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학 대의 25. 호기심 * 너 자신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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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학 대의 25. 호기심 * 너 자신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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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단 이웃추가 | 2011.12.15.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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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

 

 

당신은 당신 자신의 일에 확고히 중심을 잡고 있어야만 한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험담하거나 그들의 사사로운 문제들을 캐고 다닐 시간이 없다. 만일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일에만 신경쓴다면 세상 만사가 훨씬 더 잘 되어 나갈 것이다. 타인의 일에 일일이 신경쓰는 행위는 매우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일종의 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대개의 경우 타인을 도와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려고 그러는 것일 뿐이다. 그 일은 자기와 별 상관도 없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질병의 징후이다. 또 다른 징후는 그가 발칙하게 얻어낸 그 정보를 혼자만 간직해 두지 못 하고 자기만큼이나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퍼트리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것은 명백히 사악한 짓이다.

 

가십(gossip)은 세상에서 가장 악한 행위 중 하나이다. 그러한 가십 중 백에 아흔 아홉은 지어낸 것들이다. 그러기에 더욱 큰 해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타인의 평판에 가해지는 손상일 뿐만 아니라 자체로 악의 일부분이다. 가십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전염시키는 자들은 영구적으로 어떤 나쁜 성질의 상념체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치 쉴새없이 흐르는 물처럼 그것들을 그 희생자에게 쏟아 붓는 것이다.

 

만일 그의 본성안에 그들의 해로운 노력에 반응하는 요소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자연스럽게 그의 내면에서 그들이 택한 나쁜 성질들이 깨어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만에 하나 그들의 악의에 찬 지껄임에 일부 사실이 들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상념체는 그 악을 더욱 강화시켜 주게 된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 형제를 악으로 이끄는 무서운 카르마를 쌓고 있는 것이다.

 

신지학도들은 특별히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멤버들 중 많은 수가 영능을 계발하는 노력을 하고 있는데, 만일 그들이 영능을 타인의 일을 캐거나 나쁜 상념을 보내는 목적에 사용한다면 그 카르마는 가장 무서운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알고 있지 않은 일은 결코 말하지 말라. 심지어 알고 있다해도 선한 결과가 생긴다는 절대적인 확신이 없다면 그것을 말하지 말라.

 

말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 물어 보라. ‘그것은 사실인가?, 선한 말인가? 유용한 것인가?’ 이 세 가지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할 수 없다면 침묵한 채로 그냥 있는 것이 당신의 의무이다. 이 규칙을 절대적으로 따른다면 세상의 대화중 약 90%가 감소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말할 수 없이 큰 이익을 가져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는 훨씬 더 빠르게 진화하게 될 것이다.

 

만물의 근원적인 일체성을 이해할 때 우리가 형제들의 슬픔을 외면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런 형제애가 없다면 우리는 타인을 도울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물질적인 도움이 불가능한 경우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는 항상 사랑과 연민과 자비의 마음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분명한 우리의 의무이다. 신지학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무자비하기란 불가능하다. 거칠고 형편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신지학을 공부하더라도 성공하지 못 할 것이다.

 

인내하지 못하는 자들은 이해의 덕성을 갖지 못한다.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의 관점을 갖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름길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타인에게도 반드시 최상일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길을 택하여 진화할 절대적 권리가 있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고통과 불편을 초래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타인을 올바르게 만드는 것은 결코 우리의 일이 아니다. 오로지 타인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옳게 행동하고 있는가만을 유의하라. 우리가 누군가를 우리의 길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하기 전에 신중히 그의 현재 길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그가 지금 걷고 있는 그 길이 그에게는 더 나은 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온 힘을 다해 타인을 도와줄 준비를 해야한다. 그러나 결코 간섭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 고대 그리이스의 이 격언은 매우 훌륭한 조언이다. 구도자가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은 진보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자기분석이 병적인 내관(內觀)으로 빠지도록 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퇴보하지 않나 항상 염려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진화의 메커니즘을 보다 잘 이해한다면 전체 흐름이 꾸준히 앞으로 나가고 있고 어느 누구도 뒤로 미끄러질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급류가 경사진 곳을 내려올 때 수많은 작은 물보라들이 바위 뒤에 생성된다. 그리고 그 순간 물이 소용돌이치며 일부는 역류한다. 그러나 물보라, 소용돌이 등 물결 전체는 급류의 흐름 속에 휩쓸려 앞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흐름에 역행해 물러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실제로는 급류를 따라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와 같이, 심지어 자신의 진화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될대로 되라 하는 사람들도 서서히 그리고 부단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항할 수 없는 로고스의 힘이 끊임없이 그들을 상향(上向)으로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도 천천히 움직이고 있기에 한 단계 올라서는 데만도 수백만년 동안의 윤회와 고통과 무익함이 따른다.

