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학 대의 7. 진화의 길 1

http://m.blog.naver.com/eyeinhand/10125572470#

신지학 대의 7. 진화의 길 1

0

관단 이웃추가 | 2011.11.30. 18:17

 앱으로 보기 

본문 기타 기능

 

 

진화의 길

 

 

우리가, 모든 진화는 신성으로부터 나왔고 인간은 단지 신성한 불의 불꽃으로서 언젠가 다시 신성의 불과 합일될 것이라는 위대한 진리를 말하면 사람들은 종종 이런 두 가지 묘한 질문을 한다.

 

첫째로 “우리가 결국 신의 일부분이고 태초의 신성을 갖고 있다면 왜 신은 우리를 발출시켰는가? 태초에 완벽하고 영화로우며 전지하다는 로고스는 도대체 왜 물질 속에 현현하였는가?”

 

둘째로 “만일 우리가 신성한 영으로부터 나왔다면 어째서 우리는 비참함 속에 던져졌는가? 그리고 지극히 순수한 근원으로부터 나왔다는 인간이 어떻게 이리도 타락할 수 있는가?”

 

이와같이 빈번히 제기되는 의문에 대해 고찰해 보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 될 것이다. 로고스 자신이 스스로 현현한 이유는 우리가 미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문제이다. 우리는 그가 그렇게 하기를 선택했다는 것과 그의 계획의 일부분인 우리 그의 계획이 무엇인지 애써 이해하고 그것에 자신을 맞추어 나가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신비에 대해 깊이 사색하기를 원하는 자에게 있어서 다음의 그노시스(영지주의, 靈知主義) 스승들의 가르침이 무엇보다 도움이 될 것이다.

 

“신은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은 그것을 받고 되돌릴 자가 없다면 완벽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은 그의 일부를 물질 속으로 내려보내 그의 영광을 한정시켰다. 자연스럽고 느린 진화의 과정을 통해 우리가 탄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는 그의 의지에 따라 신의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 발전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신의 사랑 또한 더욱 완벽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이 신의 자식들인 우리에게 베풀어지고 우리는 또한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되돌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의 위대한 계획은 성취되고 그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

 

신으로부터의 발출이 왜 하필 이런 특별한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은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로지 진화의 이유가 아닌 진화의 사실에만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신성의 본질로부터 발출되었다는 것은 진정한 사실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이 본질은 그것이 발출될 때 미분화(未分化) 상태,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무의식적이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 그것은 내부에 소위 말하는 의식의 잠재성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차원을 거치며 물질계로 내려오면서 신은 각 차원을 통과할 때마다 그곳의 질료로 자기를 감쌌고 마침내 진화의 가장 낮은 지점인 광물계에 들어왔으며 거기서 다시 유턴하여 자신이 애초에 출발한 차원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즉, 그때부터 이른바 진짜 ‘의식’을 발전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이 최초로 물질계에서 의식을 발전시키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발전과정을 충분히 밟은 이후에만 아스트랄계와 멘탈계에서 차례로 의식을 갖게 된다.

 

분명 신은 의지로 인간을 온전히 만들었고 법칙에 순종하게 하였다. 그렇다면 인간은 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단순한 로보트에 지나지 않은가? 그러나 로고스가 그의 본질로부터 태어나기를 바라는 인간상은 로고스 자신과 같은 권세와 영광을 가진 자, 절대적인 자유의지를 가지면서도 마땅히 그른 것이 아닌 옳은 것을 선택하는 자, 완벽한 힘에 더하여 완벽한 지혜와 사랑을 가진 그러한 자이다.

 

이러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용하여 실수의 가능성을 남겨두는 방안 말고 어떤 다른 길을 생각해낼 수 없다. 실수를 통해 인간은 경험을 쌓고 배울 수 있다. 비록 그 과정에서 해악, 슬픔, 고난이 불가피하다 할지라도 그러한 부분이 진화의 한 요소로서 작용함을 이해할 때 우리는 ‘악은 단지 선의 어두운 그림자일 뿐이다’라는 중국의 속담이 진리임을 알게 될 것이다.

