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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학 대의 14. 불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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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세계의 어떤 종교보다도 많은 수의 신도들을 자랑하고 있으며 수많은 인류의 삶에 살아있는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람들이 유럽의 동양학자가 쓴 책을 읽고 불교를 판단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다.
실론과 미얀마에 있을 때 나는 그 책들을 불교 승려들이 단 교의 주석서와 비교해 보았다. 동일한 지식으로 동일한 주제에 접근하고 있지만 확실히 그들의 교의 해석은 훨씬 더 자연스럽고 생명이 넘치고 있었다.
불교 사상의 진수를 보여준다는 평을 받는 영국에서 가장 뛰어난 책은 에드윈 아놀드가 쓴 <아시아의 빛(Light of Asia)>이며 그 다음가는 책은 필딩 홀이 쓴 <어느 민족의 혼(The Soul of a People)>이다.
일부 비평가들은 아놀드가 원전을 약간 벗어나 의역을 하였고 기독교 사상을 거기에 투영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아놀드가 어떤 다른 저자들보다도 훨씬 가깝게 불교도의 느낌과 자세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발견할 수 있었다.
불교는 오늘날 북방불교와 남방불교로 나뉘어져 있다. 이 양자는 모두 다소 부처의 본래 가르침에서 벗어나 있다. 불교는 매우 분명하고 직선적이고 평이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즉시 그것에 자신을 동화시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와 종교의식을 꼭 포기해야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결과로 북방불교에서는 전파된 지역의 토착신앙과 의식들을 흡수하여 다른 많은 요소들이 부가된 형태를 띠게 되었다. 예를 들어 티벳불교에는 원시불교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하급신들과 데바, 데몬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한편 남방불교는 부처의 원래 가르침에 뭘 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뭔가를 상실해 버렸다. 남방불교는 불교의 물질적, 공론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남방불교에서는 오로지 카르마만 생에서 생으로 전해지며 인간에게는 불변의 자아는 없고 다음 생에 태어나면 사실상 새로운 인간이며 그것은 전생의 카르마의 결과라고 가르친다. 그들은 이러한 사상을 뒷받침하기 위해 부처의 여러 말들을 인용한다.
부처가 종종 인성(人性, personality)의 영원성을 부인하는 말을 한 것은 사실이다. 게다다 그가 거듭 대중들에게 사람들이 어떤 다른 사람과 관련하여 알고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다음 생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강조하여 말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어디에서도 개체성(individuality)을 부정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인간의 개체성을 절대적으로 인정하는 많은 말들을 했다.
예를 들어 디가니카야(Digha-Nikaya)의 사만나 팔라수타(Samanna-phalasutta)에 나온 한 경우를 보자. 영적 진화에 필요한 마음의 상태와 훈련을 처음 언급하면서 부처는 그의 심안(心眼)에 자신과 관련되었던 장면들이 차례로 지나간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마을을 떠나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다가 다시 자기 마을로 돌아온다면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내 마을을 떠나 다른 마을로 갔고 거기에서 이렇게 저렇게 서 있고, 앉고, 말하고, 침묵했다. 다시 그 마을에서 또 다른 마을로 갔고 거기서도 전처럼 그러한 행위들을 했다. 그리고나서 나(동일한 나)는 거기에서 내 마을로 돌아왔다.’
그와 꼭 마찬가지로 오, 수행자여, 사람의 마음이 순수하다면 그는 그의 전생을 알 수 있다. 그는 생각할 것이다. ‘나는 어떤 장소에서 어떤 이름을 갖고 있었다. 나는 어떤 마을에서 태어났고 어떤 카스트였고, 어떤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어떠 어떠한 길에서 기쁨과 고통을 경험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전생(轉生)하여 어떤 다른 장소로 갔고 거기에서 나는 또한 어떠 어떠한 상태였다. 그렇게 전전하며 동일한 내가 이제 여기서 태어난 것이다.’”