 

진화의 메커니즘은 단순하면서도 정묘하다. 인간 안에 있는 모든 나쁜 속성들은 각 계(界)의 저급 질료의 진동들이다. 예를 들어 아스트랄체에서 이기성, 화, 증오, 질투, 정욕, 기타 이런 류의 모든 성질들은 항상 네 저급 아스트랄 질료의 진동에 의해 표현되고, 사랑, 자비, 헌신과 같은 부류의 감정들은 세 고급 부분계 질료에 의해 표현된다. 이로부터 두 개의 중요한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첫째로 아스트랄체의 각 부분계 질료는 상응하는 멘탈체의 부분계 질료와 특별한 관련을 갖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아스트랄체의 네 저급 부분계 질료는 멘탈체의 네 저급 질료와 대응하고 세 고급 부분계는 코잘체와 상응하는 것이다. 따라서 코잘체 내에는 오로지 고급한 성질들만이 형성됨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자신 안에 발전시킨 선한 특성은 코잘체의 변화로 영구히 기록된다. 그가 느끼고 생각하고 행한 악은 결코 진아(眞我)를 건드릴 수 없다. 단지 멘탈체에 혼란과 장애를 야기할 뿐이다. 그 악의 결과는 멘탈 영구원자와 아스트랄 영구원자에 저장된다. 따라서 그는 화신(化身)할 때마다 거듭 되풀이하여 그것과 맞서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악이 자아 속에 들어와 그 일부분이 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인 것이다.

 

둘째로 선을 향한 일정한 양의 힘이 악을 향한 그것보다 상대적으로 큰 효과를 만들어 낸다. 만일 한 사람이 일정한 양의 에너지를 어떤 나쁜 성질에 사용할 경우, 그것은 저급하고 무거운 아스트랄 질료를 통해 표현된다. 저급 아스트랄 질료는 물질계의 질료에 비해 매우 섬세하다. 그러나 아스트랄계의 고급 질료에 비하면, 그것은 물질계의 가장 섬세한 에텔과 농밀한 납의 관계와 같다. 따라서 만일 그가 정확히 동일한 양의 힘을 선한 방향으로 발휘한다면 그것은 고급 부분계의 훨씬 더 섬세한 질료를 통해 움직이게 되고 적어도 100배의 효과를 만들어 낼 것이다.

 

만일 최저급의 것과 최고급의 것, 두 개를 놓고 비교하면 100배보다 훨씬 큰 효과가 생긴다. 여기에 더하여 로고스 자신이 그의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힘으로 끊임없이 전 체계를 상향으로 압박해 가고 있다. 이것은 아무리 싸이클의 전진이 더디게 보인다 할지라도 분명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 효과로 선과 악의 양이 정확히 같은 사람이 환생할 경우, 그는 원 위치가 아니라 동일한 상대적 위치로 돌아와 약간이라도 전진하게 된다. 사실상 그는 자기 힘으로 노력한 것보다도 더 진보된 위치에 있게 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어떤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 있어서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길 원한다면 그는 악을 위해 확고히, 열심히 일해야만 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는 뒤로 미끄러질까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악마가 신보다 훨씬 더 힘이 강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움직인다고 믿었던 시대의 유물로 남아 있는 미망의 하나이다. 실상은 정확히 그 반대이다.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은 만일 누군가 그것을 이해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그를 도울 수 있게끔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작은 정원을 돌보는 어린이가 때때로 식물을 뽑아 뿌리가 얼마나 자라고 있나 보려고 하는 것과 꼭 같은 행위를 한다. 물론 결과적으로 전혀 자라지 못한다. 우리는 자신과 자신의 목적만을 생각지 말고 타인을 위해 힘껏 일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진화는 스스로가 돌보고 있다는 신뢰를 가져야만 한다. 과학자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면 할 수록 그 대상에 쏟아 붓는 헌신은 작아질 것이다. 자기 분석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큰 실수이다. 그것은 마치 온 시간을 기계에 기름칠하고 서투르게 만지작거리며 낭비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능력을 활용해야 한다. 그러면 그 동안 다른 능력도 발전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진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예를 들어 당신이 만일 어떤 언어를 배우고 있다면 그것을 전적으로 책을 통해서만 배우려고 애쓰는 것은 잘못이다. 당신은 그 언어로 자꾸 말해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거기에 빠져들고 실수도 해야 한다. 그런 노력을 통해 당신은 마침내 유창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시간이 흘러가면 우리에게 이른바 ‘포기’가 자연스럽게 다가올 것이다. 어떤 사람이 처음으로 고급한 삶을 살려고 노력할 때 그는 일상적인 많은 즐거움들을 포기한다. 비록 그것들이 아직도 그를 강하게 끌고 있다해도. 그러나 머지 않아 그러한 끌림도 자연히 없어질 뿐만 아니라 저급한 향락에 빠질 시간조차 없게 된다.