 

진실로 땅 밑에서 보기에 하늘이 아무리 먹구름으로 덮혀 있다 해도 그 구름들은 본질적으로 일시적인 것이며 그 너머에는 그것들을 다 흩어놓을 태양이 있어 항상 힘있게 빛나고 있다. 적어도 진정한 진화를 이룬 모든 자들은 절대적으로 이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비록 경험을 못 한 자들에게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들만큼은 명백한 증거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증거는 아직 빛을 향해 투쟁해 나가고 있는 혼들을 위해 큰 도움을 주게 된다.

 

두 번째 질문의 경우 그것은 지나친 억측이다. 우리가 비참함 속에 던져졌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실 엄격히 말해서 우리는 결코 내던져진 것이 아니다. 사실은 이렇다. 로고스는 그의 일부분 또는 그의 옷의 일부분이라 할 수 있는 힘의 파동을 분류(奔流)시켰다. 이 힘의 흐름은 잠재적으로 수많은 모나드 군(群)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각각의 모나드가 완전히 발전되었을 때 자체로 하나의 로고스가 된다.

 

그러나 그러한 발전을 위해 모나드는 다양한 단계의 질료를 통해 자기를 현현할 필요가 있으며 그 개체화는 어떤 잠재된 특성이 나타나기까지 매우 천천히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진화의 과정이며 모든 우주의 대법칙들은 바로 그 과정을 촉진시키도록 이루어져 있다. 초기 단계에서 모나드의 현현은 완전히 우주법칙들에 의해 콘트롤 되며 아직은 어떤 개체성, 즉 그 자신의 혼을 발전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언젠가 개체성을 이루어내는 단계에 도달하게 되고 그때부터 의지가 발전하기 시작한다.

 

로고스의 계획은 인간에게 이 깨어나는 의지를 사용하는데 일정한 정도(처음에는 아주 작은 양)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다. 이 원시적(原始的) 개체는 진화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합당한 만큼의 자유의지를 사용한다. 이 개체에게는 앞선 진화단계에 속한 선생들이 있어서 언제나 길을 일러주고 있지만 종종 그 의지를 잘못 사용한다. 그가 의지를 그르게 사용할 때(쉽게 말해서 진화의 흐름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의지를 사용할 때) 자연법칙의 메커니즘은 행위의 대가로 고통을 가져다준다.

 

이러한 일이 거듭 반복됨으로서 원시적 자아는 마침내 경험을 통해 자연의 현명한 가르침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그 결정이 자신의 일부가 되는 순간 그에게는 더 광범위한 자유가 열리게 된다. 자기 앞에 열린 이 새로운 자유의 세계에서 그는 또한 분명히 옳게도 그르게도 행동할 것이며 동일한 과정의 반복으로 항상 잘못한만큼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비참함이나 타락은 언제나 인간의 잘못된 자유의지의 행사에 대한 결과로 생긴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올바로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공부가 끝나는 순간 모든 악한 결과 또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세상에 어떠한 악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들의 행위의 결과이며 또한 본질상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악이 아무리 무시무시하고 뿌리깊게 보인다 할지라도 결코 영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원인이 제거될 때 결과 또한 사라지는 것이 사물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이 존재한다고 신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신의 계획을 잘못 수행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비난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주 사람들에게 저급한 길이 아닌 고급한 길을 따르도록 권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가장 고급한 길을 따르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같다. 많은 경우에 어려운 점은 고급한 가르침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모호하며 비실제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실제로는 그 가르침을 믿는체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은 정말로 믿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행동해야 할 때가 오면 그것이 매우 모호해지게 된다. 그 때 그들은 자기가 인생을 그 가르침에 따라 살지 못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자기를 스스로 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도 지위나 부를 탐하는 자들을 볼 수 있다. 만일 그들이 물질주의자이거나 고상한 것을 믿는 자들이 아니라면 그러한 태도는 매우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인 사람이 세속적인 것을 추구하는 데 열심이라면 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며 비논리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상 그는 정말로 자기의 종교를 믿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그가 종교를 믿는다면 그는 결코 다른 것들을 좇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돈과 권력의 가치를 믿고 있고 자기가 진실로 확신하는 것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돈과 권력을 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며 이것들이 자기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기의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돈과 권력을 획득하는 데 쓰고 있고, 최소한 그렇게 하는 데 의지와 인내심을 계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고급한 것들에 대한 가치를 일깨워 줄 수 있다면 그는 당장에 의지와 인내심을 그것들의 계발로 돌릴 것이며 허상을 쫓는 데 열성적이던만큼 진리를 추구하는 데도 열성적일 것이다. 그 때 신지학에 대한 공부는 그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신지학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특별한 목적 때문에 이곳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고자 전심으로 헌신하는 것이 자기의 진정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해야 할 가치가 있는 일, 추구할 가치가 있는 목표가 있음을 진정 깨닫고 있으며 과거 돈과 지위를 좇던 열정으로 그 목표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는 단순히 모호한 관심을 갖거나 몇권의 책을 읽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는 반드시 진정으로 그것을 믿어야 하며 그것의 진실성을 절대적으로 확신해야 한다. 절대적 확신을 갖는 유일한 길은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스스로가 직접 실천하는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이 신지학의 가르침에 대한 진실성을 지성적으로 확신하거나 논리적인 정확성을 느낄지 모르지만 그에 따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들 대부분에게 있어서는 최소한 가르침의 일부분만이라도 명확히 실천하는 것이 진정 필요하다.

