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학 대의 8. 진화의 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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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학 대의

신지학 대의 8. 진화의 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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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단 이웃추가 | 2011.11.30.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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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777번 윤회의 길을 걷는다. 그것은 더디고 고통스럽고 비참하고 불안한 시간이다. 그러나 결국 모든 인간은 그러한 불안정을 극복하고 영원한 안전을 주는 흐름 속에 들어가게 된다.

 

비전(秘傳)에의 입문이 그것이다. 이것은 인간 진화의 두 번째 단계로서 첫 단계보다 훨씬 더 중요한 시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길에 들어서기 전에 인간은 의식적으로 자연과 협력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자신의 진화를 스스로 지배해야 한다. 일체성에 대한 자각은 인간을 비이기적이 되게 하며 유익한 존재가 되어야겠다는 열망을 심어준다. 그것은 인간에게 공부에 대한 자극, 완벽한 존재가 되겠다는 소망, 행위에 대한 동기, 내면의 상념과 감정을 판단하는 기준, 접촉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가치관 등을 가져다 준다.

 

그러면 자신을 완벽하게 만드는 작업은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그는 먼저 잡초들을 뽑아내야 한다. 바람직하지 못한 성질들을 하나하나 제거해야 하며, 그리고 나서 좋은 성질을 찾고 계발시켜야 한다. 처음에는 이 낯선 작업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 할 것이다. 새로운 성격을 형성시킨다는 것은 매우 느리고 더딘 작업이다. 거기에는 이러한 노력을 방해하는, 과거에 형성된 많은 요소들이 버티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그는 바람직하지 못한 성질들에 의해 지배되어 왔기에 그것들은 엄청난 타성을 갖고 있다.

 

화를 내는 악습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과거에 화를 폭발시키는 버릇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분노는 일을 더욱 더 어렵게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하나의 강한 습관이 생기게 되면 그 방향으로 엄청난 에너지가 축적되게 된다. 이것은 고유한 성질로, 아스트랄 영구원자(아스트랄 질료의 개체 단위로서 다음 화신 때에도 자아에 달라붙어 남아 있는다)에 저장되게 된다. 그가 분노의 무익함을 깨닫고 다시는 그러지 않으리라 마음먹을 때 그는 수많은 전생 동안 스스로 쌓아놓은 그 힘과 맞닥뜨리게 된다. 자연히 그는 악습을 고치는 데 어려움을 느끼며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게 된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그가 몇 번을 실패했든지 간에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승리는 분명 그의 것이라는 점이다. 자기가 쌓아놓은 힘이 아무리 엄청난 것이라 해도 그것은 분명 한정된 양이다. 따라서 계속적인 노력을 해나간다면 그만큼 상쇄될 것이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여러 생을 통해서라도 부단히 나아갈 수 있는, 악습과 싸워나갈 수 있는 새 힘이 샘솟게 된다. 진화는 로고스의 의지와 조화를 이루고 있기에 그렇게 투쟁하는 그의 배후에는 로고스 자신의 무한한 힘이 버티고 있다.

 

인간이 일체성의 이상을 터득하기 전에는 새로운 성격을 형성시키는 이 어렵고 지루한 작업을 해야 할 마땅한 동기가 없다. 그러나 일단 그 필요성을 깨달으면 비록 천 번을 실패한다 하더라도 노력을 계속해나갈 뚜렷한 명분이 존재한다. 위대한 계획을 이해하는 자는 실패의 횟수에 낙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고통이 아무리 크다해도 무한의 힘이 자기 편이기에 결국 승리는 자기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생에서 생으로 이러한 목적을 기명(記銘)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은 의식을 혼(자아)에까지 고양시켜야 한다.

 

그러나 그에게 그런 능력이 없는 단계에서도 그것을 영구원자(*주19)에 각인시키면 그렇게 된다. 만일 의식이 자아에 도달할 수 있다면 인간은 그 기억(지식)을 내면에 간직한 채 다음 생에 태어난다. 그러나 그가 영구원자에만 각인한다면 그러한 기억을 실제로 탄생과 더불어 가져오지 못한다.

 

하지만 다음 화신에서 어떤 형태로든 그것과 부딪히는 순간 그는 즉각 그것의 진실성을 인식하게 되고 그대로 실천하게 된다. 이렇게 인간이 미덕을 꾸준히 실천하고 올바른 지식을 쌓아나가면 그는 언젠가 분명코 진리의 길에서 예비제자의 문에 들어서게 될 것이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말한 위대한 비전(秘傳)에 입문하게 될 것이다.