 

 

무엇보다도 당신은 염려하지 않기를 배워라. 기뻐하라. 그리고 모든 일에 낙관적이 되어라.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타인을 도와주려고 노력하라. 만족은 결코 열망과 공존하지 않는다. 낙관은 선(善)의 궁극적 승리에 대한 확신에 의해 생겨난다. 만일 우리가 이 물질계만을 고려한다면 그러한 마음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물질계에서의 사람들의 태도는 습관적으로 의식을 어떤 차원에 두는가에 달려 있다. 만일 의식이 주로 지상에 초점 맞추어져 있다면 그는 거의 비참함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의식을 보다 고급한 차원에 초점 맞추는 것이 가능하게 될 때 기쁨은 항상 그 뒤에서 빛날 것이다.

 

나는 부처가 인생은 고(苦)라고 말한 것을 알고 있다. 이 말은 현상계에 관한 한 거의 완전한 진리이다. 그러나 그리이스인과 이집트인들은 철학적 관점에서 이 저급한 인생으로부터도 많은 기쁨을 끌어내려고 노력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거기서 어떤 것도 상실치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행복은 물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자비와 사랑이 커갈수록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감정과 상념의 흐름을 수용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것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고요히 기쁘게 남아 있을 수 있다. 마치 대양이 수많은 강물들을 받아들이면서도 항상 고요히 있는 것처럼. 구도자의 내적인 삶은 항상 고요해야 한다. 외부의 감정은 끊임없이 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깥에서 오는 온갖 요인들에 의해 영향받기 때문이다. 당신은 하찮은 이유로 낙심한다.

 

육체는 그러한 심적 침체의 빈번한 근원지이다. 약간의 소화불량, 순환장애 또는 과로 따위가 그것이다. 이보다 훨씬 더 상습적인 우울증은 아스트랄 엔터티(존재)로 인해 일어난다. 우울한 상태에 있는 아스트랄계의 엔터티가 당신 주위를 배회하면서 공감 요소를 찾거나 당신으로부터 자신의 부족한 생명력을 끌어오려고 한다. 우울함을 완전히 무시해버리도록 하라. 사실상 그것은 이웃에 대한 하나의 범죄와도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울함을 떨쳐버려야만 한다.

 

그 구름들을 떨쳐버리는데 성공하든 아니든 우리는 반드시 그것이 마치 거기 없는 것처럼 계속 나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당신의 마음은 당신의 것이다. 따라서 그 마음 속으로 당신이 선택한 상념이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당신의 아스트랄체 또한 당신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 안으로 고급 자아에 유익한 것들을 제외한 어떤 다른 감정이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우울함의 바이브레이션을 지배해야 한다. 절대적으로 그것들한테 피난처를 제공하기를 거절해야 한다. 그것들이 당신을 침범하게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만일 어는 정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당신 주위에 따라 붙으면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다른 사람한테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것이 당신의 의무이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이 순간적으로 놀라운 영감과 의식의 고양감, 열렬한 헌신과 기쁨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것이 바로 고급 자아가 저급 자아에 영향을 미치는데 성공한 순간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느꼈던 그 모든 것은 항상 거기 있으며 언젠가 느꼈던 것처럼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이것을 이성과 믿음으로 인식하라.

 

많은 사람들은 이 진실을 추상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신의 결점과 계속되는 실패 때문에 그 행복감을 영원히 느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의 이런 태도는 사실 기도문 속에 많이 채용되었다.

 

“우리 비참한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는 해서는 안 될 일은 계속 하고 정작 해야 할 일은 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모두 죄인들이다. 그러나 비참한 죄인이 됨으로써 그 죄를 더 무겁게 할 필요는 없다. 비참함 속에 빠진 사람은 공공 위반 사범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이웃들에게 비참과 슬픔을 전염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도 그렇게 할 권리는 없다. 그러나 우울한 감정에 빠져 있다 해도 어떻게든 이성적으로 슬픈 감정을 떨쳐버리고자 굳게 결심하여 노력하는 사람은 타인을 해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스스로 비참한 벌레로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생각하는대로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런 모든 말은 대개 위선이다. 교회에서 스스로를 벌레만도 못 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일상 생활에서 누군가 그를 그렇게 부르면 큰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그것이 위선이든 아니든 확실히 넌센스이다. 상념의 영향을 이해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듯이, 자신을 진실로 벌레만도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스스로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상실한 것이다.

 

반면 자신이 신성한 생명의 불꽃임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항상 기쁘고 희망에 차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성은 본질적으로 항상 기쁜 것이기 때문이다. 회개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큰 실수이다. 과거는 과거이며 어떤 후회도 그것을 돌이킬 수 없다. 우리 마스터 중의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듯이 말이다.

 

“가치 있는 유일한 회개는 결심을 통해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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