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깨달음에 이르기 어려운 이유

여성이 깨달음에 이르기 어려운 이유

이은희

http://theosophy.or.kr/index.php?document_srl=13940

2009.12.26 02:51:36 (*.238.39.69)

8300

여성은 왜 깨달음에 이르기 어려운가 

                                                무명암 에오 “페허의 붓다” 중 발췌

질문 : 자아가 강한 남성보다 수용적인 여성 쪽이 깨달음에 이를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데 어떻습니까?

회답 : 여성 수행자에게 가장 있을 법한 마인드 트립(Mind Trip)은 다음과 같다. 

남성이 헤드 트립(논리주의) 이라면
여성은 마인드 또는 필링 트립 즉, 감각주의다. 
그러나 감각과 본성은 전혀 관계없다. 
여성 특유의 변덕스러움이나, 감각적인 영향을 받기 쉬운 점은, 참의미에서의 본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나 이 느낌이란, 불성이나 본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이것들은 사고를 부정한 것이며, 그것보다 더 낮은 느낌의 세계로 도망가는 일종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을 한번 둘러보라. 
그렇게 말하는 여성들 대부분이 안정도 통찰도, 또 그녀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선량함 하나 갖지 않은 히스테릭한 상태에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상당히 지엽적인 화제이지만 한가지 예로서, 라즈니쉬 아쉬람이라 불리우는 인도의 코뮨에서 일어난 <광명(光明)>을 이야기 해보자. 내가 책이나 또는 그 밖에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여성으로서 깨달음을 얻은 이는 마스터의 할머니와 그 측근인 비벡크 두 사람뿐이다. 단, 공표되지 않았을 뿐, 따로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머지는 타다, 싯다르크, 비마르킬티, 칭마야, 그들 모두는 남자다.
이같은 순수한 통계와 수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역사적으로는 바라문 승려가 광명을 깨달은 궁사(弓師)였던 여직공과의 만남을 통해 변용(變容)을 일으킨 경우도 등장한다.
섬세한 감성을 가진 여류 시인이나 아주 특출난 무용가에게 깨달음의 의식이 있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앞서 말한 코뮨에서의 남녀 간에 편중된 수치는 무엇 때문인가를 조금 관찰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여성에게 깨달음의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당신들이 알고 있는 수준의 여성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

라즈니쉬는(오쇼 라즈니쉬) 많은 강연에서 특히 수동적인 기다림을 여성 특유의 성질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감각속에 매몰되거나 생리적으로 또는 뒤죽박죽된 감각의 혼돈에 항복하라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아무 기준도 없이, 느낌(기분이나 비위)에 따라 왔다갔다하는 것을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 말하는 여성이 있다면, 그런 여성들은 제일 먼저 논외의 대상이다.

아주 주위 깊게 관찰해야만 할 것은, 
왜 결과적으로 깨달음을 얻은 이들이 남성에게 편중되는가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사회 제도 속에서 정보 유통의 제한이 있었고,
여성 붓다들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었다는 점, 그리고 그녀들이 눈에 띄게 기록에 남길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건 정당한 이유는 아니다.
왜냐하면 라즈니쉬는 거의 반수에 가까운 주요 스텝진들을 여성들에게 맡겨 운영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남자들이 깨달은 것일까?

이는 궁극적, 단계적으로 보더라도 
마지막에 뛰어넘는 것이 지성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식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철저한 관찰력 또는 날카로운 감성과, 통찰을 포기하지 않는 역량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한 고뇌가 있기 때문에 비로소 지성을 통째로 포기하는 순간이 온다. 이는 모든 일들의 당연한 순서이다.
마음이나 감정은 비움의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그 중추가 일을 잘 할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 비우는 일은 누구하도 조건이 갖추어지면 간단하다. 
그러나 그런 여성들이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남자와 어떻게 문제를 일으키는가를 살펴보라.
불행은 항상 사고의 <거래로부터> 비롯된다. 
<이게 아니었는데><그 사람은 틀림없이 이럴 거야>라는 기대가 무너지고 역겨워지면서, 끝내는 혐오와 실망을 넘어 결혼과 출산으로 인한 인내의 생활이 편안함이요, 안정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난 그런 주부들이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태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들은 언제든지 정신 병원에 갈 수 있다.

이런 하위(下位)의 마음 중추는 수동적이어도, 상위(上位)의 지성이 수동성을 지닌 채 안정되지 않으면, 결국 그녀들은, 모든 일에 직면해서 도망갈 구실을 만드는 데 한 몫하는 이론가가 되고 만다.
그러니 이 <느낌>이라는 단어에 주의하라.
이는 결코 <정신용어(精神用語)>가 아니며, 타오(TAO)도 아니다. 
사하스라라(지성 센터) 기능의 개입 없이 타오(TAO)에서 말하는 무위도, 자연도, 감각도, 깨달음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지성(知性)이 뇌의 뒷구석에서 산송장이 되어버린 일반 여성들이라면 불가능하다. 

