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학 대의 22. 상식 * 형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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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학 대의 22. 상식 * 형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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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단 이웃추가 | 2011.12.13.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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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신지학의 자세

 

 

 

 

상 식

 

 

모든 것 위에, 그리고 모든 상황 아래서 오컬트 학도는 반드시 상식을 견지해야만 한다. 그는 많은 새로운 사상, 깜짝 놀랄 사실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새로운 모든 것들을 이상하게 받아들이고 균형을 잃는다면, 습득하는 지식이 많아질수록 이득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해를 입게 될 것이다.

 

발전을 위해서는 많은 특성들을 갖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잘 균형잡힌 마음이다. 신비학은 사실상 일반적인 사람들이 인식할 수 없는 많은 것들에 대한 연구이다. 그리고 방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습득하고 그것을 이성적, 상식적으로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학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모든 신비학은 바로 가장 이상적인 상식일 뿐이다.

 

 

 

 

형제애

 

 

본질적으로 인류의 형제성은 하나의 사실이다. 그것을 부인하는 자들은 단지 그런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 자들일 뿐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에 대해 눈을 닫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류의 형제성을 부인하는 자들에 대해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자연(自然)이 알아서 그들의 잘못을 바로 잡아줄 테니까.

 

그들보다 더 미묘하게 위험한 자들은 바로 그것을 오해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한 자들은 부지기수이다. 형제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뿐만 아니라 무엇을 의미하지 않는지 또한 명심해야 한다. 형제성은 결코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예외적인 상황하일지라도 형제성은 최소한 연령의 차이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다른 모든 차이들, 힘, 지력, 능력 등의 차별성을 자체에 내포하고 있다.

 

형제애는 관심의 공유가 아닌 이해(利害)의 공유를 의미한다. 만일 한 가정이 부유하다면 그 구성원 모두가 이익을 얻을 것이며, 가난하면 구성원 모두가 똑같이 그로 인해 고통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해(利害)의 공유가 있다. 그러나 형제들의 개별적인 관심들은 완전히 다르다.

 

14살짜리 소년이 6살난 동생과 무슨 관심을 공유할 수 있겠는가? 그 소년은 또래의 친구들 사이에서 자기의 삶을 살고 있으며 동생보다는 친구들과 훨씬 더 공통된 점이 많다. 14세 소년의 마음은 학교 생활의 상벌에 대한 의식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세상에서 자신의 길을 힘겹게 헤쳐나가고 있는 25살난 그의 형이 그런 것들에 무슨 마음 쓸 일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아무리 형제 사이라 해도 그들이 똑같은 것에 관심을 갖거나 좋아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설령 가능하다 해도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해야할 일은 나이에 따라 달라지며, 가정을 발전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가족 구성원 모두가 저마다 처한 삶에서 각자 최선을 다해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결코 모든 사람이 태어날때부터 카르마가 갖다준 환경에 항상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환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정직하고 무해한 방법으로 선업(善業)을 만들려 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자유이다. 그러나 그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그는 그곳에서의 의무를 수행해야만 한다.

 

아이들은 계속 자라고 있다. 아이가 어떤 특정한 연령에 이르렀을 때, 그가 해야할 일은 바로 그 나이에 해당하는 일들이지 결코 형들의 일이 아니다. 각자의 나이에 맞게 해야 할 일들이 따로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린 사람은 배우고 섬기는 일, 연장자는 인도하고 보호해 주는 일. 그러나 어떤 경우에나 변함없이 같은 것은 사랑하는 것, 도와주는 것, 인류라는 대가족의 이상(理想)을 깨닫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가족 구성원 각자는 형제들을 힘껏 도와주어야 한다. 그들에게 간섭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가족의 일원으로 자기의 의무를 열심히 해나감으로써 말이다.

