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학 대의 32.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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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학 대의 32.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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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단 이웃추가 | 2012.01.15.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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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상

 

내 생각에 우리 멤버들은 종종 명상과 관련하여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것같다. 그들은 명상이 작용하는 정확한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 하고 있다. 때로 그들은 명상을 마치고 난 뒤에 어떤 행복감이나 의식의 고양감을 느끼지 못 하기 때문에 자기는 그것에 실패하였고 다 쓸모 없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명상하기에는 자기가 너무 무디고 무겁고 무능하다고 생각한다.

 

명상을 하고 나서 어떤 것도 실제적으로 확실히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전혀 진전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가 뭔가 잘못되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하여 자신을 나무란다. 그들은 종종 내게 어떻게 하면 그 문제를 개선시킬 수 있는지, 그리고 언젠가 느꼈던 환희를 다시 느끼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어 온다.

 

명상과 관련된 이같은 경험은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적인 현상이다. 당신은 기독교 성자들이 소위 무기력한 ‘영적인 가뭄’의 시기에 느끼는 고통에 대해 자주 말하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처럼 느낀다.

 

열려진 창문을 통해 경치 좋은 언덕을 보면서 앉아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러나 하늘은 둔한 회색 빛으로 엄청난 구름장이 수마일 두께로 무겁게 깔려 있다. 며칠 동안 태양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햇빛을 볼 수 없더라고 태양이 저기 있음을 알고 있다. 며칠 지나면 구름은 씻은 듯이 사라질 것이고 그러면 다시 태양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생명계에 필요한 것은 태양의 존재 자체이지 우리가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지의 여부와는 상관이 없다. 물론 태양을 보고 햇빛의 따스함을 느끼는 것이 훨씬 더 기쁜 일임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눈에 보여야 하는 것이 생명계에 필수적인 조건은 아니다.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만일 내가 우리의 감정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이 말 속에 내포된 참뜻에도 불구하고 별로 달갑지 않은 위안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명상의 몇 가지 목적을 기억한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첫째, 우리가 아무리 깊이 세상사에 빠져 있다 해도 적어도 매일 어느 정도의 시간만큼은 고급한 이상에 대한 상념에 바치도록 지키는 것. 둘째, 우리 자신을 마스터와 로고스에게 보다 가까이 이끌고 그들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힘을 받아 그것이 우리를 통해 세상을 이익 되게 하는 것. 셋째, 우리의 고급 매체들을 훈련시켜 그것들로 하여금 최고의 진동에 반응하여 항상 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제 당신은, 명상의 목적들은 우리가 행복감을 느끼건 그렇지 않건 상관없이 항상 성취할 수 있는 것들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는 결과가 불만족스럽다고 해서 명상이 효과 없다고 단정해 버리는 것이다.

 

명상은 마치 어린아이가 매일 피아노 연습을 하는 것과 같다. 때로 그는 피아노 치기를 즐기겠지만 그보다는 훨씬 자주 지겨움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유일한 생각은 언제면 연습이 빨리 끝나나 하는 것이다.

 

아이는 매일의 그 시간을 통해 손가락을 피아노에 익숙케 하고 언젠가 음악으로부터 얻게 될 벅찬 환희, 지금으로선 꿈도 못 꿀 그런 큰 기쁨의 시간을 좀 더 가까이 당겨 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나 그 아이가 연습을 즐기든 싫증을 내든 피아노를 계속 치기만 하면 그 목표에 다가가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명상도 이와 같다. 따라서 명상 중에 행복과 고양감을 느끼든 그렇지 못 하든 양자 모두가 마치 육체를 위한 물리 운동처럼 고급 매체들에 좋은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유익한 명상’을 했을 때 그것은 더할나위 없이 기쁜 일이다. 그러나 유익해 보이는 명상과 그렇지 않아 보이는 명상 사이의 차이점은 그것이 기분에 미치는 효과에 있는 것일 뿐, 우리의 진화에 미치는 진정한 효과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일시적인 둔한 느낌의 원인이 항상 우리 자신의 잘못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종종 과로나 신경의 긴장 같은 순전히 육체적인 원인일 수도 있고 때로 주변의 아스트랄적, 멘탈적 영향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것들에 지배된다는 것은 우리의 카르마이다. 따라서 결국 따지고 보면 우리의 책임인 셈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의기소침하거나 자신을 나무라는 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전혀 없다. 명상의 효과에 미치는 또 다른 요인은 어떤 특정한 시기에 발생하는 혹성의 영향이다. 이것에 대해 내 자신이 아는 바는 별로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문제들에 숙고하지 않고 항상 내 자신의 길을 내가 바라는 대로 밀고 나가려 했기 때문이다. 내 친구 중 한 사람이 언젠가 내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점성가가 그에게 말하기를 목성이 달과 특별한 관계에 있게 되는 시기에 에텔 대기가 확장되어 명상을 보다 쉽게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었다.