이것은 매우 분명하게 자아의 윤회에 대한 부처의 교의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또한 같은 경전에서 수행자가 다른 사람의 전생을 알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 방법을 통해 수행자는 다른 사람이 어느 곳에 다시 태어났는지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브라마잘라 수타(Brahmajala Sutta)에서 그는 혼의 모든 다양한 측면들을 언급하면서 ‘그것들의 존재는 접촉, 즉 관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상대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혼의 절대적 실재를 그렇게 부인하는 가르침은 다른 위대한 인도의 스승들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혼의 존재뿐만 아니라 심지어 로고스 자체의 존재도 오로지 상대적으만 사실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에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은 자주 이 개념들을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동양사상을 면밀히 공부하면 실수없이 그 진의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부처의 가르침은 오늘날 신지학에 의해 주어지는 것과 정확히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경전들이 특별히 강조되거나 왜곡됨으로써 피상적으로 서로 모순되어 보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남방불교는 자아의 연속성에 대한 주장보다 인성(personality)의 영속성을 부인하는 쪽에 매달리기를 선택한 것이다. 마치 기독교에서 일부 사람들이 특별한 경전을 강조하고 그것과 다른 것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와 매우 유사한 오해가 있는 또 다른 문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열반(니르바나)을 소멸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심지어 옥스퍼드의 산스크리트 대학자인 막스 뮬러도 오랫동안 그렇게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년까지 계속 더 깊이 연구한 끝에 그는 자신이 이점에서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부처가 말한 니르바나의 의미를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사고방식에만 훈련된 사람이 이해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유럽의 동양학자가 일견 오해했던 것도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동양에서 불교승려들 사이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들이 도달하려고 애쓰는 목표가 소멸이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니르바나를 성취하는 것이 인간의 저급한 면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것은 진정 사실이다. 그리고 현재 상태의 인간이라면 그의 모든 면이 저급한 것이라고 봐도 사실상 무리가 없다. 저급한 체들과 연결되어 있는 모든 것이 그렇듯 인성(personality) 또한 비영구적인 것으로 언젠가 소멸될 것이다. 현 수준의 우리에게 있어서 저급체나 인성이라는 용어 아래 포함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제거해 버린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모든 것이 남아있다. 언제나 존재하는 영광의 영(靈)안에는 지상의 윤회를 통해 오랜 세월동안 투쟁과 고통을 겪으며 발전시켜온 모든 성질들의 에센스가 충만하게 내재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저급한 본성을 제거한 자는 이제 인간을 넘어선 존재가 되어 신성의 문턱에 서 있다. 그러나 그때에도 그는 여전히 그 자신인 것이다. 비록 그것은 훨씬 더 넓은 자아이기는 하지만.
그 동안 니르바나에 대해서 수많은 정의들이 내려져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 중에서 만족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아마 그중 가장 나은 것은 ‘전지자 안의 평화’일 것이다. 여러 해 전 내가 어린이들을 위한 불교 교리 문답집을 준비하고 있을 때 대승원장 수만갈라가 직접 어린이들을 위해, 내게 니르바나에 대한 가장 나은 정의를 내려 주었는데 그것은 ‘일상의 상태를 아득히 초월한 평화와 지복의 상태’라는 것이었다. 확실히 그것은 소멸의 개념과는 매우 동떨어진 것이다.
니르바나의 상태에서는 사실 우리가 지금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개체자아가 소멸해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신성 안에서 개별성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인 것이다. 부처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니르바나는 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북방불교와 남방불교의 또 다른 차이점은 그들이 서로 다른 경전의 번역판을 채택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북방불교는 마하야나(Mahayana, 대승)를, 남방불교는 히나야나(Hinayana, 소승)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정의해도 정말 괜찮은 것인지는, 논란이 많은 용어에 우리가 흔히 붙이는 이른바 ‘의미의 그늘’에 달려 있는 문제이다. 야나(Yana)는 ‘탈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인생의 바다를 건너 니르바나로 우리를 태워다 주는 배로서 담마(dhamma), 즉 법(法)에 적용되어지는 것이라는데 의견이 일치한다.
그러나 그것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적어도 다섯 가지의 이론이 있다.
1. 그것은 단순히 법이 씌어지는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하에 볼 때 큰 수레는 산스크리트어이고 작은 수레는 팔리어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은 나로서는 지지하기 어렵다. 사실 북방불교는 산스크리트 번역판을 이용하고 있고 남방불교의 경전은 팔리어(부처가 사용한 언어)로 되어 있다.
오늘날의 팔리 경전들은 본래의 것이 아니다. 모든 원본들은 (적어도 실론에서는) 타밀족의 침입자들에 의해 완전히 분서(焚書)되었고 지금의 팔리 경전들은 엘루(Elu)의 사본으로부터 재 번역된 것이라고 한다.