 

 

우리 신지학회의 형제애는 매우 실제적인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깊은 우애, 진정한 동체감, 결속 등을 인식하고 깨닫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것은 멤버들 각자가 이기심을 버리고 타인의 이익을 먼저 생각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

 

신지학회의 마음은 마스터들이 작용할 수 있는 통로인 붓디체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러한 통로의 완성은 멤버들의 자세가 얼마나 열성적이고 헌신적인가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 통로는 개체로서의 자기만을 중시하고 전체의 이익과 안위는 거의 생각지 않는 멤버들의 성향 때문에 아직은 매우 불완전한 상태이다.

 

담벽을 이루고 있는 돌들은 제각기 알맞은 위치에 쌓여져야 한다. 여기 하나 삐져 나오고 저기 하나 튀어나오고 하면 벽이 울퉁불퉁하게 될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제대로 된 벽이 될 수 없다. 우리는 거대한 계획의 극히 작은 일부분, 말하자면 기계의 한 부품에 불과하다. 우리가 할 일이란 스스로를 그 작은 부분에 꼭 알맞도록 만들어 가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비록 세계의 드라마에서 주역을 맡을 수는 없을 지라도 우리가 맡은 그 작은 일이 잘 이루어지고 지속됨으로써 보다 큰 전체 안에서의 역할을 훌륭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700년 후에 우리의 두 마스터들이 제6 근원인종을 출발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당신들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이미 그 작업을 도와줄 수 있는 적합한 사람들을 찾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은 그 대작업에 필요한 특성을 발전시키는 고도의 훈련을 부과하는 작업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 북아메리카에서 막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있는 아리안 문명의 제6 아인종의 태동이다. 이미 이 일에 대한 준비 작업의 징표들이 보이고 있다. 다른 인종의 사람들이 하나로 합쳐지고 있으며, 우리 역시 이 일에 해야할 일역을 갖고 있다.

 

우리는 어린이들이 성장 초기에 올바른 환경에 있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 한 인종의 유년기 때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우리가 어린 인종을 올바른 방향으로 출발시키는데 성공한다면 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역사의 이 중요한 시기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시급히 인식해야 할 계획의 한 부분은 제5 아인종(튜튼인종)의 다양한 가지들의 결합이다. 우리들 중의 다수가 거기에 속해있다. 영국 식민지인, 아메리카인, 스칸디나비아인, 네덜란드인, 독일인,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노르만으로서 고대 북유럽의 후손들, 남부의 국가에 살고 있는 고트족과 비시고트족의 후예들…. 대계획의 작업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바람직한 일은 이 모든 인종들 상호간에 훨씬 더 가까운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 일은 이미 영국과 미국에서 상당한 정도 성취되고 있다.

 

 

바야흐로, 다른 종교들을 통합하고 보다 폭넓은 바탕 위에 순수성을 오래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가르침, 새로운 종교가 발진되어야 할 시기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새로운 가르침이 나오기에 앞서 우리는 반드시 전쟁이라는 악마를 먼저 제거해야 한다. 이 악마는 오늘날 우리의 머리 위를 유령처럼 떠돌며 세계의 최고 지성인들이 계획하고 있는 사회 실험들을 무력화시키고 있고 우리 정치인들이 하고자 하는 대규모의 새로운 계획과 체계적 방안의 시도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필수 조건은 일정 기간동안 전 지구적으로 평화가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동안 수많은 노력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이미 시도되어 왔다. 그러나 어떤 다른 방법의 시도가 다시 있어야만 할 것 같다.

 

그렇다면 그것을 이루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모든 나라가 자국(自國)의 이익을 위해 세계 평화를 외치도록 만드는 것이다. 튜튼 인종의 다양한 지류인 우리들은 세계에서 가장 큰 무역 국가들이다.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 무역은 타격을 입는다. 따라서 나는 우리들이 서로 결속하여 평화를 주장할수록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빨리 깨달았으면 한다.

