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학 대의 26. 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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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학 대의 26. 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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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단 이웃추가 | 2011.12.15.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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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행

 

 

고행(asceticism)에 대한 잘못된 사상이 우리 멤버들 사이에 퍼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고행의 진정한 의미와 유용성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 될 것이다.

 

고행이라는 말은 대개 엄격한 생활, 육체적 금욕을 의미할 때 사용된다. 그러나 이 말은 어원상, 그리이스의 ‘아스케테스(asketes)’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단순히 자신을 운동가로 단련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그 말이 원용, 의미가 변화되면서 영적인 발전을 위해 모든 종류의 극기를 실행하는 것에 적용되게 되었다.

 

욕망과 욕구라는 육체적 본능은 아담의 실락 이래로 인간에 내재한 악의 강한 요새였다. 따라서 그것은 반드시 단식과 고행을 통해 억압되어야만 했다. 이것이 고행에 대한 이론적 바탕이다.

 

동양의 종교들에서도 우리는 때때로 이와 유사한 개념과 마주치게 된다. 그것은, 물질은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라는 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한 관념으로부터, 이상적인 선(善)의 성취 그리고 존재의 비참함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해서는 오로지 육체를 정복하고 학대해야만 한다는 이론이 생겨났다.

 

신지학도라면 동서양의 이러한 이론 속에 무서운 사상의 혼란이 있음을 단번에 알아차릴 것이다. 자기가 전생에 지은 것 말고 인간에게는 어떠한 악도 내재해 있지 않다. 그리고 물질이 꼭 악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물질은 영이 신성한 것만큼이나 신성한 것이다. 그것 없이는 신성의 모든 현현이 불가능하다. 육체와 육체의 욕망들은 자체로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진정한 발전을 이루기 전에 그것들은 반드시 내면의 통제하에 두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육체를 학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오로지 그것을 통제하는 것만이 필요하다.

 

“심한 고행을 하는 사람들,(…)육체를 이루고 있는 집합된 원소에 고통을 가하는 행위는 무지하다. 나 또한 육체 속에 앉아 있나니. 인지하라, 그러한 행위들은 악한 것임을.” <바가바드기타 ⅹⅶ 5, 6>

 

“현혹된 미망 아래 행해지는 자기 학대적 고행은 어둠이라 할 수 있다.” <바가바드기타 ⅹⅷ 19>

 

 

진정한 선인(善人)은 반드시 항상 불편해야 하며, 그것이야말로 로고스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미망이 널리 퍼져 있다. 이런 생각보다 더 해괴망칙한 것은 없을 것이다. 육체를 학대하는 자들은 그 안에 거주하고 있는 로고스를 학대하는 것이라고 말해지고 있음을 볼 때 위에 인용한 바가바드기타의 구절은 그러한 행위가 단순한 어리석음보다 더 나쁜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유럽에서의 이 보편적 사상은 불행하게도 캘빈주의에 의해 남겨진 많은 유물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의 차원을 아득히 앞서 간 마스터들은 슬픔이 아닌 기쁨과 자비에 넘쳐 있다. 우리 또한 타인에 대해 자비심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그들의 슬픔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아주 큰 고난 속에 있는 사람은 아무 것도 분명하게 판단할 수 없다. 그의 눈에는 모든 세계가 어둡게 보이며 어떤 사람도 행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큰 환희 속에 있는 사람은 모든 세계가 밝게 보이며 어떤 사람도 불행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외부의 어떤 것도, 심지어 그 자신조차 변한 것은 없다. 변한 것은 오로지 그의 아스트랄체 뿐이다. 당신이 행복하든 그렇지 않든 모든 세계는 언제나처럼 그대로 나아가고 있다. 당신을 당신의 아스트랄체와 동일시하지 말라. 개인적 감정이라는 미망의 거미줄에서 빠져 나오도록 애쓰라.

 

고통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이 웃기는 이론은, 부분적으로 분명, 욕망의 통제는 진화에 필수적이고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고통은 미덕과는 전혀 무관하다. 반대로 그것은 아직 승리를 얻지 못했다는 징표이다. 고통은 저급한 본성이 아직 극복되지 못 했고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통제가 완전하다면 더 이상 저급한 것에 대한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어떤 고통이나 투쟁도 있을 수 없다. 완전한 통제를 이룬 사람은 올바른 삶을 살며 저급한 것은 피하게 된다. 억지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노력해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고통이란 오로지 중간 단계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것의 부재는 곧 성공의 징표인 것이다.