 

비전 이후, 세 번째 진화상의 주요 포인트는 흐름의 저편 기슭에 도달하는 것, 즉 아데프트의 경지를 성취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인간은 단순한 인간 단계의 진화 수준을 벗어나 초인 단계의 진화로 들어서게 된다. 한 인간이 도의 제4 단계인 아라한(arhat)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가 처음 흐름에 들어선 이후 평균 7회 정도 윤회해야 한다고 한다. 그 기간은 보통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윤회의 기간 동안 그들은 천계(天界)에서의 중간 휴식기를 거치지 않는다.

 

보통의 경우 천계에서의 삶을 포기할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제자 단계의 인간들뿐이다. 확실히, 제6 근원 인종의 진화를 책임맡고 있는 마누의 밑에서 활동하거나 위대한 마스터들에 의해 인류를 위해 예비된 고귀한 임무를 맡도록 선택된 자들은 천계에서의 휴식없이 바로 지상에 많이 윤회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천계의 삶을 포기하기에 앞서 반드시 천계의 의식을 경험해야 한다는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즉, 그것은 단순히 보상의 자발적 포기의 문제가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 진화의 일부분인 천계의 삶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진화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이 아라한의 단계에 올라서면 그는 제1 비전에서부터 아데프트의 경지까지 이르는 길의 절반을 성취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니르바나에 이르는 길을 방해하는 10개의 큰 족쇄들(*주20) 중에서 5개를 던져버렸기 때문이다. 아라한에게는 나머지 5개의 족쇄를 벗어버려야 할 의무가 있고 그것을 위해 다시 평균 7회의 화신이 허용된다. 그러나 반드시 이해해야 할 것은 이 7번이 법칙은 아니라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보다 훨씬 더 긴 기간을 소비하며 때로 굳은 의지와 인내로 보다 짧은 기간에 비전을 통과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화신 동안 인생의 초기에 구도의 길에 들어서서 용맹 정진함으로써 4개의 비전을 모두 통과한 경우도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극히 드문 현상으로 만 명의 구도자들 중에 거의 한 명도 이루어내기 힘든 일이다. 인간이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붓디체를 완전히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 단계에 이르면 코잘체는 사라지게 되고 굳이 그것을 다시 만들 필요가 없어진다.

 

따라서 아데프트 경지에 도달하기까지 그에게 주어진 7번의 삶은 물질계에 내려 올 필요가 없다. 다시말해 그들은 일반적인 의미의 윤회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경우 그들은 물질계로 내려온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대백색형제단을 위해 물질계에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비전의 후보자가 ‘신성의 길’의 여러 단계들을 통과하고 <안 보이는 조력자Invisible Helpers>에 자세히 언급된 자격요건을 갖추는 데는 평균 14번의 인생이 소요된다. 대백색형제단 마스터들의 제자가 된 자는 항상 개인적인 자유의 길(-단지 선과 악의 카르마가 균형을 이루고 모든 욕망이 사라져 더 이상 지상에 태어나지 않아도 되는 자의 길)이 아닌 포기의 길을 택한다. 그는 로고스의 위대한 계획을 보고 거기에 자신을 내던짐으로써 오로지 인류의 진화를 촉진시키기 위해 삶을 산다.

 

이 길에는 끊임없는 자기 희생이 요구되기 때문에 ‘고뇌의 길’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사실상 이 말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비록 고통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큰 고통이 아니라 작은 고통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게으름과 나태로 작은 고통을 피해 자기의 일을 하지 않고 내버린다면, 후에 그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한 더 큰 고통을 당할 것이 분명하다.

 