 

사실상 이것은 순전히 자기 이익만을 고려한 것이기에 그다지 숭고한 동기는 아니다. 그러나 대 통치자들과 정치인들이 추상적 사상인 인류애의 발로로 서로의 통합을 바라게 될 때 바로 이 저급한 동기가 아직 덜 깨인 자국 국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노선에 동조하도록 만들고, 그 계획을 실행하는 어떤 운동을 시작할 때 그들로부터 따뜻한 지지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각국의 국민은 개인들과 마찬가지로 제각기 그들만의 특성(국민성)을 갖고 있다. 만일 우리가 서로 협동하여 이 대 사역을 해나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 점을 감안하여야 한다. 그런 특성들에 관대하고 친절한 관심을 가질 것이지 결코 비웃거나 신경을 자극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큰 국제적 작업을 돕기 위해 우리가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최소한 다음과 같은 일이다. 누군가 우리 앞에서 다른 나라를 헐뜯고 비웃는 소리를 하면 우리는 항상 그에 대한 반대 의견을 제시하고 그 나라의 장점을 말해야 한다. 우리가 항상 부정적인 것에 논박할 수는 없다 해도 적어도 어떤 좋은 점을 덧붙여 줘야 할 것이다. 아마 우리의 수가 너무 적은지도 모른다.

 

그러나 1년만 해도 우리들 각자는 최소한 천명의 사람들을 만날 것이고 그때마다 우리는 우리 국가가 다른 국가들에게서 좋은 점을 보도록 돕는 센터가 될 것이다. 그것이 비록 하찮은 일일지라도 그로 인해 우리는 통합의 길을 보다 순조롭고 용이하게 만드는데 일조하는 것이 된다.

 

많은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편협한 선입관을 가지고 타 국가의 특수성을 비난하곤 한다. 적어도 우리는 그와 같은 행위를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우호적 감정의 조성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해봐야 얼마나 효과가 있겠는가, 하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우리의 노력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배후에서 일하고 있는 분들에 의해 이용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우리가 그 계획을 돕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것은 분명코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최선을 다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계획의 실행에 이용되는 사람들은 꼭 선한 사람들만이 아니다.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대백색형제단은 필요한 활동을 진행시켜 나가기 위해 모든 종류의 세력을 이용하고 있다. 그렇다. 심지어 매우 이기적이고 결점투성이인 사람들까지도.

 

로버트 사우디는 <탈라바>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부지중에 악인은 하늘의 정당한 뜻을 수행하고 있다.” “만물은 모두 신을 사랑하는 자들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있다.”

 

이 말은 개인적인 카르마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보다 크고 넓은 체계에서도 동일한 효력을 지닌 말이다. 예를 들어서 기독교의 광신은 그것이 아무리 나쁘다고 할지라도 전적으로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믿음의 힘을 계발시키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무지한 자는 광신이 되지 않고는 강하게 믿을 수 없는 법이니까.

 

상업적 이기주의 또한 나쁜 것이다. 그러나 그것 자체는, 배후의 존재들에 의해 이용될 수 있는 특별한 힘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의지와 집중의 힘을 계발시켜 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여 계발된 성질은 미래의 생에 아주 가치있게 이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선한 측면에서 그 계획을 돕고 협력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만일 우리에게 주어진 이 기회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은 다른 자에게 주어지고 그 자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또 다른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결국 어떠한 경우이든 그 일은 성취되고야 말 것이다. 사람이 부족해서 일에 지장이 초래되지 않을까 염려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우리로서는 가엾게도 친구들이 자기한테 주어진 기회를 놓친 걸 딱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무지하기 때문에, 또는 선견지명이 부족해서 자기들의 진정한 이익에 반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그들의 어리석음은 단지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언제가 그들도 진리에 눈을 뜨게 될 것이다. 이 생에서가 아니라면 미래의 다른 어느 생에서라도 말이다.

 

아무튼 내부적으로 모든 것은 완전하며 위대한 작업은 계속 추진돼 나가고 있다. 세계의 진화는 결국 어떤 큰 사업과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철도를 만드는 사업에 대해 생각해 보자. 철도 회사나 승객들 입장에서는 어느 인부가 어느 레일을 깔았고 어느 볼트를 조였는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감독관은 일의 처리 사항을 유의하여 살필 것이다.