 

선배 학인로서 우리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오늘날의 후학들만큼이나 절실히 느꼈다. 25년인가 27년 전 당시 우리가 블라바츠키 여사에게 이 가르침들의 진실성을 어떤 식으로든 확인해 볼 도리는 없는지 물었다. 그때 그녀는 즉각 단호하게 대답했다. ‘만일 당신들이 기꺼이 어려움을 무릎쓰고 필요한 영능을 계발한다면 분명히 가르침의 진실성을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우리에게 그 길은 멀고도 험하며 도달하는 데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아무도 미리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누구나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으며 그것을 향해 출발한 사람이 성취하지 못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고 (비록 많은 경우에 그것은 이생에서가 아니라 미래의 어떤 생에서이겠지만) 말해 우리를 위로해 주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고무적인 말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소 실망스러운 말이기도 했다.

 

아무튼 우리들은 그녀의 말을 받아들였고 가르침에 따라 전심으로 살며 우리 앞에 놓인 일을 완수하려고 노력했다. 우리의 성취 정도는 각자 다양했다. 그러나 그렇게 인내심을 갖고 노력한 자들 중에서 어떤 결과도 보지 못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우리는 우리가 배웠던 모든 것들이 진실이었음을 충분히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이룬 발전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면 그것은 분명 스승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이었다.

 

우리들은 마스터들이 말한 많은 것들을 직접 확인했다. 우선 작게는 우리 자신, 우리 육체와 아스트랄체들, 우리 가능성들에 대해, 그리고 우리를 가까이 둘러싸고 있는 아스트랄계에 대해서. 그리고 나서 우리는 꾸준한 노력을 통해 멘탈체의 능력을 발전시켰고 처음으로 책에 쓰인 천계(天界)(*주15)의 삶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불가피한 일이지만 처음에 우리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에 우리의 능력으로는 그것을 실제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된 노력이 더 계속되었고 마침내 우리는 코잘체의 능력을 성취하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비로소 비교적 진실한 세계가 우리 앞에 진정으로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나서 과거의 기록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그 기록들로부터 로고스의 위대한 계획이 진화의 법칙, 원인과 결과의 법칙의 인도 아래 계속적인 환생을 통해 어떻게 진행되고 작용하고 있는지 절대적인 확신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이 위대한 계획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를 그 계획 속에 동참시켜 지혜롭게 그것의 완성을 위해 함께 일해나가는 것이 우리의 의무요 특권이라는 사실도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위대한 진화와 인류의 미래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저급한 계들을 거쳐서 이제까지 진화해왔음이 분명했고 우리들보다 하위에 있는 단계와 상위에 있는 단계들을 많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다양한 인간 생명의 단계들은 마치 한 사다리의 계단들처럼 놓여 있었다. 그 계단들이, 우리가 있는 위치에서 위로 그리고 아래로 쭉 뻗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각 계단들 위에 있는 존재들은 모두 위를 향해 열심히 기어오르고 있었다. 우리가 볼 때 사다리의 정상에 서 있는 마스터들은 자신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며 우리와 같은 과정을 통과해 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모든 계단마다 사람들이 있고 또한 우리보다 앞선 자들의 전진을 직접 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와 마스터들 사이에는 연속성의 단절이란 없는 것이다.

