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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학 대의 30. 자연 * 아이들 * 죽음에 대한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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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의 교감
당신은 결코 자연의 법칙을 위반하지 말라. 최근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극단적으로 어긋나가고 있고 물질주의가 만연되고 있다. 오늘날 자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많은 과학자들은 그들보다 훨씬 무식했던 선조들보다 자연과 교감하는 능력이 훨씬 부족하다. 유용성, 실용성을 추구하는 외부적인 것에 대한 탐구로 인해 우리는 내부적인 많은 것을 잊어버렸다. 그러나 인간은 이 오해의 중간 단계를 거쳐 다시 자연과의 교감 속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자연과 깊은 유대감을 갖고 있던 옛날 사람들은 자연을 대상으로 세부적인 실험을 거의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불경스러운 행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불손하게도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상실하여, 자연을 대상으로 무자비하게 파고들고 있다. 우리는 이 과도기에 얻은 정밀한 성질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하면서도 자연과의 교감 정신 또한 회복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이 교감을 통해서, 과학만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엄청난 것들을 찾아낼 수 있다. 어린이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들로 하여금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학자적인 태도조차 버려야 할 때도 있다. 보통, 아이들은 성인들을 딴 나라에서 온 이상하고 제멋대로 하는 존재로 여긴다. 이 모든 것은 자연에 대한 우리의 탐구와 관련지을 때도 꼭 마찬가지이다.
자연령들은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그들을 지나치게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생명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면 그들도 인간의 생명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꽃이나 기타 다른 식물들은 맹목적으로 환희와 우정을 느낀다.
에머슨은 그가 집에 돌아오면 정원에 있던 나무와 다른 식물들이 다시 그를 만나고 느낄 수 있어 기뻐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정말 사실이다. 나무와 동물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인도에서 사람들이 나무를 심을 때면 ‘행운의 손’에 대해 얘기한다. 이것은 나무들이 어떤 사람한테서는 잘 자라지만 다른 사람한테서는 자라지 못 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는 반드시 로고스의 목적과 교감하여야 한다. 만일 우리가 실제로 모든 것의 성장을 돕고 있다면 우리는 그의 의지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로고스의 의지가 자연에 삼투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은 단번에 그것을 느낀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진화에 역행하면 자연은 마치 민감한 어린이처럼 움츠려 우리를 피하게 된다.
아이들에 대한 우리의 자세
아이들에 대한 당신의 자세는 어떠한가? 기억하라. 아이들은 신성한 생명의 불꽃인 자아(自我)들이다. 그들은 단지 당신에게 맡겨진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들 위에 군림하거나 그들을 학대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그들이 신성한 생명을 표현할 수 있도록 사랑하고 도와야 한다. 사랑의 분류(奔流), 이 얼마나 감동적인가? 언어를 초월한 인내와 자비심! 이렇게 그들을 위할 때 느끼는 신뢰의 영예는 얼마나 깊은 것인가!
항상 기억하라, 당신은 그들보다 어른이고 그들은 나이 어린 아이들이 아님을. 혼으로서는 모두가 똑같은 나이이다. 따라서 당신은 그들에게 이기적이고 잔인한 독재자여서는 안 되며 항상 도움을 주는 친구여야 한다. 어린이를 만날 때 당신은 새 옷을 입은 한 영혼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들에게 완벽한 친절을 베풀어야 하며 그들 안에 있는 최상의 것을 끌어내도록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새 옷에 적응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진정한 선(善)은 모든 것에 대한 선을 의미하는 것임을 항상 기억하라. 따라서 선은 타인에 대한 노고의 대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여 얻어진 것은 진정한 선이 될 수 없다.
죽음에 대한 공포
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죽음의 공포는 엄연한 실재로 존재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다. 특히나 그들은 사후에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공포 때문에 더욱 고통받고 있다. 자연히 이것은 지옥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는 두드러진 현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카르마의 법칙과 사후의 상태라는 것이 단지 현생의 연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소위 인생이라는 것이 단지 보다 더 위대한 진정한 삶의 하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진화란 절대적으로 확실한 사실임을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은 진화의 힘에 역행하여 넘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진화의 힘은 그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밀어붙일 것이다. 그 힘에 저항한다면 그에게는 상처와 고통만이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 때 우리에게서 공포가 일시에 사라져 버린다. 죽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해도 그것은 사실상 일시적인 부재(不在)에 불과한 것이다. 고급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이 계발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이 사자(死者)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다. 비록 우리 육체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우리는 때로 그들을 잃었다고 착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우리를 잃었다는 미혹에 빠지는 일이 없음을 잊어선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우리의 아스트랄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수면 중에 육체를 떠난 순간 우리는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고 물질계에 있던 때와 꼭 마찬가지로 그들과 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영혼의 구원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와는 반대로, 어느 신지학 저자가 말했듯이 언젠가 우리의 영혼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구원될 영혼같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바로 영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 자신의 실수나 무지 이외에는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원될 일이란 없다. 몸은 옷가지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것이 닳으면 우리는 그것을 던져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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