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한 삶을 위해 앎을 확장하는 방법 ]


사람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내용이나 자신의 믿음과 다른 이야기를 들을 때 신중한 입장을 보입니다. 그 이유는 앎이 본인이 알고 의지하는 가치관과 행동방식에 양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사람들 끼리 언쟁을 하거나 서로 공격적이거나 방어적인 형태를 보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논쟁은 매우 건전하고 필요한 과정이지만 감정과 아상이 개입되면서 본인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본인의 주장을 지지하는 내용들을 대화에 이용하게 됩니다. 이것은 육신이 가지고 있는 생존에서 기인한 버릇과 비슷합니다.

문제는 언어와 말하는 이의 부정확성에서 일어납니다. 언어는 매우 다양한 차원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학교에 간다." 라는 매우 단순한 말은 어떤 요구에 대응하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위치라는 차원에서는 학교라는 지역적인 정보가 주가 되며, 직업이라는 차원에서는 학생이라는 의미를, 행위라는 측면에서 등교라는 정보가, 선택이라는 차원에서는 다른 선택과 구별되는 학교라는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말하는 사람은 대화도중 본인의 주장을 맞게 하기 위해서 언어의 다양한 차원의 변이를 이용합니다. 그 과정에서 상대방은 그런 변이를 옳지 못하다거나 대화가 안된다라는 것으로 받아 들이고 더욱 감정적으로 대화를 하기 시작하고 어떤 앎의 획득 보다는 감정적인 상처로 대화를 마무리 하게 됩니다. 인간 의식 발달의 큰 장애물로써 인간의 언어를 꼽는 이유도 이런 언어의 부정확성 때문입니다.

이 앎 즉 지혜라는 것은 많은 논쟁이나 공부를 통해 항상 더 새롭고 정확한 정보로 성장을 시켜나아가야 본인의 삶의 질 역시도 향상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두가지에서 이 지혜의 확장을 제한하게 됩니다.

하나는 새로운 지혜의 확장을 할려는 시도나 기회를 가지지 않습니다. 생존과 관련된 직업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기 때문에 지혜를 넣어달라는 영혼의 요구에 부응하기에는 너무 의식이 지쳐 있습니다. 반면 물질로 그것을 대체할려고 하기 때문에 불행의 원인이 물질의 결핍에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듭니다.

두번째는 새로운 정보에 대한 방어 입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나를 설득하지 못한다면 상대방의 정보가 틀렸다고 생각하고 지혜를 넓히는 과정을 능동적이기 보다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여기에는 몇가지 위험성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새로운 정보는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본인이 이전에 가지고 있는 지식과 위배되거나 이해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새롭거나 더 나은 정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지지하는 많은 새로운 정보가 필요로 하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많은 새로운 정보를 익히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는 것을 이해하지도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의 연결(네트웍)에서 위배되면 바로 틀렸다 라고 인식을 하게 되고 네트웍의 확장을 중지하게 됩니다. 시골에서 농사만 지은 농부를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본인이 알지못하는 선지식에 대해서는 알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식과 정보는 무한하기 때문에 죽을때 까지 우리는 모든 지식을 다 알수는 없습니다. 이는 우리의 지식이라는 것과 거기에 기반한 행동이라는 것 까지 모두가 불완전 하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의지해서 사는 것이 더 올바른 행동일까요?


이전에 올린 D.K. 대사님의 글 오컬티스트와 신비가
http://beliveman.blogspot.com/2015/03/blog-post_1.html


에 올린 내용처럼 오컬티스트는 눈 앞에 일어나는 여러 정보들을 받아 들여 원리라는 좀더 근원적인 정보를 추출해 냅니다. 이는 다양한 현상에 적용될수 있는 좀더 근원적인 지식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여러가지 현상에 비해서 이 원리는 많은 다양한 현상을 설명할수도 있고 그 원리의 수는 지식 만큼 많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양극입니다.



대립되는 쌍이라는 미혹
http://beliveman.blogspot.com/2015/03/blog-post_1.html
이원성 양극
http://beliveman.blogspot.com/2015/02/blog-post.html



현상계에서 양극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은 공 밖에는 없습니다.
이렇듯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현상계를 지켜보고 원리를 터득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러한 원리에 의존을 하게되면 좀더 정확하고 올바른 행동을 할수 있습니다.


http://beliveman.blogspot.com/2014/06/blog-post_19.html
부처는 이런 가르침을 남겼다. “ 너희가 어떤 것을 들었다 해서 단순히 그것을 믿어서는 안된다. 어떤 말이 회자되어 수많은 이들이 들었다고 해도 그것을 단순히 믿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종교 경전에 씌여져 있다해서 단순히 그것을 믿어서는 안된다. 어떤 말이 너희 선생이 말하거나 장로나 기관의 책임자가 말했다고 해서 단순히 믿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수많은 세대동안 전수되어져 온 전통이라고 해서 믿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관찰하고 분석을 한후 너희가 이치에 부합한다고 알게되면 그래서 그것의 효과가 선하고 유익함에 부합한다면 그때는 그것을 받아들여라.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원리를 파악해 낼수 있으면 잘못된 종교, 문화, 관습으로 부터 독립적이 되어 영혼의 가이드를 따르는 더욱 올바른 삶을 살아갈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존의 말씀처럼 얄팍하게 얻어진 원리에 너무 의존해서도 안됩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항시 변하기 때문에 꼭 이렇다 할만한 정해진 원리마져도 종국에는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명상과 공의 체험을 통해서도 원리와 지혜를 획득할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명상과 현상계를 느끼는 감각기관 이 두가지 방법을 통해서 세상의 창조주이신 법신의 원리과 존재를 알아 낼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본인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마음으로는 객관적으로 사물을 바라 볼수가 없습니다.

http://beliveman.blogspot.com/2015/02/blog-post_21.html

이타 행 만큼 세상의 본질을 정확하게 바라보게 만들어 주는 것이 없습니다. 본인이라는 관점만 없어져도 많은 세상의 본질을 올바르게 볼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주변의 현상계 그리고 타인의 의견 또한  매우 진지한 태도로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인이 어느 정도 지혜가 터득되면 상대방이 말하는 것을 바로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상대가 사용하는 논리와 말투 표현방식만으로도 진위여부를 판단할수 있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인간은 이미 매우 예민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나쁜의도를 가진 사람들은 상대의 탐욕을 이용해서 눈을 멀게 합니다. 그러한 이유때문에 모든 상대의 선한 의도 또한 매도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본인의 마음을 깨끗히 하는 것이 올바른 판단의 척도가 됨을 명심하기시 바랍니다. 항상 열린 마음으로 세상과 마음의 정보를 받아들여 법신(하나님)의 원리를 알아가는 일을 성실히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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