 

점성가는 그에게 천궁도를 주었고 그는 3, 4주 동안 매일 자신의 명상 상태를 관찰한 뒤 그것과 대조해 보았다. 마침내 그는 결과가 점성가가 말한 혹성의 영향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한편 특정한 위치에 있는 토성은 에텔 대기를 수축시켜 명상을 어렵게 만든다고 하며 이 또한 같은 방식으로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상념은 우주의 주재자에 대한 생각이다. 그러나 물론 우리의 상념이 우리에 대한 주재자의 태도를 조금이라도 변화시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우주 주권자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무지하고 비철학적인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생각이다.

 

그러나 사람은 확실히 자신을 그에게 열어 놓음으로써 큰 영향을 받게 된다. 만일 당신이 태양을 향해 문을 열어 놓으면 방의 상태는 태양의 힘에 의해 많이 변화된다. 그러나 당신이 창문을 열었다고 해서 태양을 변화시킬 수는 결코 없다. 신을 향해 당신 혼의 창문을 열어라.

 

명상하는 동안 사람들은 모든 것 안에 있는 지고의 자아, 지고의 자아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어떻게 지고의 자아가 형상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지 이해하도록 노력하라. 이것을 실천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의식을 다양한 피조물들, 즉 파리, 개미, 나무 등과 일치시키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나무나 벌레의 내부 의식 속으로 들어가서 거기에서 로고스의 생명이 나타날 때까지 보고 느껴 보는 것이다. 우리는 나무나 개미보다 훨씬 더 진화된 존재이다. 따라서 이 실험이 끝났을 때 의식을 거기에서 철수시키지 못 할 위험성은 전혀 없다. 나무나 개미의 형상 속에 우리의 의식이 갇혀지는 일은 없다.

 

우리는 의식을 확장시켜 어떤 형상의 생명체 속에도 들어갈 수 있다. 처음 이런 실험을 한 사람은 대개 동물들의 행위의 제한성을 깨닫고 깜짝 놀라게 된다. 그는 동물이 분명한 이유를 갖고 특정 방식으로 행동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동물 속에 들어갔을 때 그는 동물의 행위 동기와 의지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제자는 저급한 유형의 인간들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과정 없이는 그들을 온전히 도울 수 없기 때문이다.

 

명상은 우리로 하여금 자아의 근저까지 내려갈 수 있게 하며 발전 과정에서 종종 엄습하는 암흑과 고독을 씻어 낼 수 있게 한다. 우리가 전체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이 개개의 단편(斷片)이 어디에 있든, 어떤 경험을 통해 지나가고 있든 크게 마음쓰지 않게 된다.

 

우리가 느끼는 고독이 무엇이건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님을 알고 있다. 거기 마스터가 항상 도움을 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특정한 형상에 매달려서는 안 되며 로고스의 의지를 수행해 나가는 것 이외에 어떠한 동기도 가져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는 고독감으로 인해 마스터를 잊거나 그에 대한 믿음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따르기로 선택한 마스터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의구심을 갖거나 그에 대한 완벽한 신뢰가 없다면 발전이 있을 수 없다. 그렇게 할 바에는 마스터를 선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선택했다면 그와 그의 가르침을 신뢰해야만 한다.

 

마음을 통제함에 있어서 당신은 먼저 감각을 외부의 소리와 광경으로부터 철수시켜야 하고 타인으로부터 오는 상념과 감정의 파동에 무감각하게 되어야 한다. 이것은 비교적 쉽다.

 

하지만 다음 단계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일단 외부 감각의 차단에 성공하면 이후엔 내면으로부터 혼란이 솟구치기 때문이다. 그것은 통제되지 않은 마음의 활동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많은 초심자들의 명상은 대개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투쟁으로 이어진다.

 

<침묵의 소리>는 이러한 조언을 해주고 있다.

 

“마음은 실상을 죽이는 자이다. 제자여 그 살해자를 죽이라.“

 

물론 당신의 마음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마음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당신은 마음을 지배해야만 한다. 마음은 당신의 것이지 당신이 아니다.

 

마음의 방황을 극복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의지를 사용하는 것이다. 제자는 자기 주위에 보호막을 만들어 스스로를 도와야 한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러나 결국 모든 보호막이란 목발에 불과하다. 의지를 발전시켜라. 그러면 그런 껍데기들을 벗어 던져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아스트랄체 또한 동일한 방식으로 당신을 속이려고 애쓴다. 당신으로 하여금 그 욕망이 당신의 것임을 믿게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이때에도 당신은 같은 방법으로 처리해야 한다. 의지가 발전되는 정도에는 한계가 없다. 육체의 힘을 증진시키는 데는 어느 범위 내에서 분명한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의지의 힘을 키우는 데는 그러한 제한이 없다.

 

우리는 싫증나는 사람들과 함께 싫증나는 일상의 의무를 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 계속해 나가는 용기보다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극적인 순교를 맞이하는 용기를 발휘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 전자는 후자보다 훨씬 더 많은 의지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를 계발하는 노력을 한답시고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때로 어떤 사람은 신지학의 일을 하기 위해 집과 친구들을 떠나 온갖 고난과 궁핍을 맞이하는 의지력을 보여준다.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자유이다.