 

고급계의 찬란한 빛에 눈이 익숙해졌을 때 우리는 마스터들보다도 훨씬 더 진화한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스터들의 위로 마누, 그리스도, 붓다, 리피카(*주16), 위대한 데바, 드얀 쵸한(*주17)이 있고 거기다 우리로서는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외에는 전혀 알 수 없는 그런 초월적인 위대한 존재들이 있었다. 그러나 심지어 이 까마득히 위대한 존재들조차 이처럼 연속된 사슬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과거 전체가 우리들 앞에 놓여 있다. 우리는 길 위에 있는 휴식처들과 그 길로부터 갈라진 곁길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위대한 자들이 지금 서 있는 곳에 우리 또한 언젠가 설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우리의 확고한 미래의 운명을 보고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에 저항해봐도 전혀 소용이 없음을 인식하게 된다. 진화는 우리를 위해 설계된 법칙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전진해 나갈 때만 우리는 행복하고 안전한 것이다.

 

이 특별한 세계의 주기에 우리 앞에 놓인 진화 단계를 볼 때 우리들 대부분은 결코 아직 안전하다거나 구원받았다고 말할 위치에 있지 못하다. 우리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하는 것은 오로지 제 1비전(秘傳)을 통과하여 대백색형제단의 일원이 됨으로써 ‘흐름에 들어선 자‘ 즉, 소타파티(Sotapatti) 또는 스로타판나(Srotapanna)가 되었을 때 뿐이다. 이 단계에 올라섰다는 것은 인간 진화과정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결과, 가장 중요한 지점을 통과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o:p></o:p>

인간의 진화 과정에는 특히 중요한 세 가지 포인트가 있다. 첫째는 인간으로의 진입, 즉 개체성(*주18)의 획득, 코잘체의 획득, 완전히 분리된 자아의 획득을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개체성에 도달하는 것이 바로 동물들의 진화 목표이다. 거기에는 로고스의 힘이 분류(奔流)될 수 있는 강한 개체 센타를 만든다는 매우 뚜렷한 목적이 있다. 이 센타가 최초로 형성되어질 때 비로소 아직 약하고 불확실하기는 해도 아기 자아(自我)가 되는 것이다. 아기 자아가 보다 강하고 분명해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생을 거치며 강한 자기 중심성의 장벽으로 보호되어야 한다.

 

이 자기 중심성을 우리는 건축상의 발판 골조라고 볼 수 있다. 골조는 건물을 짓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일단 건물이 완성되면 철거되야 한다. 추한 골조가 건물이 완공된 뒤에도 계속 남아 있으면 그 건물을 이용할 수 없게 된다. 개체 센타를 만든 목적은 그것을 통해 로고스의 힘이 세계에 방사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자기 중심성(이기성)이 버티고 있으면 그러한 방사는 전혀 불가능하게 된다. 비록 자기 중심성이 없으면 강한 개체 센타 또한 만들어지지 않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가장 불쾌한 특성이 진화의 과정에 자리잡고 앉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에게 있어서 그것의 역할은 끝이 났다. 우리는 그것을 제거해야만 한다. 그러나 필요악인 이기성이 아직도 버티고 있다 해서 화를 낸다는 것은 전혀 쓸모없는 짓이다. 사실상 이기적인 인간은 가엾게도 원시적 야만성이 살아있는 시대에 뒤진 인간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원시적 인간이 이기성을 제거하고 앞서가는 진화의 흐름을 쫓아갈 수 있는가?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자연적인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것들은 모두 하나이다. 필요한 것은 만물의 일체성을 깨닫는 것이다. 자아를 확장시켜감에 따라 인간은 이러한 일체성을 인식해간다. 그는 자기만을 개체로 생각하는 대신 자기가 부양하는 가족을 단위 개체로 여기기 시작하며 그 범위 안에서 차츰 비이기적이 되어간다.