 

인부에게 있어서 그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일한 자는 삯을 받고 그렇지 못한 자는 받지 못 하기 때문이다. 감독관은 인부가 홧김에 또는 술에 취해서 일하기를 거절하면 이를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생각한다. “마음 쓸 거 없어, 내일 돌아오겠지.”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을 고용한다.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성질이 폭발하여 일을 저버리고 떠났다. 문제는 그 일의 성취여부가 아니라 누가 그 일을 할 기회를 붙잡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마스터들의 일은 어떤 경우라도 성취되게 마련이다. 정의에 대항해 격렬하게 싸우는 사람들은 단지 그들이 이 시험을 통과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들은 아직 일 속에 완전히 자신을 잊을 수 있는 그런 단계에 올라서지 못 했다.

 

그들의 성질은 아직도 사납고 그래서 어떤 새로운 사실이 앞에 나타나면 충격을 받고 균형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물론 슬픈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그들은 이생에서 좋은 기회를 놓쳐버렸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일을 감당할 만큼 강하지 못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도 많은 인생들이 남아있다. 한편 그들 대신 다른 사람들이 그 자리를 맡게 될 것이다.

 

잊지말라. 마스터들의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비록 우리를 도와줄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만큼은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에 잘 대응해 나가고자 한다면 우리의 모난 곳을 마모시키고 흉한 성질들을 제거하고 선한 마음을 고양시켜야 할 것이다.

 

누가 다른 사람에 대해 비평하는 말을 들으면 즉각 그것을 반전시키도록 노력하자. 이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나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선한 말을 함으로써 악한 말에 의해 깨어진 균형을 다시 바로 잡아라. 거짓 생각을 말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가능한 최선의 측면 또는 해석을 말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일은 비유컨데 기계가 마찰없이 원활하게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의 공동체로 통일된 전체가 되는 것이며 외부세계가 조화를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계획은 위대하고, 기회는 영광스럽다. 그것을 붙잡지 않겠는가?

 

그러나 미래의 큰 일을 준비한다는 빌미로 일상 생활에서 주어지는 사소한 임무들을 무시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최근에 어떤 사람으로부터 내가 받은 편지는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는 편지에 쓰기를, 자기가 신지학 지부를 가르쳐야 될 처지에 놓였고 그것은 큰 의무라고 생각하지만 현재의 지식 수준이 매우 불완전하기 때문에 자기가 그럴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것이었다. 답장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지부에 대한 당신의 위치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는 전혀 없다. 분명,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의무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것은 매우 큰 은혜이기도 하다. 그것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 보자. 여기에 수많은 배고픈 영혼들이 있다. 마스터들은 친절하게도 당신에게 그들을 배불릴 통로가 되는 기회를 주었다. 당신은 가르침의 일반 원리를 머리 속에 분명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당신의 상식은 당신이 크게 잘못돼 나가지 않도록 막아줄 것이다. 나는 당신의 지극한 양심에 감탄하는 바이다.

 

만일 당신이 이 주요 원리들을 확고하게 학인들에게 심어준다면 당신의 가르침이 잘못돼 나가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당신이 말한 바대로의 그런 의무를 갖고 있다. 책을 써야하고, 강의를 해야 하는 사람들은 당신보다 더 절실하게 그것을 느낀다.

 

실제로 우리는 때때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당신들은 어떤 책을 쓰기에 앞서 우선 아데프트의 경지에 도달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 책들 속에 아무런 오류도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단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비록 우리에게도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지만 우리는 우리의 불완전한 지식을 형제들에게 나누어주기로 결심했다고. 그리고 나는 결과가 우리의 결정을 정당화 시킨다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아데프트의 경지에 오를 때까지 기다린 후에 책을 쓴다면 완벽할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사실, 우리의 책들은 지금 완벽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아다시피 그렇게 완벽한 책들을 읽기 위해서는 당신은 천년정도는 더 기다려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오늘날의 신지학회의 책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내가 보건데 당신 앞에 놓인 문제는 이와 매우 흡사한 것이다. 당신 역시 당신이 전지(全知)의 단계에 오를 때까지 가르치기를 삼갈 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동안 당신의 지부는 어떻게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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