 

그러나 그런 목적으로 아내와 가족을 떠나온 사람, 자기만을 의지하고 있는 부모를 두고 떠나온 하나뿐인 아들은 분명 자신의 의무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아무리 고상한 동기가 있다 해도 그에게는 그렇게 할 권리가 없다.

 

결연한 명상의 효과로서 우리는 우리의 매체들을 고급한 질료로 만들어 가기 시작한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종종 웅대한 기분을 느끼곤 한다. 그것은 붓디 차원에서 오는 것으로서 아스트랄체에 반사된 것이다. 그러한 영향하에 우리는 훌륭한 일을 하고 큰 자기 희생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확고히 고착되고 균형을 유지시켜 주기 위해서는 멘탈체와 코잘체의 발전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장중한 감정이 얼마 지나지 않아 왜곡돼 우리를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다.

 

기분만으로는 결코 완벽한 균형, 견실함을 성취할 수 없다. 고차원의 느낌이 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이 보다 강력하게 다가오면 더욱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지혜와 안정을 얻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원동력뿐만 아니라 통제력 또한 필요하기 때문이다. 붓디(buddhi)가 의미하는 바는 바로 지혜이다. 그것을 성취하면 나머지 모든 것은 그것이 다 삼켜 버린다.

 

계명에는 전혀 다른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로 어떤 사람이 하나의 문제에 대해 강렬하게, 주의 깊게 생각하면 그것과 관련하여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둘째로, 그는 자신의 고급 자아로부터 오는 계명을 얻길 바랄 수도 있다. 즉, 자아가 자신의 계(界)에서 해당 문제에 대해 진정으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길 원하는 것이다.

 

셋째로 고차원적인 발전을 이룬 사람은 마스터나 데바들과 접촉하여 문제를 해결한다.

 

그 사람의 결론이 자신의 상념체들에 의해 손상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첫 번째 경우뿐이며 고급 자아나 마스터, 데바는 그것들에 전혀 영향받지 않는다.

이 모든 존재들은 아무 문제없이 실체를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 그러나 취득된 정보는 육체 두뇌에 전달되는 절차를 거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정보가 두뇌에 도달하자마자 그것은 우리의 편견에 의해 채색되기 시작한다.

 

명상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우리가 하루 종일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만일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편견을 쌓아 왔다면 명상의 시간에도 그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편견을 인내심을 갖고 제거하고자 노력하고 다른 사람들의 길 또한 우리의 길만큼이나 선한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고자 노력하고 있다면 우리는 적어도 온화하고 관대한 자세를 갖춰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세는 명상이라는 특별한 시간에도 연장될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가 새로운 관념이나 착상의 부정적인 면을 보기는 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당장 눈에 띄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의 좋은 측면 또한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혼의 파워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상념의 통제가 필수적인 선결 요건이다. 상념이 통제되고 의지가 강화되면 다양한 방면에서 많은 것들을 성취할 수 있다. 그것으로 당신은 살아 있는 자나 죽은 자, 병든 자나 슬픔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고 생명의 활력을 불어 넣어 줄 수 있다.

 

당신이 매일 일정한 시간(자신의 발전을 위한 명상 시간 이외)에 그러한 상념을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 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와 같은 일은 어느 정도 그룹 명상에서 행해질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이의 상념이 잠시 동안 고통과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될 것이고 그러한 결연한 노력이 힘과 위로를 방사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힘이 다른 방법으로 이용되면 육체적 질병도 치료하게 된다.

 

아스트랄 시력과 청력의 계발에 대하여 사람들은 대개 그 자체를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고 목적으로 여긴다. 내 생각으로는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모든 힘들을 최대한 활용하고 이 초상(超常) 능력들이 공부와 비이기적 활동의 결과로서 스스로 발현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최선으로 보인다. 그러한 힘들은 분명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능력이, 인격이 충분히 발달되기 전에 찾아오면 위험할 수도 있다. 초월적 능력의 발현을 촉진시키길 원하는 자들에게 나는 <죽음의 저편>의 마지막 장(章)에 설명한 과정을 추천하는 바이다.

 

집의 여건이 허용한다면 명상만을 위한 별도의 방을 특별히 마련하는 것도 좋은 생각이다. 모임의 사람들이 열성적이고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면 그런 방에서 그룹 미팅을 갖는 것도 해롭지 않다. 그러나 어떤 토론이나 언쟁의 우려가 있다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은 근심에 쌓여 있을 때 명상 룸에 들어가도 되는지 묻는다. 그 문제에 대해 내가 충고하고 싶은 것은 ‘나는 고민에 빠져 있어. 그러니 들어가서는 안 돼.’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로 생각하자. ‘이제 명상룸에 들어 갈 꺼야. 그러니 더 이상 걱정하지 말아야지.“ 이렇게 하면 훨씬 더 효과적임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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