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학 대의 19. 힌두교

http://m.blog.naver.com/eyeinhand/10126399146


신지학 대의 19. 힌두교

0

관단 이웃추가 | 2011.12.10. 16:35

 앱으로 보기 

본문 기타 기능

힌두교

 

 

무지한 선교사들은 인도에 3억 3천만의 신들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과장된 것이다. 사실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보다 훨씬 더 과학적인 종교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 힌두교는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우주에 한 분의 신만이 있다는 것을 완벽하게 통찰하고 있다. 그 유일신의 외부적 표현은 무수하다.

 

그러나 유일신으로부터의 수많은 나툼들을 신(God,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러한 것들에는 차라리 신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피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이라는 단어가 기독교의 그것과 관련하여 매우 불유쾌한 느낌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신이라는 단어가 사용될 때는 적어도 태양계의 로고스보다 낮은 존재에 적용되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기독교의 신이 갖는 모든 좋은 속성은 로고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주에는 로고스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그는 우주를 훨씬 넘어서 있는 존재이다. 우리가 절대자의 진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의 마음이 한정된 만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 또한 그렇게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처는 항상 대중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그대들은 저 먼 곳의 문제들로 고심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것에는 어떤 결론도 있을 수 없으며 그것으로부터 아무런 유용한 것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인도의 신상(神像)들은 대개 고도로 자기화(磁氣化)되어 있어서 축제 때 그것들이 길거리를 지나갈 때면 그 신상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많은 힌두 신전들 안에는 강하고 영구적인 힘의 영향이 작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오래 전에 마두라시를 방문했을 때 시바 신전에서 나온 하얀 재와 파르바티 신전에서 나온 밝은 진홍색 가루를 받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년 동안 그렇게 많이 옮겨진 후에도 그 강한 자기의 영향이 지속되고 있었다.

 

 

인도는 본래 의식(儀式)과 전례(典禮)가 많은 나라이다. 그것들은 모두 종교적인 것으로, 거의 대부분이 마누에 의해 정해진 것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들 중 많은 것이 마누 이후 시대에 덧붙여진 것이 틀립없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법칙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인종의 시작에 필요한 것이었을 뿐, 이제는 인종의 정립이 확고히 이루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더 이상 쓸모 없는 것이다.

 

그 의식이 치루어지는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대개의 경우 그것의 본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제 그 의식은 단순한 빈 껍데기에 불과하고 그것을 따른다 해도 아무런 효과도 없다. 그러한 것들은 어린 혼들에게나 가치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의식들 속에서 기쁨을 느끼고 그것들로부터 큰 이익을 얻는 사람들도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들 중에 항상 진정으로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리고 정말로 영적인 발전을 이룬 사람들이라면 그런 구속들은 모두 떨쳐내 버린다.

 

인도에서 본래 모든 가장(家長)들은 가정의 사제였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해 감에 따라 그 의식과 전례들 또한 복잡해졌고 이로 인해 전문적으로 교육받은 승려 계층이 생겨났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으로서는 불필요할 정도로 상세하고 방대한 그 형식을 도무지 기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치 의사한테 치료를 받는 심정으로 의식을 치루는 것 같다. 그것이 무언지도 모르면서 단지 그렇게 하면 자기들에게 유익할 거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그러나 개중에는 의식의 의미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전심으로 따를 수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대개 결국에 가서는 의식들을 모두 내던져 버리게 된다.

 

오늘날 승려들이 별다른 효과도 없는 케케묵은 의식들을 치루고 구태의 제문(祭文)을 이용하는 것을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 시대에는 어떤 의지도 없는 것 같다. 승려들은 주문을 암송한다. “옴, 부르, 부바르, 스와르” 그러나 그렇게 되풀이 외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예전에 그 주문을 외우던 의식 집행자(승려)들은 거기에 어떤 의지를 투사해 넣어 자신의 의식을 고양시켰다. 그러면 그가 영창해 나가는 동안 참석자들의 의식 또한 그의 주문 소리에 공명하여 한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고양되었다. 우리가 수천년 전 인도의 초기 생활들을 조사해 나가고 있을 때 이를 증명해주는 놀라운 의식 집행 장면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사람들이 모두 칠흙같이 캄캄한 내실(內室)에 들어가 섰다. 의식이 시작되자 집행자는 서서히 그리고 장엄하게 주문을 하나 하나 영창했다.

 

그러자 그의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 대부분에게 그에 상응하는 효과가 발생되었다. 옴(Om)의 영창은 그와 사람들 사이에 깊은 조화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나서 부르(Bhur)가 발성되자 내실이 부드러운 빛으로 가득 채워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잠시 간격을 둔 뒤, 부바르(Bhorar)의 발성과 함께 대중들의 아스트랄 시각이 일시적으로 열렸다. 그리고 스와르(Swar)는 대중들의 멘탈 시각을 열어 주었고 동시에 그들 주위에 고급계의 축복과 힘이 흘렀다. 그러한 상태는 다양한 운문(韻文)들의 영창이 계속 진행되는 동안 지속되었다.

 

물론 이러한 효과들은 단지 일시적인 것이고 의식이 끝나면 참석자들을 사로잡았던 고급한 의식은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뇌리에 놀라운 경험으로 남아 있어서, 그러한 효과를 통해 다른 유사한 경우에 그들의 내면에서 고급한 의식이 보다 빠르게, 충일하게 일어난다.

 

오늘날 그러한 의식이 행해지는 것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같다. 오늘날의 승려들은 아그니(Agni)를 부르는 장엄한 만트라를 외우고 나서 미리 준비해둔 연료에 성냥으로 불을 붙인다. 그러나 고대에는 그 만트라가 영창되면 실제로 아그니가 내려왔고 하늘로부터 불이 떨어졌다.

 

 

순례 행위의 바탕에는 매우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뜻이 내포되어 있다. 어떤 성인(聖人)이 살았거나 비전(秘傳)과 같은 어떤 큰 의식이 치루어졌던 곳, 또는 성인의 유물과 관련되어 있는 곳 등에는 보통 큰 사당이 세워진다. 그러한 경우 그곳에는 강력한 마그네틱 센타의 영향이 흐르고 있어서 때로 그것이 수천년동안 지속되곤 한다.

 

어떤 민감한 사람이 그 장소에 다가가면 그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이 그에게 미치는 효과는 매우 유익하다. 초월적이고 강한 고진동이 흐르는 장소는 그 영향권 안에 들어온 사람의 진동 또한 고양시켜 주어 그것과 잠시동안 완전히 일치되도록 작용하는 힘이 있다. 그러한 성지(聖地)에 가서 강한 마그네티즘으로 목욕을 한 순례자는 며칠동안 훨씬 고양된 의식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 효과의 정도는 사람마다 달라서 순례자의 감수성이 얼마나 뛰어난가에 달려 있다.

 

그러한 순례지 중의 하나가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의 보리수나무가 있는 장소이다. 부처가 여기서 깨달음을 얻은 것은 사실이다. 비록 지금 거기에 있는 나무는 본래의 그 나무가 아니기는 하지만. 원래의 보리수나무는 중세에 쓰러졌고 지금의 나무는 거기에서 나온 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소에는 놀라울 정도로 강한 마그네티즘이 남아 있다. 그것은 아마 앞으로도 계속 수세기 동안 남아있을 것이다.

 

Previous
Next Pos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