거꾸로 말하면 선천적으로 철저하게 지성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여성이라면, 오히려 깨달음이 가능하다.
실제로 그것은 완전한 무지(無知)를 의미한다.
어디 하나 영리할 것 없는 여성들만이 진짜 탄트릭을 이룰 수 있다. 
내가 아주 머나먼 전생(前生)에서 관계를 맺은 마녀들은 이런 타입들이었다. 
그녀에게 지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다. 그러나 영혼을 팔아넘길 정도로, 절대적이라 할 만큼 아름답고 미쳐버릴 정도로 관능적이다. 그저 그뿐.
거기에는 이론도 수행도 없다. 사랑조차 없다.
그러나 그것을 동물적이라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다른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순수한 육체성을 통해서만 최고 의식의 절정 즉, 고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당시의 나에게 한정된 이야기지만.
이러한 전면적인 만남에서만 육욕과 고차원체의 분리가 일어난다. 
관능은 완전하다. 그리고 의식도 완전하다. 단, 사고는 없다. 어떤 작용도 없다. 그러므로 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지성의 전멸이야말로 남성이건 여성이건 광명에 필요한 조건이며, 
이치를 모를 때 자기가 편한대로, 느낌(기분이나 혐오감)으로 도망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일반적으로 남성은 감정을 넘어서기 쉬운 진동 위치에(중심의 센터)가 있다.
하지만 그 또한 극히 일부이다. 
하지만 여성 중에 그런 인물은, 이 생에서는 단 한 사람밖에 모른다.
그러나 남성은 상당히 많다.
이는 역시 그들이<최후의 난관>에 있음을 의미한다.
즉, 마지막 한 걸음인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남성도
과거에 충분히 감정적인 마음으로 살아본 경험을 필요로 한다. 만약 마음으로 살았던 강렬한 통과가 없다면 그들은 진흙탕 속에서 지성을 넘어섰을 때, 이번에는 마음 센타의 구애를 받게 된다. 
다시 말해, 7개 또는 9개 또는 12개인 이들 챠크라를 전부 통과하지 않는 이상, 어디선가 마지막에 발목을 붙잡히고 마는 것이다. 
마지막에 발목을 붙잡히는 것은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지만, 어찌되었든 그것은 당신의 실존이 사하스라라에 오래도록 머물지 못하는 원인이다. 당신은 오래가지 않아 추락하고 하위위 충동에 우롱당하고 만다. 

이성(異姓)과 재대로 육체 관계를 끝맺고 성(性)센타에 충분한 만족이 얻어지지 않으면 당신은 명상 후에 한 순간, 성(性)에 사로잡힌다.
마찬가지로 만약 지성 센타가 충분히 발달되지 않으면 당신은 명상이 끝나자마자 생각에 빠지고 만다.

만약 마음에 결함이 있다면 당신은 명상 직후에 외로움과 어리광, 감상 또는 분노에 빠질 것이다.
당신이 충분히 돌보지 않았던 당신의 중추 센타가 당신을 추락시킬 것이다. 

난 결국 지성이 여성을 추락시키는 원인인 경우가 많다고 본다. 
또, 오르가슴을 몇 번씩 끝까지 경험하지 못한 여성(이는 성적 결함이 있는 상대 남성에게도 책임이 있다.) 또한, 최종 단계에 가서 채워지지 않은 성(性)에 사로잡히고 만다.

모든 단계에는 전락이 있다.
예를들면 수정이나 보석에 마음을 뺏기는 것은 오컬트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굴절된 물라다라(Muladhara, 생명에너지가 있는 중추)의 물질 콤플렉스에서 기인한다.

지구력을 요하는, 힘쓰는 작업을 과거에 충분하게 발휘하지 못하면 명상 직후의 당심의 육체는 몸둘 곳을 모르고 헤매게 된다. 
이것도 마니푸라 챠크라(Manipura, 태양 신경총)의 불만족에서 온다.
기억력을 충분히 사용하거나 또는 꿈을 충분히 꾸지 못하면 당신의 비슈다 챠크라(Vishuddha, 통신 중추)를 통해 당신은 영적으로 무수한 비전을 보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기억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크게 6개의 다른 챠크라의 균형잡힌 통과(경험)가 없으면 당신은 결코 제7 또는 제8의 중추, 또는 육체 밖에 있는 9번째 챠크라에서 살 수 없다. 

내가 제세한 뇌의 상부 중추에 집중하기 전에 당신은 자신에게 아직 침투하지 않은 챠크라에 달라붙은 작업을 처리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그 어떤 작어보다 필요하다. 
그후에 비로서 당신은 고요와 어둠 속으로 돌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어딘가에서 정신의 <죽음>에 겁을 먹은 채 되돌아오고 말 것이다. 

챠크라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고전적인 체계다.

그러나 이것은 기초다.
그러나 그것은 함부로 챠크라에서 명상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 챠크라 특유의 성질에 대응한 현실 생활을 제대로 해내라는 것.

사인선은 그 후에 비로소 진가를 발휘한다. 

                                                    -흥미로운 글인 것 같아 올려봅니다.^^;;-

Previous
Next Pos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