그 말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지 회의적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혼”이란 말을 쓰지만, 거의 모든 경우에 에텔체상의 경험들이거나, 좀더 세련된 경우에는 아스트랄체의 경험들이고, 혹은 멘탈체의 미세한 작용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심령적 영향력들은 상상을 넘어서는 것으로, 의식이 미세해지고 각종 감각기능이 활성화될수록 심령적 영향력들은 강도를 더해가고, 미세한 영역에서 올바른 길을 간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 된다고 합니다. 허다한 인식과 경험들이 정체불명의 심령적 영향력에 의해 생긴 것임을 당사자는 꿈에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다시 불교로 넘어가면, 쫑카빠께서는 공성을 제대로 깨닫고 확신할 수 있는 단계를 “견도위”라고 하는데, 그런 경지에 이르기 전에는 모든 수행이 유위적인 노력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치밀한 분석과 지성적 분별관찰을 통해서 삿된 견해를 제거하고, 수행의 장애를 이루는 각종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바라밀다”라 부르는 각종 방편 수행을 겸비해서 수행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견도위”에 이르고 나서도 유위적인 노력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성적 분별관찰 과정은 보다 더 미세한 영역에서도 지속되는데, 그 후의 수행은 “견도위” 이전과 성질을 달리한다고 합니다. 흔히 말하는 “무분별지” 수행은 견도위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삼륜(행위자, 행위, 행위의 대상)이 청정한 상태로 보시 바라밀을 행하라는 것이 어느 경지에서 이루어지는 것인지 혼동하면 안 됩니다. 견도위 이후에서조차도 온전히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하물며, 견도위 이전의 공덕을 쌓는 “자량위”나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바라밀에 집중하면서 지혜를 닦는 “가행위”에서는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가행위가 일정한 경지에 이르기만 해도, 그 경지만으로도 세간에서 스승으로 통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한국에서의 불교적 수행과 공부에 있어서 혼란을 겪는 것은, 간화선 전통의 결과론적인 접근이 우세하다 보니까, 단계론적인 접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에서 그 원인의 하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수승한 공성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식으로 말하면 상당한 정도의 공덕을 쌓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곧 일정한 정도의 윤회를 통해서 공성의 가르침을 접하고 이해할 수 있는 공덕을 충분히 쌓아야만 비로소 공성의 이치에 대해 수행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공성의 이치를 전하는 것은 큰 악업을 짓는 것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근기가 낮은 이가 공성의 이치를 들으면 혼란을 겪게 되어서 불법 수행을 소홀히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과론적인 가르침과 단계론적인 가르침을 혼동하면 공부와 수행상의 많은 혼란과 오해를 겪게 되는데, 쫑카빠의 “람림”은 그런 혼란에서 지침을 줄 수 있는 유익한 참고서의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쫑카빠께서는, 본래 마음의 본질은 청정한 불성이라서 선업도 악업도 존재하지 않고,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고 아무리 외치고 다짐하지만, 무시이래로 쌓은 선천적인 무지와 번뇌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불교적 깨달음에 이르는 여러 단계와 근기의 차이를 고려한다면, 불교라는 종교적 체계의 중요성은 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법당에서 금속을 입힌 불상 앞에서 절하고 복받기 위해 기도할지라도, 수행의 단계론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면, 결코 무의미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복전함에 일정한 액수의 금전을 넣는 것이나, 불전에 공양물을 바치는 것조차 무의미한 행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안 봐도 그만인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서도 일정한 절차를 거쳐야 하고, 일정한 금액-일정한 노동의 대가로 얻은 돈-을 지불해야 하듯이, 궁극의 깨달음과 행복을 위해서 그에 상응하는 일정한 절차와 대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스승에게 절하고, 가르침을 청하고, 들은 가르침을 숙지하고 사유하면서 그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그 모든 행위들이 수행의 단계론적인 맥락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행위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정한 스승이 대표하는 특정한 법맥이라는 구체적 전승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세속적인 의미에서나 영적인 의미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결단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결단의 구체적인 행위의 하나가, 불, 법, 승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보에 귀의하지 않으면서 불교적 수행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접근이 될 수 없고, 반드시 삿된 결론에 이르고 맙니다.

불교적 수행과정의 각종 행위들은 매우 중요한 종교적 의미들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행위들 중에는 미신적이고 단순히 물질적 만족만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정도의 미신적 행위들은 건전한 양식을 갖춘 사람들이라면 쉽게 분별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미신적 행위라고 하는 종교적 행위들도 깊게 음미해보면, 나름의 목적과 결과들을 낳는 것으로, 반드시 해로운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니고, 동기가 중요하다면, 충분히 종교적인 행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유하면, 귀중한 손님을 맞기 위해서, 집안팎으로 청소하고, 정돈하고, 각종 음식을 준비하고, 식구들도 단정한 옷차림으로 준비하듯이, 올바른 종교적 경험과 깨달음을 위해서 각종 장애들을 없애기 위해서 행해지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지학 초대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이었던 리드비터는 카톨릭의 주교로서, 카톨릭 미사를 비롯한 각종 종교의식의 오컬트적 의미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앨리스 베일리의 저서들에서도,각종 종교적 의식에 깃들인 오컬트적 의미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 의미있는 종교적 의식에는 반드시 특정한 심상화 작용, 만트라적인 발성, 특정한 신체적 행위, 특정한 감정적 성향을 강조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요소들은 에텔체 상의 차크라들 사이의 기하학적 역학관계를 염두에 두고, 인간의 감정적 지성적 성향의 에너지적 성질을 염두에 둔 것들입니다. 영적 수행의 과정은 엄격한 과학적 법칙이 지배하는 과정이고, 인간의 도덕적/종교적 관념조차 물리적인 법칙만큼이나 구체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법칙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을, 앨리스 베일리 여사를 통해서 전해진 DK 대사의 가르침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천 오백년의 장구한 역사를 통해서 형성된 불교라는 거대한 체계는 단순히 조직화된 체계를 넘어서서, 구체적인 영적 현실로 자리잡았습니다. 윤회를 인정한다면, 숱한 수행자들이 몸담았던 영적 전통이니 만큼, 그 영향력과 영적 감화력은 시공을 초월해서 귀의하는 이들에게 영적 도움을 제공합니다. 가시적인 교단과 조직의 위계질서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영적 위계질서(수직적/수평적 의미에서)에 이르기까지, 불교라는 종교체계는 거대한 그물망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종교적 전통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은 스승과 제자라는 특정한 관계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종교의 신비 중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스승과 제자라는 특별한 경험을 빼고서 진정한 의미의 종교가 성립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시공을 초월해서 다양한 각도에서 작용하고, 그 관계가 구체성을 띄는 만큼 영적 깨달음도 그 만큼 구체화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볼 때는, 그 정점에 바로 석가 세존이라는 위대한 영적 스승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승불교의 가장 비밀스런 가르침은 부처와 보살이 “자비행”을 실천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비단 불교만이 아니라, 앨리스 베일리의 저서들에서도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루어지는 주제로, 영적 진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지학에서 말하는 “이니시에이션(Initiation)”은 어떤 의미에선,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단계적으로 변화를 겪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우주적 법칙인 “인력(Attraction)”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소우주적인 면에서도 똑같이 작용하는 법칙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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