2. 히나(Hina)에는 작다는 뜻 말고 낮은, 쉬운이라는 의미도 있다. 따라서 히나야나를 해석하면 자유에 이르는 낮은, 쉬운 길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그 길의 성취에는 최소한의 지식과 행위만이 요구되어진다. 반면 어원상 마하야나는 자연의 고급계에 대한 많은 전통적 지식을 포함하고 있는 훨씬 더 풍부한 철학 사상이다.
3. 불교는 타종교들에 대한 무한한 관대함으로 인해 그것들 또한 자유에 이르는 길로서 받아들인다. 물론 부처가 가르친 방법이야말로 가장 짧고 확실한 길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사상에 따르면 불교는 마하야나이고 히나야나는 브라만교, 조로아스터교, 자이나교, 기타 다른 종교들을 포함한 일체의 것이 된다.
4. 대승과 소승의 교의는 단순히 한 사상의 두 단계일 뿐이다. 즉, 히나야나는 스라바카스(듣는 자, 즉 초심자)에 해당하고 마하야나는 좀 더 발전된 구도자들에 해당하는 것이다.
5. 야나(yana)라는 단어는 그 기본적인 의미인 ‘탈 것’으로가 아니라 부차적인 의미인 ‘운송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마하야나는 보디사트바(보살)가 되어 만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대운송자이며 히나야나는 자신의 니르바나를 성취하기 위해 살아가는 소운송자가 된다.
아디붓다(adi budda, 본초불)와 아발로키테쉬와라(관세음보살)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도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나는 특별히 철학적인 관점에서 이것들에 대해 연구해 본 적은 없다. 그러나 불교의 권위자와의 토론을 통해 축적한 사상으로 볼 때 아디붓다는 위대한 초인 발전 단계의 절정으로, 이른바 모든 붓다들의 추상적 원리라고 할 수 있겠다.
아발로키테쉬와라는 북방불교에 속하는 용어로서 로고스에 해당하는 불교의 명칭으로 보인다. 유럽학자들은 그것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주님’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다소 부정확한 정의인 것 같다. 왜냐하면 아발로키테쉬와라는 분명 항존하는 로고스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때로 태양계의 로고스를, 때로 그보다 더 높은 로고스를 의미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항상 현현해 있는 로고스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종교의 창시자들이 보고, 알고, 이름 붙인 것들을 그 추종자들이 언제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단지 이름들만 알고 있는 추종자들이 그것들을 가지고 지성적, 사량적으로 분별하여 부정확하고 일관성 없는 것들을 무수히 쌓아 놓고 있다.
실론, 미얀마, 사이암, 캄보디아를 포함하는 남방불교는 일본, 중국, 티벳의 북방불교에 현저히 나타나는 이런 덧붙임들을 철저히 배제해 왔다. 미얀마에서는 사원에 부처의 상 이외에는 어떤 다른 상들이 없다. 물론 부처상이 수많은 헌신자들에 의해 다른 재료로 된 것, 다른 자세를 취한 것 등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실론에서는 타밀왕조 시대에 대중적 감정의 용인이나 외래정부에 대한 어떤 특별한 허용이 이루어졌던 것 같다. 왜냐하면 불교사원에 힌두 신들의 조각상들이 종종 눈에 띄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 그것들은 항상 하단에 놓여졌으며 부처에게 시중드는 자들의 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우리는 티벳인들이 불교에 일정한 미신적 요소들을 혼합시킨 것에 대해 그들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이와 같은 현상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나라, 모든 종교에서 발생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이탈리아에서는 고지에 사는 수많은 농민들이 고대종교를 따르고 있는데 요즘에도 로마제국 시대보다 앞선 에트루리아의 이름 아래 바커스 예배를 계속하고 있다. 카톨릭 사제들도 이 고대종교의 존재를 잘 알고 있고 그것에 반대하고 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남방불교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어떤 종류의 의식도 거의 없다는 점이다. 사실상 크리스트교에서 행하는 의식과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아침에 사원에 찾아갈 때 사람들은 승려들에게 자기들을 위해 세가지 지침과 다섯가지 계율을 외워주도록 부탁한 뒤 따라서 복창한다. 그러나 이것조차 공식적인 의식으로 불리기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정한 회수만큼 영창하는 것이 아니며 그나마 그것도 어쩌다 사원에 들른 일단의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파리타 또는 피리트(축복을 의미함)라 불리는 의식이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사원 내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며 어떤 정해진 시간에 행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신도들이 의식을 베풀만한 특별한 경우에 행하는 경사정도로 여겨지고 있다.