이 길에서 그가 불가피하게 겪는 고통은 마땅히 제7 라운드에서 해야 할 일을 지금 여기 제4 라운드에서 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제7 라운드가 되면 우리의 모든 매체들은 훨씬 더 발달될 것이고 그것을 이루는 질료들 또한 완전히 다른 상태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현재 발달이 덜 된 매체들을 가지고 수백만년이나 더 진화된 매체들로 해야 할 일을 하려고 하니 자연 엄청난 긴장이 생긴다. 그리고 그 긴장은 필연적으로 일정한 양의 고통을 야기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운동 선수가 훈련을 할 때 기꺼이 감내해내는 고통과 유사한 것이다. 만일 그가 어떤 큰 경기에 나가길 원한다면 반드시 육체를 평소보다 더 단련시켜야 한다. 비록 고통스럽고 불편하다 해도 육체가 좋아하는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그 또한 자기가 바라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아주 기꺼이 그것들을 감내해 낸다. 만일 그가 비교적 작은 이 일시적 고통을 피하기 원한다면 경기 참가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후에 다른 선수들이 승리하는 것을 볼 때 그는 자기가 나태했던 것에 깊히 후회하게 되고 그로 인해 더 큰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포기의 길’을 걸어나가는데 필요한 노력 또한 이와 유사하다. 어렵고 힘들다고 해서 길에서 벗어난 자는 나중에, 자기가 조금만 덜 게을렀다면 구제해줄 수 있었던 자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게 될 때 양심의 가책으로 훨씬 더 괴로워할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매체들이 때 이르게 적응돼갈 때 겪는 고통은 자아에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저급 매체들에만 가해지는 것이다. 시엽류 따위의 허물이나 각피(角皮)를 벗는 생물의 성장은 여기에 알맞는 적절한 비유이다. 이 생물들은 보호를 위해 외부에 껍질을 갖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은 성장할 때마다 껍질을 벗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불편한 과정임이 분명하다. 성장과정에서 우리는 마치 그러한 생물들처럼 사고의 껍질을 두르고 있다.

 

바야흐로 그 껍질이 비좁아지기 시작하는 시점에 왔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새롭게 성장한 것을 그 안에 담아두려고 애쓴다. 그러나 종국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한 일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는 고통스러울지라도 껍질을 벗어야만 한다. 이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카르마나 자연의 법칙에 화를 낼 일이 아니다. 과거에 그 껍질을 만든 것이 당신이기에 이제 그것을 벗어야하는 것도 당신인 것이다. 지금 껍질을 벗는 불편을 감내하지 않으면 후에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는 불만감에 더 큰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두려워한다. 특히 믿음의 변화에 대해서. 이는 비단 고정된 편견으로부터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불안의 공포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만일 지금의 신앙을 버린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마음의 안식처를 찾을 수 있나 하는 두려움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자신의 신앙에 대해 이성적인 방어능력이 없으며 그와 관련된 문제에 답할 능력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포기하기는 두려워한다. 비록 고통이 불가피하다 할 지라도 조만간 그는 그것을 버려야만 한다. 사실상 껍질을 깨뜨리지 않는다면 고통스러울 것도 없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게 된다.

 

제자의 삶은 기쁨으로 충만하다. 여기에는 한치의 의심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편안한 삶이라는 말은 아니다. 제자가 해야하는 일은 매우 힘들고 고되다. 아주 짧은 인생들 속에 수백만 년의 진화과정(일반적인 자연과정으로는 3라운드 반에 해당)을 압축해 넣는 일이 단순히 기분좋은 일만은 아니다. 애니 베산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제자는 불순물들을 제거하고 다시 새로운 양질의 합성물을 만들어내는 자연의 도가니이다.”

 

그러나 누구나 이런 도가니가 될 필요는 없다. 아마도 합성물이 된다는 것은 진정 자신의 특성을 살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까운 말일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말은 일단 사람이 로고스의 위대한 희생을 보게 되면 그것에 몸을 내던지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저급한 천성들을 벗어버리고 그가 갖고 있는 사소한 장점일지라도 그 일을 돕는데 쓰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제자가 해야 하는 일은 어린 아이들의 장난이 아니다. 때로 그것은 실로 엄청난 긴장을 요구한다. 그러나 열성적인 구도자는 자기 일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충만한 기쁨을 발견하면 그보다 더 가치있는 기쁨이 없음을 안다. 비록 그 일이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능력, 모든 매체들(육체, 아스트랄체, 멘탈체 등)이 견뎌낼 수 있는 수준을 거의 넘어선다 해도 말이다. 일반 사람들이 그러한 임무를 수행할 정도로 진화했을 때, 그들은 지금 가파른 지름길을 분투하며 가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노력해야함을 기억해야만 한다.

 

많은 고통이 생기는 원인은 자연이 그의 소심한 자식들을 위해 제7 라운드의 매체들로 이루도록 예비한 것을 지금 제4 라운드의 매체 장비들로 동일한 성과를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제7 라운드의 놀라운 매체들을 갖게 되면 대다수의 나약한 혼들도 그와 같은 일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수천 번의 화신을 거친 후 이루어진다면 지극히 평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제자는 그의 모든 고통을 초월하여 항상 기쁨과 평화와 고요 속에 살며 지상의 그 어떤 것도 그것을 방해할 수 없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는 실로 스승의 노예에 불과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내면의 자아에 대한 자각을 얻기 위해 매체들에 가해지는 일시적인 긴장을 받아들이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자신을 저급한 자아와 동일시하고 있는 셈이다.