 

최근 인간은 이러한 생각을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까지 확장 포함시키고 있으며 그 범주 안에서 비이기적이 되는 것을 배우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외부 사회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이기적이며 심지어 약탈적이기까지 하다. 이어 인간은 최소한 일정한 측면에서는 자기가 속한 국가에까지 그러한 생각을 확장시키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 그러한 변화단계의 과정에 있다.

 

사람들은 대개 작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다른 공동체와의 이해관계로 대립하여 싸우고 있다. 그러나 보다 큰 문제들에 대해서는 자신의 이해(利害)가 다른 공동체의 이해와 동일하다는 점을 인식, 그에 대해서는 소위 말하는 애국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다른 언어권, 다른 기후권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이기적이다. 미래의 언젠가 사람들은 자아의 관념을 확장시켜 인류 전체를 포함시킬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인간이 이기성을 겨우 벗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인간은 보다 넓은 견해를 배우는 한편, 자신과 관련된 중요한 것을 배운다. 첫째로 그는 자기가 육체가 아님을 깨닫게 되고, 이어 자기가 감정이 아님을 깨닫게 되며 더 나아가 자기가 마음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점차 자기가 자아(自我), 즉 혼이라는 깨달음으로 이끌며 결국 피상적으로 분리된 혼이 실제로는 하나의 초월적인 통일체라는 깨달음에까지 이르게 된다.

 

******************************************************************************

 

역주

 

주15) 천계(天界)

 

티벳어로는 데바찬(Devachan), 산스크리트어로는 수카바티(sukhavati)라 한다. ‘지복의 장소’, ‘신의 땅’이라는 의미이다.하지만 그것은 특정 장소가 아니라 의식의 상태이다. 윤회의 과정에서 죽음과 환생 사이에 영혼이 들어가 지복 속에서 휴식을 취하는 곳(상태)이다.

 

주16) 리피카(Lipika)

 

산스크리트어로 리피카는 ‘기록자’라는 뜻이다. 오컬트적으로는 아스트랄 광(光)이라는 안보이는 우주의 타블레트에 모든 존재들의 생각, 말, 행동들을 새기는 카르마의 기록자들이라할 수 있다. 그들은 카르마 작용의 에이전트(agent)들이다.

 

주17) 드얀 초한(Dhyan Chohan)

 

'명상의 주님‘이라는 의미이다. 우주 영, 혹성 영을 말한다. 그들은 이전 세계기(word period, 만반타라)에서 의식이 완전히 개화한 영적 존재들 중의 일단으로 현 만반타라에서 혹성의 진화를 인도하고 있다.

 

주18) 개체성(Individuality)

 

신비학에서 말하는 개체성과 인성(Personality)은 각 단어가 갖는 일반적인 사전적 의미와는 달리, 특별하고 중요한 철학적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개체성과 인성은 각각 개성, 인격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성이나 인격이라는 단어는 세상적으로 너무 흔히 쓰이는 단어라서 의미 전달에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오컬트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개체성과 인성이 본 의미에 가장 가까운 표현이 아닌가 한다.

 

개체성은 인간 안에 있는 영적 지성적 부분이며 불멸하는 부분이다. 개체성은 적어도 우주의 만반타라 기간 동안 죽지 않는 인간의 뿌리, 에센스, 내면의 신이다. 이에 비해 인성은 인간의 저급한 부분으로, 개체성이 사용하는 마스크 또는 베일이다. 인성은 비록 개체성의 반영이긴 하지만 우리를 밑으로 끌어 당기는 물질적인 성향을 지닌다. 우리가 이 인성의 지배로부터 벗어났을 때 비로소 고급 자아의 속성이 현현하게 된다.

 

오컬티즘에서 개체성은 고급 마나스, 붓디, 아트마의 세 고급 원리로 구성된 트리아드(Triad)이다. 달리 말해 영적 인간, 모나드의 표현으로서 신성의 잠재성이 포함된 씨앗 영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인성은 4중의 저급 자아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쿼터너리(Quaternary)라 한다. 1)저급심(멘탈체) 2) 감정 또는 욕망(아스트랄체) 3) 프라나(생명 원리) 4) 에텔체

 

Previous
Next Pos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