 

고통주의가 생긴 또다른 이유는 원인과 결과의 혼란에 있다. 진정 앞서간 사람은 그 습성이 단순하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여러 사소한 호사에는 무관심하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무관심은 진보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그는 그런 사소한 문제들에 신경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이미 그런 것들이 유치하게 보이며 더 이상 흥미를 유발시키지 못 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마음으로는 갈망하면서도 진보된 사람을 흉내내어 그것들을 멀리 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그렇게 한다 해도 진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에게는 일정한 수준이 있다. 어린이는 인형과 돌을 가지고 장난하며 논다. 몇년 후 소년이 되었을 때, 그는 크리켓과 축구를 하며 논다. 다시 청년으로 성장하면 이런 것들에 대해 더 이상 흥미를 잃고 사랑과 인생의 게임을 즐기기 시작한다. 어린이가 인형과 돌들을 내버려두고 대신 크리켓을 하며 형들을 흉내낸다고 해서 나이를 뛰어 넘을 수는 없다. 성장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유치한 것들로부터 멀어져가게 되는 것이지 단순히 그가 그런 것을 멀리 하고 나이에 맞지 않는 놀이를 한다고 해서 성장이 강제될 수는 없다. 고통을 위한 고통은 거기에 아무런 미덕도 없다.

 

그러나 다음의 세 가지 경우에는 고통이 자연스럽게 진화의 일부분이 될 수 있다. 첫째는 타인을 돕기 위해 고통을 짊여졌을 때이다. 친구를 간호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힘든 노동을 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두 번째는 예전에 빠졌던 어떤 습관(예를 들어 흡연, 음주, 육식 등)이 자신의 상승의 길에 방해가 된다고 인식했을 때이다. 만일 그가 진지하다면 그것을 즉각 끊을 것이다. 그러나 육체는 특정한 형태의 오염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그리워하고 비명을 지르며 찾게 되고, 결국 그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받게 된다. 만일 결심이 확고하다면 그의 육체는 조만간 새로운 상태에 적응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더 이상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와 그의 육체 사이에 지배권을 둘러싼 전쟁이 계속되는 중간 단계에서는 엄청난 고통이 따르게 된다. 이것은 그런 습관을 길들인 자신의 카르마로 여겨져야 한다. 고통을 통하여 카르마의 대가가 지불되었을 때 승리는 그의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한 단계 더 진화된 상태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육체적으로 매우 허약할 때 나쁜 습관을 갑자기 끊어버리는 것이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경우도 드물지만 있다. 마약 중독이 그 한 예이다. 공포스러운 마약에 희생된 자는 대개 그 복용량을 점진적으로 줄여가는 것이 필요하리라 본다. 왜냐하면 갑작스런 중단으로 생기는 긴장으로 인해 육체가 견뎌낼 수 없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점진적인 양의 감소를 통해 고쳐 나가야 할 습관 중에 또 하나 동정을 살만한 경우로 육식의 습관이 있다. 의사들에 의하면 고기의 소화는 주로 위(胃)에서 이루어지고 야채의 소화 작용은 장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따라서 건강이 매우 약한 사람은 여러 소화 기관들을 일정한 시간동안 필요한 변화와 활동에 조절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의지의 계속적인 압박을 통해 육체는 곧 새로운 질서에 항복하여 적응하게 될 것이다.

 

고통이 나름대로 쓸모가 있는 세 번째 경우는 필요한 때 육체가 자신에게 순종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육체로 하여금 싫어하는 어떤 것을 하도록 할 때이다. 그러나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은, 심지어 그럴 때에도 그것의 가치는 고통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인 육체의 순종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방법으로 사람들은 점진적으로 인생의 많은 사소한 질병들로부터 무관심하기를 배울 수 있고 걱정과 불안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의 단련과 육체를 복종시키는 훈련에서는 반드시 유익한 것들만을 시도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타 요기가 팔을 기진맥진할 때까지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버티는 동안 확실히 의지력이 계발된다. 그러나 엄청난 의지력을 얻는 대신 그는 팔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의지력은 다른 방법으로도 발전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불안, 조바심, 자존심, 성욕 등을 정복하는 노력을 통해서도 영구적으로 유용한(영구적 장애가 아니라)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고행에 마음이 깊이 끌리는 사람들은 바가바드 기타에 나오는 지혜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순수, 정진, 극기, 무해(無害)를 일컬어 육체의 고행이라 하고 조용하며 진실 되고 즐겁고 유익하게 말하는 것을 일컬어 말의 고행이라 하며, 정신적 행복, 균형, 침묵, 자기 통제, 순수한 본성을 일컬어 마음의 고행이라 한다.” <바가바드 기타 ⅹⅶ 14, 15, 16>

 

특히 마지막 구절에서 정신적 행복이 마음의 고행의 첫 요소, 완벽한 자기 통제의 첫 징표로 묘사되고 있음에 주의하라. 행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의무이다.

 

질병, 우울, 좌절은 언제나 실패와 나약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자기 중심적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슬픔과 잘못에 대해 깊은 상념에 빠져 있는 자는 다른 사람에 대한 의무를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를 전염원으로 만들고 있다. 기쁨이 아닌 우울함을 그의 형제들에게 퍼뜨리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이기성이 아니고 무엇인가?

 

고행을 원하는 자는 바가바드 기타에 나오는 충고대로 정신적 고행을 하도록 하라. 그리고 개인적 고통과 어려움이 무엇이건 타인을 위해 자신과 그것들을 잊도록 다짐하고 이웃들에게 행복을 방사하도록 하라. 이 행복은 신지학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통해 나온다. 신지학은 사람들로 하여금 ‘브라만은 지복이다’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도와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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