이 경우 신도들은 의식이 베풀어질 가건물을 짓고 그것을 정성껏 치장한다. 의식은 경전에서 발췌한 축시를 승려들이 두시간씩 교대로 영창하는 것으로 일정한 기일(대개는 2주간)동안 행해진다.
때로는 어떤 사람이 병이 들었을 때 그를 위해 이 피리트 의식이 베풀어진다. 사람들은 이 의식을 하면 그가 회복될 것이라도 믿고 있다. 실제로 그것은 최면적인 의식이다. 승려들은 밧줄을 쥔 채 원을 둘러앉고 손에 쥔 로프로 원을 빙 두른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정해진 대로 경전을 음창한다. 그러는 동안 계속 환자를 축복하는 의지를 강하게 마음속에 떠올린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의식이 집행돼 나가면서 그 밧줄은 강하게 자기화(磁氣化)된다. 후에 이렇게 자기화된 밧줄의 올들을 큰 물그릇에 넣고 의식이 끝난 뒤 사람들에게 물을 나누어준다. 이러한 의식과정에서 환자는 대개 밧줄과 연결되어 있는 끈을 잡고 있는다.
남방불교의 승려들은 도(道)의 과정에서 발전을 이룬 사람들이 갖게 되는 다섯 가지 영능에 대해 말하고 있다.
(1) 허공과 고체를 통과하고 살아있는 상태로 천계를 방문할 수 있는 능력.
- 이것은 바로 아스트랄체를 자유로이 다룰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천계는 멘탈계가 아니라 아스트랄계의 고급계를 의미하는 것이 거의 틀림 없다.
(2) 신적인 밝은 청각.
- 이것은 분명 단순한 아스트랄 투청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3) 타인의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그것과 동조할 수 있는 능력.
- 이것은 상념 읽기 또는 텔레파시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4) 전생을 기억하는 능력.
(5) 신적인 투명한 시각.
- 투시를 의미한다.
때로는 여기에 지혜에 의한 구원의 성취가 덧붙여지기도 한다. 이는 물론 윤회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다른 능력들과는 동일한 성질의 것이 아니기에 이런 범주에 속할 수 없다.
아난다는 부처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았던 제자로 알려지고 있다. 이것은 요한이 그리스도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은 제자로 여겨지는 것과 꼭 같은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두 경우에 보여지는 특별한 친밀성은 전생에 맺었던 관계의 결과이다.
아난다가 특별히 사랑받은 것은 분명 그가 가장 많은 진보를 이룬 제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부처가 열반에 든 이후, 첫 번째 대회의(제1차 결집)가 암석으로 밀폐된 동굴에서 열렸다. 거기에 참석할 수 있는 조건은 그 바위를 통과해서 동굴 속으로 들어올 수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아난다는 그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아직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떠나간 스승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잃은 슬픔이 너무도 컸던 그는 엄청난 노력을 하였고 마침내 영능을 계발하여 바위를 성공적으로 통과함으로써 조금 늦기는 했지만 동료 제자들 사이에 끼일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모든 인류 중에서 가장 높이 진화한 존재들도 여전히 그들만의 특별한 우정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이 부당한 행위는 아니다. 당신이 지금 가장 가깝고 친밀한 사람에게 느끼고 있는만큼의 애정을 미래의 어느 때엔가, 세계 전체에 대해서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 가면 당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는 천 배나 더 깊은 사랑을 느낄 것이다. 당신의 사랑은 결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할 수 없다. 비록 모든 사람이 당신의 사랑의 범위 속에 포함되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우리의 스승을 향해 느끼는 감정을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느끼기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스승이 로고스가 될 때 우리는 그의 시스템의 일부가 될 것이고 심지어 훨씬 후에 우리 자신이 로고스가 되었을 때조차 우리는 역시 그의 일부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면 그 스승 또한 더 위대한 시스템을 표현할 것이기에 말이다.
우리의 사랑이 비록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열렬할 수는 없다 해도 사랑의 강도가 덜한 사람에게 우리가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미움, 증오 따위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기에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할 것이다. 의사가 그의 환자가 자기 친구이든 아니든 똑같이 돌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처와 동시대에 많은 다른 영적 스승들이 세상에 나왔다. 예를 들어서 노자, 공자, 피타고라스 등이 각기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세계의 여러 곳에 스승들이 출현하여 영적인 힘을 엄청나게 쏟아 붓던 축복받은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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