 

이 길을 걷지 않을 때 구도자에게 더 큰 고뇌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감안해 본다면 사람들이 이 길을 고뇌의 길이라고 묘사한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자기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 자에게는 진짜 고뇌가 찾아오지 않는다.

 

“오! 사랑하는 자여! 진정 올바른 일을 행하는 자는 고뇌의 길을 걷지 않느니라.” <바가바드 기타 40-6>

 

이것은 제자의 내적인 삶에 대한 것이다. 사람이 흔히 물질계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할 때 만일 그가 세상을 돕기위해 어떤 공적인 일을 한다면 고뇌의 길이라는 이름은 결코 적절한 것이 될 수 없다. 14세기, 플란더스의 신비가 루이스 브로이크는 진리의 길에 들어선 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종종 이 불행한 자들은 지상에서 좋은 것들(친구, 혈연 따위)을 빼앗기며 모든 자들로부터 버림받는다. 사람들은 그들의 신성을 의심하고 업신여기며 이생에서 그들이 한 모든 일들을 혹평한다. 그들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거부되고 경멸받는다. 또 때로는 여러 질병으로 고통받기도 한다.”

 

블라바츠키 여사는 이에 대해 어떻게 썼는지 명심하라.

“어떤 내밀한 진리를 가진 신의 사자(使者), 비전가(秘傳家)들 중에서 질투와 악과 무지의 개들로부터 십자가에 못박히고 갈갈이 찢기지 않은 자들을 역사상 어느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그것은 잔인한 오컬트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야만인들이 짖어대는 것을 무시할 사자의 심장을 갖지 못한자, 불쌍하고 무지한 바보들을 용서할 비둘기의 혼을 갖지 못한 자는 이 신성한 학문을 포기하라!” <시크릿 독트린, 90>

 

세상이 새로운 진리를 대하는 첫 번째 태도는 그것을 비웃는 것이다. 다음에는 그것에 대해 화를 낸다. 그리고 나서 마침내 그것을 채택하며, 항상 그러한 견해를 갖어왔던체 한다. 그동안 그 새로운 진리의 창시자는 아마도 죽임을 당했거나 비탄에 빠진채 생을 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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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주19) 영구원자(permanent atom)

 

모나드가 자신을 현현시킬 목적으로 사용하는 센타이다. 물질 영구원자, 아스트랄 영구원자, 멘탈 유닛, 멘탈 영구원자, 붓디 영구원자, 아트마 영구원자가 있다. 모두 각각의 계(界)에서 제1 부분계에 있다. (멘탈 유닛은 저급 멘탈계의 가장 높은 부분계에 있다) 이 영구원자들은 각각 하나의 안정된 센타를 형성하며 상대적으로 영구적이라 할 수 있다. 영구원자 주위에는 다양한 껍질 또는 매체들이 만들어진다. 문자 그대로 작은 힘 센타들이다.

 

 

주20) 10개의 큰 족쇄들

 

1. 도(道)의 제1 단계에서 제자는 3개의 족쇄를 벗어던져야 한다.

 

1)사카야디티(sakkayaditthi)-자기 기만

자기 기만이란 저급 자아와 결합해 있는 육체를 진아와 동일시하는 것으로 이로 인해 타인과 의 일체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인종, 신앙, 성별 들을 구분지우는 제한을 갖게 된다.

 

2)비치키차차(vichikichachha)-의혹

진화, 카르마, 윤회 등에 대한 의혹이다. 개인적 체험이나 논리적 추론에 의한 신념으로 이러 한 의혹을 떨쳐버려야만 한다.

 

3)실라바타파라마사(silabbataparamasa)-미신

종교 의식이나 제사에 의존하는 마음이다. 이 족쇄를 벗어던지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만을 믿 고 종교의 껍데기에 얽매어서는 안된다.

 

2. 도의 제3 단계에서 제자는 2개의 족쇄를 던져야 한다.

 

1)카마라가(kamaraga)

감각적 즐거움(육욕 등)에 대한 집착

 

2)파티가(patigha)

노여움 또는 미움

 

3. 도의 제4 단계에서 제자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5개의 족쇄를 떨쳐버려야만 한다.

 

1)루파라가(ruparaga)

형상의 세계에 대한 욕망이다. 제자는 물질계, 아스트랄계, 천계에서 형상을 가진 삶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한다.

 

2)아루파라가(aruparaga)

형상없는 세계(고급 멘탈계, 붓디계)의 삶에 대한 욕망

 

3)우다치차(uddachcha)

흥분

 

4)마노(mano)

거만

 

5)아비자(avijja)

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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